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3. 07
“형, 우리 꼭 같이 선발로 나와서 코리안 더비 만들어봐요.”
(정)우영이가 대표팀 소집 기간에 내게 한 말이다. 갑자기 나온 말이 아니다.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한국 선수가 예전보다 확연히 줄어들고, 이제는 우영이와 내게 관심이 몰리며 일종의 책임감이 생겼다. 주전 경쟁에 예전보다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이제는 우리 둘뿐인데, 우리마저 경기에 나서지 못하면 분데스리가에 관심도 떨어질테니까. 우리가 활약해야 팬분들이 더 많이 관심을 가질 거고, 나아가 독일 구단들 역시 한국 선수를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다. 이런 부분에 있어 부쩍 신경을 많이 쓴다. 우영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있기에 코리안 더비를 꼭 만들자고 한 거다.
다행히 지난 2월에 우리는 그 바람을 성사시켰다. 둘 다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경기 전부터 국내 팬, 구단, 방송사 등의 높은 관심이 피부로 느껴졌다. 분데스리가를 중계하는 방송사에서 나와 우영이를 인터뷰한다던가, 구단에서 콘텐츠를 만든다던가… 내게도 분데스리가의 그 어떤 경기보다 코리안 더비는 더 특별하다. 우리 한국 선수들이 독일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여드릴 기회니 말이다. 당시 경기에서 둘 다 나쁘지 않은 경기력을 보여 만족스러웠다. 경기 후에 우리는 함께 사진도 찍고, 코리안 더비를 치렀다는 기쁨을 나눴다. 서로의 목표를 공유하며 잘 준비하자고 다짐도 했다.
그래서 독일에 있는 한국 동료들은 내게 참 각별하다. 모국어로 서로의 일상과 커리어 목표를 나눌 수 있다. 모두가 먼 타지에서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고, 내게도 좋은 동기부여가 된다. 이번 칼럼에서는 우영이를 비롯해 내가 독일에서 만난 한국 선수들의 이야기를 공유하려 한다.
코리안 더비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백)승호를 먼저 꺼내야겠다. 승호는 대표팀에서 처음 알게 됐다. 대표팀에서는 선수들끼리 사적으로 대화할 시간도 적고, 소집 기간도 짧아 승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승호가 다름슈타트로 이적을 하며 대화를 나눌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 당시 내가 홀슈타인 킬에 있어 같은 2부였기에 종종 맞붙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단연 포칼 16강이다. 그때 연장전까지 승부가 가려지지 않아 승부차기까지 갔다. 공교롭게도 승호 다음 순서가 나였다. 승호가 먼저 여유롭게 승부차기에서 성공하고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공을 차러 가던 길이었기에 우리는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골대로 가는데 갑자기 승호가 자기 손을 나를 향해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라 깜짝 놀랐다. 당시 경기 분위기는 잔뜩 고조된 상태였다. 승호가 나를 그냥 지나칠 거로 예상했는데, 손이 불쑥 나와서 놀랐다. ‘나를 견제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갈 정도로 긴장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승호가 내민 손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본능적으로 나 역시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나도 골을 넣었고, 우리가 승리를 거뒀다. 경기 후에 우리 팀 선수들이 “지금 하이파이브할 때냐!”라며 웃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보니 승호는 아마 골을 넣고 여유롭기도 했고, 나를 응원하는 의미에서 손을 내민 게 아닐까 싶다. 그때는 경기에 너무 몰입해서 놀랐던 것 같다.
승호가 내게 전북현대 이적에 관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승호는 해외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해외에서 계속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출전 시간을 너무 적게 받아 힘들어하던 찰나에 전북에서 제안을 받았다. 나도 전북에서 생활했던 선수로서, 많은 조언을 건넸다. 승호가 계획하는 것을 전북이 계속 지원을 해줄 거로 생각했고, 그 뜻을 전했다. 전북을 선택한 후에는 계속 좋은 모습을 보이며 활약해 뿌듯하다. 대표팀에 가면 격려도 많이 하고, 전북에서 잘 지내는지 생활적인 부분도 묻는다. 적응을 잘해서 기분이 좋다. 언젠가 승호가 다시 해외로 진출하려는 계획도 잘 진행되지 않을까.
우영이 얘기를 조금 더 하고 싶다. 내게 현재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한국 선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우영이 이름을 말할 거다. 독일에서 가장 오랫동안 뛰었고, 어린 시절 최고의 팀인 바이에른 뮌헨에서 성장하고, 프로 데뷔 무대도 치렀다. 지금은 프라이부르크 주전으로 활약한다. 본인 자신도 독일에서의 생활을 편안해한다. 우영이와 맞붙을 기회가 몇 차례 있었는데 아쉽게도 늘 불발되다 지난 2월에 드디어 만났다. 그때 프라이부르크의 새 홈구장에서 뛰었는데, 우영이가 팀에서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 경기장에서 첫 골을 넣은 주인공이 되자 팬들의 정말 크고 따뜻한 응원을 받았다. 경기 중에도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주는 선수라 느꼈다.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전반기에 우영이가 워낙 활약이 좋았는데, 나는 기회를 잘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벤치에 앉아있으면 같은 시간대에 열리는 다른 경기 소식이 들려온다. 작년 8월에 우영이가 슈투트가르트전 전반전에 빠르게 두 골을 넣었다. 그 소식이 들리자 동료들이 “와우, 쟤 뭐야?”라고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너도 같은 한국인 아냐? 쟤 두 골 넣었는데 너는 벤치에서 뭐 하냐!”라고 농담도 쳤다. 우영이가 바이에른에서 뛰었던 것도 다 알더라. 워낙 어린 나이에 최고의 팀에서 뛰었고 데뷔도 했으니 다들 우러러보는 시선이 있다. 나보다 어리지만 분데스리가 경험은 더 많아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하는 입장이다. 지금처럼 경기 출전 기록을 계속 늘리다 보면 언젠가는 차범근 감독님, (손)흥민이, (구)자철이 형의 뒤를 이을 선수가 되지 않을까. 자철이 형을 뛰어넘는 기록을 쓸지도 모르겠다.
우영이의 동료였던 (권)창훈이는 아쉽게도 분데스리가에서 맞붙은 적이 없다. 그래도 내게 창훈이는 각별하다. 아무래도 K리그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약해서 그런 것 같다. 창훈이가 유럽에 진출했을 때 기쁘기도 했지만, 나도 꼭 유럽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유럽에 있을 때 한 번도 못 만난 게 아쉽다. 창훈이와는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해,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 도전해 그런 공감대가 잘 형성된다. 창훈이가 비록 자기가 원하는 꿈을 다 이루진 못했지만 분명 그 도전들이 의미가 있을 거로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용기를 줄 만한 도전이었을 거다.
(이)청용이 형이 보훔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 깜짝 놀랐다. 당시 대표팀에서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한편 설레기도 했다. 늘 존경하던 형이었고, 꼭 한 번 해외에서 같이 뛰어보고 싶었다. 나의 바람이 드디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독일에서 가장 처음 치른 코리안 더비가 바로 보훔전이었다. 경기 후에 청용이 형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형은 내게 생활은 어떤지, 팀 동료들은 어떤지 등등 사소한 부분을 많이 챙겨줬다. 향후 어떤 일이 일어날 거고,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조언도 해줬다. 그동안 이렇게 오래 형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 너무 좋았다. 무엇보다 말로만 듣던 코리안 더비를 내가 동경해온 형과 함께해서 참 뜻깊었다.
현재 상파울리에 있는 (박)이영이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킬과 함부르크가 가까워 종종 만났다. 이영이는 내가 축구 외에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줬다. 워낙 사교적인 친구라 이영이를 통해 새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이영이가 기획한 인종차별 캠페인에도 참여했다. 다양한 외국인 선수가 모여 캠페인을 진행했는데, 사실 이영이가 아니었다면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또 나는 문화생활도 잘 안 하는 편인데, 이영이가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라이온 킹’ 공연에 나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물론 배우들의 대사를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런 훌륭한 공연을 본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일상 속에서 겪는 어려움도 이영이가 많이 도와줬다.
이영이 또래의 (최)경록이도 독일에서 처음 알게 됐다. 2부에서 맞붙을 기회도 많았다. 잦은 부상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데, 팀에서 인정을 받아 기회를 계속 받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다. 베르더브레멘에서 뛰는 (박)규현이 소식도 챙겨보고 있다. 킬에 계셨던 올레 베르너 감독님이 현재 브레멘을 지도한다. 규현이가 소속팀에서 기회를 못받던 때라, 규현이 관계자가 내게 연락해 베르너 감독님의 스타일을 물었다. 내가 알려줄 수 있는 선에서 정보를 최대한 많이 드렸고, 내 휴대폰 번호를 그 분을 통해 규현이에게 전달했다.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내적 친밀감이 생겨서일까? 계속 소식을 확인하게 된다. 규현이가 뛸 수 있는 팀에서 뛰었으면 좋겠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읽고 있던 누군가의 표정이 시무룩해졌을 거다. 그래, 너. 영재! 아마 자기 이름이 언제 나오나 기대하며 스크롤을 내렸을 거다. (서)영재는 내게 가장 각별한 동료다. 해외에서 한국선수와 한 팀에서 지내는 건 정말 큰 축복이고 행운이다. 모국어로 대화를 나누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절로 해소된다. 영재와 한 시즌 함께 뛰며 정말 즐거웠다. 훈련장에서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는 영재가 늘 나서서 통역을 해줬다. 큰 도움이 됐다. 나는 영재의 부족한 모습에 대한 조언을 해줬다.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옆에서 잘 지켜줬다. 영재가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예전에는 경쟁에서 밀리거나,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기분이 안 좋은 티가 많이 났는데 이제는 많이 고쳐졌다고 영재의 가족이 내게 말해줬다. ‘성질이 많이 죽었다’고 말이다. 영재가 조금은 성숙해지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나도 영재에게 참 많이 받았다. 코로나19 시국에 특히 그랬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영재가 옆에서 심심할 틈이 없게 까불거렸다. 워낙 장난기도 많고 활발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정말 친구처럼 편하게 지냈다. 우리 집에서 밥 먹고, 보드게임도 하고, 영재네 가서 놀 때도 있고, 그렇게 복닥거리며 코로나19 시기를 잘 이겨냈다. 영재의 동생도 킬에 있었는데 마치 동생 두 명이 생긴 기분이었다. 가족처럼 느껴졌다. 영재와 나는 당시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잘 채워준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한국 선수들은 전반적으로 독일에서 자리를 잘 잡아왔다. 그도 그럴게, 독일 감독들이 대체로 우리 선수들을 좋아한다. 분데스리가에 오기 전부터 독일 감독들이 한국 선수들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긴 했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리 선수들은 나보다 팀을 먼저 생각한다. 감독과 구단 입장에서는 팀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주는 선수를 좋아하는데, 우리 선수들은 그 헌신은 물론이고 자기 역할까지 잘 소화한다. 그러니 감독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수인 거다. 또, 잘했을 때 겸손할 줄 알고 못했을 때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갖췄다. 이게 우리 선수들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선수들의 적응 능력도 뛰어나다. 적응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딜 가든 그 곳의 문화와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말이다. 우리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감독님과 코치님의 의견을 잘 따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합숙 생활을 하며 내 의견을 내세우기보다 남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때론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유럽에 진출해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아주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물론 한국에서 새 팀으로 이적했을 때의 적응 속도와, 유럽 진출 후 적응 속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문화와 언어 문제가 가장 크다. 적응을 하루라도 더 빨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꼭 공부하라고 말하고 싶다. 원활한 의사소통은 적응의 필수요소다. 독일어는 꼭 갖춰야 할 부분이다. 특히 독일인은 독일어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고, 외국인 선수가 독일어를 어설프게나마 구사하면 크게 존중해준다. 일례로, 마인츠가 올 시즌부터 새로운 홈경기 이벤트를 만들었다. 경기 후 수훈선수 두 명과, 랜덤 선수 네 명이 VIP 팬들과 경기 후 작은 팬미팅을 가진다. 장내 아나운서와 인터뷰도 하고, 팬들과 사진도 찍고 팬사인회도 연다. 내가 잘한 경기에선 내가 인터뷰 대상자가 됐다. 물론 통역이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독일어는 최대한 직접 말하려 노력했다. 어떤 질문에 대해 내가 “당연하지, 오늘 경기는 우리의 경기였어!”라고 독일어로 말했는데 팬들이 박수를 쳐주더라. 독일어를 한마디 했을 뿐인데 다들 기뻐해 줘서 기분이 좋았다. 독일어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독일어를 못하더라도, 하기만 하면 팬들은 엄청 좋아한다고. 프랑크 리베리가 독일어를 엄청 천천히 구사해도 팬들이 좋아해 주는 동영상도 보여주셨다. 그런 걸 보며 적응도 적응이지만, 팬들과 친밀감을 쌓기 위해 언어는 필수라는 걸 느꼈다.
슬슬 칼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이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저도 형처럼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싶어요. 제 꿈이에요.”
예전에 독일 하부리그에서 뛰는 어린 선수들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선수가 독일 하부리그에서 자기 꿈을 위해 도전하고 있었다. 그 친구 중 한 명이 내게 위와 같은 말을 했다. 그때 머리 한 대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그렇게 하부리그에서 뛰는 어린 선수들의 꿈은 나와 다를 거로 생각했다. 나는 K리그에서 MVP를 받고도 독일 2부로 왔다. 내 꿈은 당연히 1부 진출이었다. 내게 분데스리가는 너무나 큰 꿈이었는데, 그 친구들의 꿈도 분데스리가라니. 이 어린 선수들도 나와 같은 꿈을 꾼다는 것에 너무 놀랐다. 그리고 반성했다. 내가 다른 이의 꿈의 크기를 함부로 판단하고 있었구나. 꿈을 꾸는 데는 환경이나 조건이 무의미하구나. 큰 꿈은 그들에게 더 큰 동기부여를 가져다주는구나. 그 친구들을 보며 나 역시 꿈을 더 크게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저마다 큰 꿈을 품고 뛰는 우리나라 어린 선수들이 정말 많다. 나는 무엇을 해줘야 할 지 몰라 그냥 맛있는 밥 한 끼 함께했을 뿐인데, 그 친구들은 시간을 내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내가 흔쾌히 낸 시간에 누군가에겐 감사한 시간이 된다는 걸 느꼈다. 이 칼럼을 읽는 분들도 그들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남겨주시면 좋겠다. 짧은 응원의 댓글이지만 그 친구들에게는 정말 큰 용기와 위안을 가져다줄 거다.
어쩌면 이번 칼럼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런 ‘응원’이 아닐까 싶다. 나는 독일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최고참이 됐다. 자철이 형과 청용이 형이 그랬듯, 자연스레 동생들에게 눈길에 간다. 형들은 내게 먼저 관심을 가져주고, 늘 연락을 취해 응원해줬다. 경기가 있든, 없든 내 안부를 묻고 살폈다. 그게 참 큰 힘이 됐다. 이제는 내가 동생들에게 나눠줄 때라고 생각한다. 타지에서 외롭게 싸우는 후배 선수들을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그런 관심을 통해 그들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게 나의 역할이다.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도 나누고, 여건이 안 되면 짧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응원해주는 것. 나는 향후 이곳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일에서 뛰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좌절보단 기쁨의 순간을 더 많이 누리길 바라며.
이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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