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07
“형, 앞으로 가서 배식 먼저 받으세요!”
언젠가부터 식사를 시작하는 시간이 빨라졌다. 맨 뒤에 서서 가장 늦게 배식을 받는 게 익숙했는데, 동생들이 내 등을 앞으로 떠민다. 이제 내 앞보다 뒤에 서서 배식을 기다리는 선수들이 더 많아졌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지.
생각해 보면 파주 트레이닝센터 4층을 안 간지 오래됐다. 나이가 어린 선수들만 4층을 쓴다. 나도 대표팀에 처음 소집됐을 때는 4층을 썼는데, 2018 러시아 월드컵 전후로 3층으로 내려왔다. 형들과 같이 3층을 쓰는 나이가 됐다. 이제는 4층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다. 그만큼 대표팀 내에서의 나이가 많아진 것을 체감한다.
막내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중고참을 거쳐 고참 선수가 됐다. 고참이 된 걸 실감하며 2022 카타르 월드컵 진출권을 따냈다. 점점 더 많은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끼는 도중에 이룬 성과라 감회가 새롭다. 이번 칼럼에서는 대표팀 내에서 이루어진 세대교체, 내가 느끼는 변화들에 관해 얘기해 보려 한다.
고참이 됐다고 느끼는 순간은 불쑥불쑥 찾아온다. 가장 많이 느끼는 순간은 소집 첫날이다. 오랜만에 선수들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인사하러 돌아다니면 내가 형들에게 인사를 하는 횟수보다 동생들에게 인사를 받는 경우가 더 많다. 첫날부터 내 나이를 실감한다. 앞서 말했듯 배식 순서를 정할 때도 그렇다. 나이 많은 순서로 배식을 먼저 받는 게 대표팀 내의 룰이다. 나도 모르게 예전처럼 뒤에 서있다 보면 동생들이 나를 앞으로 보낸다. 물론 나도 다른 형들이 내 뒤에 있을 때 내 앞으로 가라고 한다. 원정을 떠나 호텔에 갔을 때 방 배정 역시 그런 룰이 있다. 치료실과 장비실에 가까울수록 고참이라는 뜻인데, 내 방이 언젠가부터 치료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또, 이제는 동생들의 나이도 정확히 모른다. 몇 년생이냐고 물어보면 생각보다 어려서 놀랄 때가 많다. 혹은 동생들이 나에게 질문을 하거나, 조언을 구할 때 내가 고참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내가 어릴 때 형들에게 했던 질문인데, 이제는 내가 거기에 대답을 해줘야 하는 시간이 왔다.
그에 따른 책임감이 커졌다. 나는 2015년 3월에 처음 소집됐는데 그때 흥민이와 함께 팀 막내였다. 가장 마음이 편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형들의 눈치도 좀 보고, 팀의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긴장은 됐지만 내 역할만 잘 하면 되던 때였다. 내 것만 챙겨도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내 것에만 집중할 수 없다. 후배 선수들의 컨디션을 살피고, 팀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신경을 많이 쓴다. 지금 우리 팀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내가 따로 챙겨야 하는 사람이 있는지 둘러보게 된다.
든든한 나의 친구들
아마 동갑내기 (김)진수나 (황)의조, (손)흥민이도 비슷한 생각일 거다. 언젠가부터 이 친구들이 후배들에게 여러 방면에서 조언을 해주고 있다. 후배 선수들이 우리 친구들을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때마다 조금 놀랍다. 예를 들면 이번 소집 때 (조)규성이나 (김)건희가 의조의 모든 움직임을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있는 걸 봤다. 이전에 (이)청용이 형, (구)자철이 형이 대표팀을 이끌어주는 모습을 동경하고, 생활적인 면에서도 하나하나 배우던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제는 청용이 형이나 자철이 형의 역할을 우리 또래 친구들이 하고 있구나. 우리가 어느덧 형이 됐구나.
특히 흥민이의 경우에는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어가고 팀을 위해 필요한 이야기를 전하는 위치에 있다. 처음 대표팀에 같이 들어왔을 때는 같은 막내라 장난도 많이 치고 놀았는데 지금은 그때의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냥 고참이 된 나도 이 정도인데, 주장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그래서 대표팀 내에 또래 친구들이 있다는 건 정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흥민이가 주장으로서 형과 동생들을 모두 통솔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홀로 떠안지 않도록, 우리를 의지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사소한 부분, 예를 들어, 훈련이 끝난 후에도 그렇다. 마지막 훈련이 끝나면 항상 흥민이가 먼저 한 마디를 한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어본다. 아무래도 동생들이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그럴 때 최고참 형들이나 우리 친구들이 한 마디씩 한다. 그런 작은 부분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흥민이가 생각하지 못한 관점을 우리가 알려줄 수도 있고 말이다.
세대교체가 이뤄지며 대표팀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게 느껴진다. 이전에는 조금 딱딱한 선후배 분위기였다면 이제는 형과 동생의 분위기랄까? 특히 (김)민재, (황)희찬이, (황)인범이, (백)승호 또래의 친구들을 보면 대표팀의 생활이 정말 즐거워 보인다. 항상 붙어있고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각자 멀리 떨어져서 생활을 하다 친한 친구들끼리 모이게 되니 즐거울 수밖에 없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와 흥민이 진수, 의조가 해맑은 모습으로 함께 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플레이에 항상 자신감이 차있다. 해외에서 뛸 만큼 좋은 실력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거기서 얻은 자신감이기에 동생들이지만 내가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흥민이는 조금 다른 케이스지만 나와 의조, 진수는 모두 대학교를 거쳐 프로로 갔다. 요즘은 바로 프로가 되고, 해외로 진출하는 일이 많다. 그만큼 경험을 쌓는 시기도 빨리 찾아오고, 대표팀 선발 기회도 빨리 잡는다. 아마 거기서 비롯된 자신감이 아닐까. 해외에서 성장하며 얻는 자유분방함과 여유, 당당함도 현 대표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자기 의견도 잘 표현하고, 늘 적극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세대 간의 성향이 다르기에 세대 차이가 존재하는 건 당연하다. 특히 요즘처럼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기에는 신구 조화가 가장 중요하다. 틈을 성급하게 채우려고 하면 팀의 정체성을 잃고, 새로운 팀으로 만들기에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조금 삐그덕거려도, 조화롭게 만들어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렇기에 팀의 정체성을 심어줄 고참 선수들의 역할이 꼭 필요하다. 어린 선수들이 자연스레 팀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고참 선수들은 알려줘야 하고, 어린 선수들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며, 서서히 바꿔가는 게 올바른 방향이지 않을까.
여기서 (이)용이 형, (정)우영이 형, (김)영권이 형 등 최고참 선수들의 역할이 빛난다. 어린 선수들이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게 질책을 마다하지 않는다. 경기를 앞두고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태도를 알려주고, 경기에 대한 중요성을 심어준다. 훈련 도중 조금 해이하거나 어수선한 분위기가 포착되면 그에 맞게 경각심을 주고, 경기 중 집중을 못 하면 욕을 할 때도 있다. 이렇게 가끔 따끔한 말을 해주는 형들 덕분에 우리 대표팀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중심을 유지할 수 있다.
요즘은 그런 형들의 모습을 보며 ‘아, 언젠가는 내가 저런 걸 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나에겐 진수가 있다. 아마 쓴맛을 보여주는 건 진수의 역할이지 않을까. 나는 뒤에서 섬세하게 챙긴다면 진수는 아주 직설적인 성향이다. 의조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며 모범이 되려고 하는 스타일이다. 무뚝뚝해 보일 수도 있지만 후배들과 의외로 장난도 많이 치며 잘 지낸다. 대신 훈련에 돌입하면 눈빛이 달라진다. 그렇게 몸소 보여줄 것 같다. 다시 드는 생각이지만 이 친구들이 있어 참 든든하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부분을 나눌 수 있다. 그렇게 주장 흥민이도 도울 수 있고.
파울루 벤투 감독님과 코칭스태프분들도 큰 도움을 주신다. 어린 선수들의 톡톡 튀는 성향이나 특성을 컨트롤하지 않고, 존중해 주신다. 그 세대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우리 또래 혹은 형들도 부담감을 내려두고 어린 선수들과 즐겁게 노는 모습을 좋아하신다. 풀어주고, 조일 때가 언제인지 잘 아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대표팀을 도와주는 존재가 많다. 자철이 형이나 청용이 형이 현재 팀을 리드하는 영권이 형, 용이 형에게 조언을 많이 해준다. 현재 최고참 형들도 그 자리는 처음이기에 저런 존재가 있어 큰 의지가 되는 것 같다.
앞서 말한 배식 순서나 숙소 층을 정하는 암묵적인 룰이 조금은 올드해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생활 속의 저런 사소한 부분이 대표팀 분위기를 잡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래도 어린 선수들이 일찍 해외에 진출하다 보니 한국 문화를 잃어버리기 쉽다. 이전에 비하면 많이 사라졌지만, 적당한 위계질서는 대표팀에 필요하다. 선후배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코치님들, 스태프들 모두 다 어른이다. 존중하는 문화나 분위기가 잡혀있어야 한다. 그래서 후배들이 이따금 선을 넘을 때는 확실하게 짚어준다. 국가대표는 축구에서뿐만 아니라 인성적으로도 좋은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자리이기에 선배들이 그런 점을 알려줘야 한다. 예전에 청용이 형, 자철이 형이 그런 점을 잘 알려 주며 몸소 모범이 되었다. 그런 모습을 향후 고참이 될 후배들에게 잘 물려주는 게 중요하다. 우리의 미래 과제다.
글을 쓰며 나는 앞으로 어떤 형이 되어야 할까 고민해 봤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이 생각난다. 스웨덴과 멕시코에 연달아 지면서 팀 분위기는 정말 좋지 않았다. 언론에서도 대표팀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다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수들은 인터뷰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 무슨 말을 해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당시 모든 선수가 인터뷰에 나서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나가기 싫어했다. 그때 동생들을 위해 나선 게 바로 자철이 형, (기)성용이 형, (박)주호 형, (김)신욱이 형이었다. 모두가 힘들어하니 대신 나가서 인터뷰를 했다. 그때 참… 힘들어하는 선수가 많았다. 쉬는 시간에는 형들이 방마다 찾아가서 위로하는 모습도 봤다. 형들 또한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자기 자신만 챙기기도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 후배들까지 챙기는 모습은 정말 감동이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우리는 참 많이 울었다. 독일을 이기고도 월드컵에서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우리가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형들 역시 부담감과 긴장감이 한순간에 탁 풀려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난 게 아닐까.
저런 모습을 보며 난 다짐했다. 모두가 궁지에 몰린 듯한 상황이나 부담되는 순간에 팀을 위해, 동생들을 위해 앞장 서주는 형이 되어야겠다고. 내가 막내였을 때는 형들에게 늘 기댈 수 있었다. 형들이 방패처럼 지키고 서서 모진 일을 감당해 줬기에 편하게, 마음껏 축구를 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형들이 걸어가며 남긴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새기고 있다. 저 멀리 진흙탕도 보이고, 돌밭도 보인다. 동생들을 위해 저 힘든 길을 다 거쳐갔을 형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멈추지 않는다. 곧 나의 조국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영광이다. 국가대표가 나를 필요로 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 배식을 받는 순서가 빨리 올수록, 치료실과 방의 위치가 가까워질수록 이 여정의 끝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내겐 하루하루가 정말 소중하고 값지다. 어떤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씩씩하게 나아가겠다.
*
마지막으로 10회 연속 월드컵 진출이라는 목표를 함께 달성한 우리 동료들에게 정말 수고 많았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국가대표의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지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 힘이 들지만 우리들의 노력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우리를 응원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해준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그리고, 이번 월드컵에서 만약 어려운 상황이 온다면 팀과 너희를 위해 마다하지 않고 나설게. 지난 월드컵에서 힘든 상황 속 형들이 동생들과 팀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나를 보호한 것처럼. 그러니 너희는 편안한 마음으로 기량을 마음껏, 후회 없이 펼쳤으면 좋겠다. 우리 함께 기쁜 순간을 만들어가자.
다신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 정말 후회 없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다 함께 노력하자.
이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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