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8
유럽에서 내가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이 있다. 세계적인 선수들을 경험할 기회다. 같은 축구선수이지만 '월드 클래스'를 상대하는 건 정말 설레는 일이다. 경기를 치르기 전부터 기대감이 커진다.
16일, 이란에서 돌아온 지 사흘 만에 도르트문트 원정을 떠났다. 분데스리가 최고의 스타디움이라 불리는 지그날 이두나 파크에서 뛴다는 생각에 설렘이 컸다. 홀슈타인 킬 시절, DFB 포칼 4강전을 치른 적이 있지만 당시엔 무관중 경기여서 도르트문트 홈구장의 열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이번엔 달랐다. 코로나19 규제 완화로 관중 6만 명 이상이 경기장을 찾았다. 워밍업을 하러 그라운드에 나오자 경기 시작 전부터 분위기가 아주 뜨겁다. 잠시 후 도르트문트 선수단이 몸을 풀러 나왔다. 안 그래도 뜨거운 열기가 이번엔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도르트문트 최고의 스트라이커, 엘링 홀란드다. 홀란드는 관중을 향해 화답의 박수를 쳐준 후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워밍업에 돌입했다. 아직 직접 상대해본 적이 없어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가 왜 ‘괴물’로 불리는지 몸소 느껴보고 싶었다.
홈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몸을 푸는 홀란드는 즐거워 보였다. 홀란드뿐만 아니라 내가 독일에서 경험한 모든 선수가 그랬다. 경기를 준비하는 눈빛이나 행동에 늘 즐거움이 가득하다. 마치 오늘 개봉하는 만화영화를 오래 기다려온 아이들처럼 반짝반짝거린다. 생각해보면 유럽 선수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준비하는 모습. 경기를 앞두고 긴장하기보다는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고, 늘 웃음이 넘친다. 약간의 압박감을 받는 내 모습과 대조된다. 나 역시 최대한 즐겨보려 하지만, 아직 쉽지 않다.
하하호호 웃다가도 경기가 시작되면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부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다. 도르트문트전에서 나는 교체명단에 속해 전반전에는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홀란드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오직 골을 넣기 위해 뛰었다. 골대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최대한 간결한 플레이로 힘을 아꼈고, 골대와 가까워질수록 아꼈던 힘을 다 쏟아부었다. 골대를 눈앞에 두고 돌진하는 모습을 보니 사냥감을 쫓는 치타가 연상됐다. 동료들에게 자기의 위치를 끊임없이 알려주는 모습은 골을 무척 넣고 싶어 하는 아이 같았다. 찬스가 왔을 때는 기어코 골을 넣어버렸다. 와, 괴물이다.
더욱 인상 깊은 모습이 있다. 홀란드는 슈팅에 실패하거나, 패스를 제대로 받지 못해도 크게 자책하지 않았다. 문득,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상대한 메수트 외질이 생각났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선 외질은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질 좋은 패스를 계속해서 공격수에게 전달해주고, 예상치 못한 패스 루트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자기 플레이에 확신이 있었다. 패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그는 끊임없이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실패해도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모습이 곧 상대방의 기를 누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선수니까. 비슷한 포지션인 나는 패스를 한 번 잘못 주면 위축되고, 더 좋은 방향을 찾아도 과감한 도전보단 안전한 패스길을 택하곤 했다. 당시 외질을 보며 저런 모습을 본받아야겠다 생각했다.
독일로 오니 외질같은 선수가 사방에 널려있다. 홀란드 역시 그랬다. 실수해도 여유롭고 당당한 모습,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홀란드는 이제 겨우 스물 한살이다. 이렇게 어린 선수가 어떻게 단숨에 세계적인 공격수 자리에 올랐을까? 잘츠부르크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황)희찬이가 홀란드의 놀라운 비결을 알려줬다. “잘츠부르크 시절, 보통 오전 운동을 하면 점심을 먹고 오후 1, 2시에 퇴근을 했다. 홀란드는 혼자 오후 4, 5시까지 남았다. 웨이트도 하고, 치료도 받고, 독일어 수업도 받으며 훈련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며 매일매일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솔직히 운동하고 점심 먹으면 집에 가서 쉬고 싶고, 계속 훈련장에 남는 게 쉽지 않다. 그러니 그 친구가 얼마나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에 진심인지 느껴진다. 그런 것들이 운동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훈련장에서 모은 에너지가 운동장에서 발산이 된다. 힘들어도 에너지가 계속 나오니까 더 열심히 한 것 같다.”
“처음 홀란드를 봤을 때는 ‘말라깽이’였다. 매일 그렇게 운동하며 벌크업해 지금의 몸이 된 거다. 식사도 엄청 신경 썼다. 5시에 훈련장을 나설 때 구단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샐러드를 먹고 퇴근했다. 축구를 잘할 수밖에 없는 패턴을 만들었다. 몸도 커지고, 속도도 빨라지고, 힘이 붙고, 슈팅도 좋아지고… 또,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 느꼈다. 홀란드는 최고의 에이전트, 라이올라의 관리를 받는다. 케어를 엄청 잘해준다. 비시즌에도 개인 훈련을 혹독하게 한다. 그런 것도 배울 점이었다. 또 하나 배운 게 있는데, 홀란드는 밤에는 항상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쓴다. 눈의 피로도도 줄이고, 잠자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 이런 일상 속 세세한 것까지 다 신경을 쓴다. 축구를 향한 에너지, 축구를 대하는 태도, 주위 환경, 세심한 노력 등이 다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노력과 열정이 남다른 이들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는 것 같다. 희찬이가 말한 것처럼 부단한 노력은 곧 지치지 않는 버팀목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환경도 잘 갖춰진다면 더 큰 도움이 된다. 홀란드는 최근 부상으로 한 달 휴식을 취하고 우리를 상대로 복귀전을 치렀다. 두 골이나 넣는 모습을 보며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데, 희찬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그는 '준비된 괴물'이었다.
여기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공격수다. 2018 월드컵을 앞둔 유럽 평가전에서 폴란드를 상대하며 레반도프스키를 처음 만났다. 그날 한국이 전반전에 1골을 실점했는데 주인공이 레반도프스키였다. 문전에서 골을 넣기 위한 움직임과 기회가 왔을 때 해결하는 모습이 번뜩였다. 분데스리가에서는 매주 그런 모습을 보인다. 공이 어디로 올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같은 팀의 훌륭한 동료들을 잘 활용한다. 스트라이커가 지녀야 할 면모를 모두 갖췄다.
그런 레반도프스키는 같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스타다. 킬에서 바이에른과 포칼을 치렀을 때가 생각난다. 처음 대진이 나왔을 땐 우리가 이길 거라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에, 동료들과 함께 바이에른 선수들과 유니폼을 교환하자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 선수들과 언제 또 경기를 할 지 모르니 우리에게 유니폼 교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제일 인기가 많은 건 레반도프스키의 유니폼이었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우상인 존재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정)우영이는 그런 레반도프스키와 함께 뛰기도 했다. 1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레반도프스키를 가까이서 지켜본 우영이는 이렇게 말했다. “경기 중엔 골을 간절히 원하는 열정 넘치는 선수이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늘 차분하다. 슈팅 훈련이나 11대11 경기를 할 때 레반도프스키가 침투하는 모습을 보면 뭔가 공간이 어디 있는지 미리 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한테 공이 오면 첫 터치로 슈팅할 수 있게끔 움직인다. 공이 살짝 오든, 강하게 오든 첫 터치가 너무 좋다. 또 인상적이었던 모습이 있다. 팀훈련이 끝나면 레반도프스키는 동료들과 훈련장에 남아 장난삼아 돈을 걸고 내기를 하며 크로스 슈팅을 연습했다. 레반도프스키는 그런 내기에서도 항상 골을 넣었다. 괜히 득점력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다.”
이 칼럼을 통해 꼭 언급하고 싶은 선수가 있다. 내가 가장 본 받고 싶은 토마스 뮐러다. 실력이 출중한 건 물론이고, 경기장에서 주변 동료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마구 발산한다. 2018년 월드컵, 독일전에서 우리는 90분 만에 VAR(비디오판독시스템)을 통해 골을 넣었다. 여기서 뮐러의 행동이 인상적이었다. 주심에게 가서 추가시간이 몇 분인지 물어보고, 6분이라는 답변을 받자마자 동료들에게 손가락으로 6을 보여주며 “아직 시간 남았다!”, “할 수 있다!”라고 외쳤다. 예선탈락을 코앞에 두고 6분 안에 두 골을 넣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디펜딩 챔피언. 어느 누가 쉽게 “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리그에서도 어느 팀과 붙든 동료를 위한 행동이 너무 밝고 긍정적이어서 뮐러에게 시선이 많이 간다. 또, 원클럽맨으로 선수 생활을 하는 점이 특히 멋지고 대단하다. 나는 늘 유럽 진출을 꿈꿨다. 솔직히 말해, 전북현대에서 더이상 동기부여를 찾지 못해 유럽으로 진출하겠다고 결심했다. 진출 후에도 또 다른 팀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동기를 찾는데 뮐러는 오직 한 팀에서 무한한 열정을 내뿜는다. 정말 놀라운 선수다.
남다른 마음가짐, 축구를 향한 열정, 여유와 자신감, 그리고 즐기는 태도.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가진 공통점이다. 여기에 하나 더, 유소년 시스템도 좋은 선수를 양성하는 데 한 몫한다고 생각한다. 올 시즌 초반에 1군 선수들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많이 받아 유소년이나 2군 선수들이 많이 올라왔다. 함께 훈련하고 경기에 출전하며 어린 선수들이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구단이 그렇다. 구단마다 스타가 있는데, 유소년 선수들은 프로팀과 함께 훈련하며 자신의 아이돌을 만나고 새로운 동기부여를 얻는다. 우영이가 바이에른에서 레반도프스키, 토마스 뮐러, 아르옌 로번과 훈련하며 프로의 꿈을 키우고 프라이부르크에서 활약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도 물론 유소년 시스템이 많이 좋아졌지만 유럽처럼 프로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고, 대화를 나눌 기회는 별로 없다. 훈련장도 따로 쓰고, 프로 선수들도 어린 선수들에 대한 정보를 얄팍하게 아는 정도다. K리그에도 프로 선수들과 유소년이 함께 훈련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공한 선수들과 함께 뛰면 자기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하는지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까.
유럽에서 재능있는 어린 선수들이 일찍이 빛을 발하는 비결 중 하나같다. 최근 주드 벨링엄(도르트문트)이나 플로리안 비어츠(레버쿠젠)가 눈에 띈다. 두 선수 모두 18세다. 유망주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나이지만 이미 분데스리가의 스타다. 이런 선수들을 보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린 나이에 이미 커다란 경기장에서 침착하게 공을 몰고, 자기 기술을 보여주는 게 놀랍다. 나는 그 나이때 프로도 아니었을 뿐더러, 경기장에서 내가 가진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것이 정말 어렵고 힘들었다. 저 두 선수는 경기장 안이 편해보이고, 축구 그 자체를 즐긴다. 유연한 유스 시스템에서 성장하며 프로 선수들이 가진 건강한 멘털리티를 덩달아 장착하는 것 같다. 자기 플레이를 향한 확신, 누군가의 시선과 말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 실패에 머무르지 않는 태도. 유럽에서 훌륭한 선수가 꾸준히 탄생하는 데는 피지컬과 기술적인 부분도 있지만 이런 정신적인 부분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이 든다.
*
나는 어릴 때부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고, 매일 공을 찼다. 프로 선수가 되고, 국가를 대표하기 시작하고, 지금은 모두의 꿈인 유럽에서 뛰고 있다. 혹자는 내게 이미 많은 걸 이루었다고 말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이곳 독일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면서 부족한 점을 계속 발견한다. 유럽에서 뛰어 자랑스럽기보다 더 겸손해진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왜 편한 길을 두고 굳이 고된 길을 걸어가는 지 묻는다면, 열여덟의 나는 지그날 이두나 파크에서 어시스트를 기록할 거로 상상도 하지 못했다. 편한 길을 걸었다면 아마 이런 짜릿함은 평생 경험해보지 못했겠지. 이곳에서의 모든 순간은 지금이 아니면 경험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이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이재성] 대표팀 막내였는데 어느새 형이 되었다 (0) | 2022.09.17 |
---|---|
[이재성] 독일에선 훈련이 끝나고 승리의 셀카를 찍는다 (0) | 2022.09.16 |
[이재성] 프로 7년차가 전하는 인터뷰 노하우 (0) | 2022.09.16 |
[이재성] 피할 수 없는 내부 경쟁, 어떻게 이겨낼까 (0) | 2022.09.16 |
[이재성] 유럽파 된 후 깨달은 강적: 시차 적응 (0) | 2022.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