2019. 07. 13.
“내 팔자가 이런가 봐요. 중국 때도 그렇고.”
‘농구계의 입담꾼’ 정상일 감독을 만나면 항상 듣고 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지휘봉을 잡고 있는 신한은행, 그리고 지난 시즌 OK저축은행까지 자신이 맡은 팀들은 모두 리빌딩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4년 전,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4년 전은 정말 지옥과 같았다.
2015년 1월, 삼성생명,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았던 정상일 감독은 당시 상해 팀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이문규 감독의 추천으로 상해 U16 여자농구 대표팀의 수장이 됐다. 아무런 정보가 없었던 중국농구, 심지어 U16이란 제한은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단기간에 좋은 성적을 바라는 상해시의 압박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선수들의 실력이었다.
“처음 선수들의 플레이를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더라. 슛은커녕 드리블도 제대로 못 하는 선수들이 대다수였다. 하나, 하나 가르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말까지 안 통하니 답답함 그 자체였다.” 정상일 감독의 말이다.
심각한 상황 속에서 상해시는 정상일 감독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1월 부임한 정상일 감독에게 3월에 있을 중국전국체육대회 예선 통과를 바라본 것이다. 중국전국체육대회는 중국 내에서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정상일 감독의 심리적인 부담감도 심각했다.
정상일 감독은 “연습경기를 하면 최소 30점차, 잘하는 팀이랑 상대하면 80점차까지도 허용했다. 중국에는 23개 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최하위권을 전전할 정도였다. 도무지 경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더라. 일단 중국 선수들 자체가 훈련 집중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가르쳐주려고 해도 받아들이는 속도가 너무 떨어졌다. 2개월 후에 있을 예선전에서 떨어지면 나 역시 감독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여러모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 위기에 강한 정상일 감독의 능력이 120% 발휘되기 시작했다. 한국식 훈련을 중국 선수들에게 주입했고, 게으르던 선수들도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격에서 활로를 풀 수 없었던 이들에게 패턴 6개, 그리고 단순한 수비 전술을 확실히 인식시킨 것이다. 또 통역 없이 선수들을 지휘할 수 있도록 리바운드, 패스 등 말하기 쉬운 중국말도 배웠다. 글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정상일 감독과 선수들의 노력은 중국전국체육대회 예선 티켓 획득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대회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1차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패자부활전에서 살아남아 마지막 8강 티켓을 따낸 것이다. 당시 상해시 관계자는 물론 정상일 감독 모두 ‘기적’이란 단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중국전국체육대회 예선을 통과했지만, 여전히 전국의 벽은 높았다. 선수들의 체력 상태는 또래에 비해 낮은 수준이었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했다. 많은 고민 끝에 정상일 감독은 이휘걸 컨디셔닝 트레이닝 코치를 선택했다.
이휘걸 코치는 2010 FIBA 세계여자농구선수권,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여자농구 대표팀, 2014 삼성생명 등 다양한 곳에서 활약해왔다. 이후 프리랜서 개념으로 다양한 종목에서 컨디셔닝 트레이닝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던 도중, 정상일 감독의 부름으로 상해에 다다른 것이다. 이휘걸 코치는 “개인적으로 고민을 많이 했다(웃음). 그래도 (정상일)감독님이 부르셨다는 건 어느 정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사실 팀에 처음 합류해서 본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선수들의 몸 상태가 또래에 비해 2~3살 정도는 낮은 수준이더라. 어떤 부분부터 다가가야 하는지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정상일 감독은 권위적인 지도자가 아니다. 적어도 컨디셔닝 트레이닝에 있어서는 이휘걸 코치에게 감독 이상의 권한을 제공했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 이휘걸 코치는 자신의 모든 노하우를 선수들에게 전수했고, 단기간에 평균 이상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정상일 감독의 지도력, 이휘걸 코치의 컨디셔닝 트레이닝은 팀의 수준을 두 단계, 아니 세 단계 이상 끌어올렸다. 2016년에 출전한 6개 대회에서 4강에 3차례 진출한 것이다.
1년의 준비 기간을 가질 수 있었던 정상일 감독은 수차례 연습경기를 통해 중상위권 이상의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와 정상일 감독의 U16 대표팀은 전혀 다른 결과를 냈다. 광시, 절강, 충칭을 차례로 격파했고, 강소에 버저비터 3점포로 승리를 거두면서 조 2위 및 중국전국체육대회 진출권 획득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정상일 감독은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했던 일을 이뤄낸 것이기 때문에 너무 기뻤다. 그동안 고생했던 것을 전부 보상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웃음).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암울하면서도 그립다. 고생은 그때로 끝날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도 고생의 연속이다. 하하”라며 웃음 지었다.
이후 정상일 감독은 WKBL로 복귀해 해체 위기에 있던 OK저축은행을 이끌었다. 모두가 예상했던 꼴찌 후보였지만, 상해에서의 맞춤 전술을 선수들의 몸에 입혀 4위라는 호성적을 거뒀다. 전 시즌 4승에 그쳤던 팀을 이끌고 13승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고생의 끝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국내 정상급 지도력을 증명한 정상일 감독에게 손을 내민 구단은 없었다. 신한은행 역시 한 번의 논란이 사그라진 뒤, 공모를 통해 정상일 감독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들 역시 2018-2019시즌 6승에 그치며 최하위권의 수모를 겪은 팀. 정상일 감독은 또 한 번 꼴찌팀을 맡게 됐다. 한 가지 희소식은 하숙례 코치를 비롯해 중국에서 같이 고생한 이휘걸 코치, 더불어 방대한 정보력과 확실한 훈련 스타일을 갖춘 구나단 코치까지 합류하면서 탄탄한 코칭스태프를 갖췄다는 것이다.
정상일 감독은 “내 팔자가 이런 것 같다. 매 순간이 쉽지 않지만, 연달아 이렇게 위기가 찾아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웃음).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내가 가진 모든 노하우를 토대로 한 번 잘해보겠다. 중국에서의 고난보다는 100배 더 나은 상황이다”라며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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