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21
홀슈타인 킬 입단 전. 2, 3년간 유럽행을 몇 차례 추진했다. 늘 불발이었다. 될 듯 말 듯 성사되지 않는 이적을 보며 상실감이 컸다. 내 실력을 탓했다. 최근 샬케로 이적한 (이)동경이를 보면 그때 내 모습이 보인다. 동경이 역시 해외 진출 이야기가 꾸준히 나왔는데 좀처럼 성사되지 않아 동경이의 마음이 많이 복잡했을 테다. 그래도 결국 성공했다. (이)동준이도 같은 시기에 헤르타 베를린으로 향했다. 나까지 덩달아 기뻤다. 무엇보다 모처럼 K리그에서 유럽으로 진출한 사례라 반가웠다.
그들이 독일로 이적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니, 이번 칼럼 주제를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적에 대한 이야기다. 이적을 경험한 선수로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우리 선수들의 이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겪는 상황과 감정은 어떤지 풀어보려 한다.
이적은 선수의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모멘트다.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바라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뜻밖의 순간에 찾아온 선물이다. 어느 쪽이든 커리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더 멋진 미래를 꿈꾸며 맞는 변화지만, 늘 좋을 수는 없다. 그래도 결국 내가 내린 결정이기에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 선수의 의견이 점점 더 많은 존중을 받고 있기에 그만큼 뒤따르는 책임감도 크다.
내가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이적의 과정은 이렇다. 나를 원하는 구단이 에이전트에게 연락하거나, 현 구단에 접촉한다. 에이전트를 통해 연락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 에이전트가 내게 나를 원하는 팀이 있다고 알려준다. 선수는 그때부터 팀에 대한 정보를 찾고, 이적 추진 여부를 고민한다. 결정을 내린 후 에이전트에게 자신의 뜻을 알린다. 만약 선수가 이적 진행을 허락하면, 에이전트가 현 소속 구단과 미팅을 한다. 현 소속 구단이 이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구단끼리 이적료, 연봉 및 조건 등을 협의한다. 모든 조건이 양 구단이 원하는 대로 맞춰지면 구두로 이적을 확정 짓는다. 그런 후에 메디컬 테스트를 받고, 최종 계약서에 사인하고 ‘옷피셜’을 찍는다.
선수가 이적을 먼저 원할 때도 있다. 가고 싶은 구단이 있으면 에이전트에게 의견을 전하고, 에이전트가 해당 구단에 선수를 소개한다. 구단에서 관심이 생기면 선수에 관해 조사해본 후 에이전트에게 이적 추진 여부에 대한 의견을 전달한다. 사실 이런 루트를 통해 이적이 성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런 노력이 가끔 필요하다. 현실을 더 깨닫게 되는 계기도 되고, 더 잘해야겠다는 동기부여도 얻는다. 나 역시 경험이 있다. 나는 2015년 때부터 유럽 진출을 꿈꿨다. 독일부터 영국까지 나와 어울릴 것 같은 팀을 직접 검색해보고, 찾았다.
당시 내겐 에이전트가 따로 있지 않았다. 대신 여러 에이전트를 만났다. 이 구단은 이 에이전트가 전문이고, 저 구단은 저 에이전트가 전문이어서 여러 에이전트와 미팅을 가져야만 했다. 그게 문제였다. 에이전트마다 내게 하는 말이 다르다 보니 뭔가 내 가치관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뭐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도 잘 안 섰다. 누군가는 내게 거짓말을 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정말 믿을 수 있고, 나를 물심양면 지원할 수 있는 그런 에이전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선수 중 대다수가 나처럼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적이 성사되지 않는 경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이렇게 에이전트를 잘 만나지 못해 불발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적을 앞둔 선수들에게 이적 기간은 상당히 고되다. 훈련과 경기보다 이적에 관한 일들에 감정 소모가 크다. 정신이 너무 없는 나머지 물건을 깜빡하고 잃어버리기도 하고, 해야할 일을 까맣게 잊기도 한다. 훈련 전, 후로 핸드폰을 붙잡고 에이전트와 쉴 새 없이 연락을 주고받는다. 오늘은 상황이 이렇다. 어제는 그랬는데, 오늘은 바뀌었다. 참 이상하게 상황은 늘 변하고 변수는 너무 많다. 에이전트가 전하는 소식에 따라 기분도 달라진다. 좋은 소식이면 이적이 성사될 수 있다는 희망에 기쁘지만, 반대 소식이면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
그렇게 계속 에이전트를 통해 구단과 소통을 이어간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에이전트에게 의사소통 문제를 온전히 맡긴다. 선수들은 이런 고된 시기 속에서도 컨디션 관리를 하고, 훈련을 하고, 당장 내일 뛸 경기에 집중해야 하기에 이적 과정에 하나부터 열까지 다 관여할 수가 없다. 특히 해외 구단이라면 시차 문제가 있어 소통이 더더욱 어렵다.
믿을 만한 에이전트가 필요한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이전트는 곧 선수의 대변인이기에 구단과 소통할 때 선수의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뉘앙스도 달라져선 안 된다. 에이전트가 선수의 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자칫 변형되면 그때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에이전트에게 A를 말했는데, 구단에 전달된 이야기는 B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끔 이적이 성사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례들이 나오는데, 대부분 이런 이유에서다. 이것만으로도 힘든데, 에이전트가 여러 명이고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다 보면 정말 스트레스가 많다. 이런 스트레스가 쌓이면 경기력과 컨디션에 지장을 준다. 이적 기간에 멘탈 관리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과제다. 그러니 내가 마음 놓고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 정말 중요하다. 나를 위해 거짓 없이 진정으로 일할 사람이 선수들에게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 닥쳐도 선수는 훈련과 경기에 완벽하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야 하니까.
이적은 두 구단, 에이전트, 선수의 4각 플레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국 선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예전에는 선수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선수들의 트레이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구단과 에이전트가 선수가 아닌 ‘돈’만 우선한 이적을 강행한 적도 있다. 요즘은 거짓말이 금방 들통나고, 선수들도 주변에 조언을 많이 구하며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많이 줄었다. 선수가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삶의 방향이 바뀌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그런 일이 많이 줄어들어 다행이다.
홀슈타인 킬로 이적할 때가 생각난다. 시간이 정말 촉박했다. 에이전트를 거칠 시간조차 아까웠다. 결국 내가 직접 나서 킬의 팀 발터 감독님과 영상통화를 하고, 전북에도 이적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때부터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이적 시장 막바지에 무사히 킬로 갈 수 있었다. 킬로 이적하면서 에이전트도 선택했다. 내 가족 구성원이다. 나를 100% 지원해줄 수 있고, 나 역시 믿을 수 있는 최고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향후 이적을 진행할 때 부수적인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든든한 에이전트 덕분에 구단과의 소통이 잘 되어서 너무 좋다. 선수는 두 구단의 협상 테이블 사이에 놓여있다. 그 가운데서 선수가 양 구단에 얼마나 의견을 잘 피력하는지가 중요한데, 에이전트를 잘못 만나면 그 소통의 끈이 자꾸 꼬여버린다. 이제는 내 의견을 100% 존중하고, 정확하게 구단에 전달하는 믿음직한 에이전트가 내 옆에 있으니 한결 평화로워졌다.
만약 나를 원하는 팀이 다수라면, 정확한 의견 전달은 더더욱 중요해진다. 특정 구단과 구두 합의를 했더라도 선수가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섣불리 ‘오피셜’을 확신할 수 없다. 선수는 내가 가진 가치관과 더 어울리는 팀은 어디인지 마지막까지 비교를 한다. 플레이 스타일이 잘 맞는 팀, 내가 동경해온 팀, 연봉을 많이 주는 팀 등 내가 어디에 가치를 더 두는지에 따라 행선지가 달라진다. 구단과 에이전트는 그 선수의 가치관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섣불리 구단 사이의 '구두 합의'도 해선 안 된다. 내가 중요시 했던 가치관은 감독님의 믿음이었다. 킬로 갈 때도, 마인츠로 올 때도 감독님의 영향이 컸다. 양 팀 감독님들은 나와 직접 영상 통화를 하며 나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직접 설명해주셨다. 이는 곧 내가 경기에 나갈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이기에 이적 결심을 내릴 때 정말 중요하게 작용했다. 협상 테이블을 연 팀들과 그 틈에서 조율하는 에이전트 역시 나의 이런 가치관을 잘 알기에 성공적으로 이적이 성사될 수 있었다.
가족의 역할도 내겐 컸다. 비단 선수뿐만 아니라 누구나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을 때 가족과 주변인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늘 커다란 선택을 앞두고 가족의 의견과 조언 덕분에 결정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먼저 전북 입단 당시다. 입단을 앞두고 둘째 형(이재권)의 조언이 도움이 됐다. 고려대학교에서 전북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졸업 시즌까지 남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때 먼저 프로 선수로 뛰던 재권이 형이 내게 1년이라도 더 빨리 프로선수가 되어 경험을 쌓으라고 했다. 재권이 형의 조언 덕분에 시기적절하게 프로가 되어 실력도 쌓고, 경험도 늘렸다. 다음은 전북에 있을 당시다. 매년 중국과 중동에서 달콤한 제안이 들어왔다.
그때마다 내가 거절하고 참을 수 있던 이유에는 아버지와 첫째 형의 조언이 컸다. 첫째 형은 축구선수로서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유럽 생활은 기회가 있을 때 꼭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너의 꿈을 우리 가족을 위해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진심이 담긴 말씀을 해주셨다. 이처럼 가족의 진심 어린 조언과 응원이 도전을 앞둔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고, 올바른 선택을 내릴 용기로 이어졌다. 축구하는 형, 동생들의 조언 또한 큰 도움이 됐다. 독일 2부 리그와 덴마크 리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당시, 독일에서 활동하던 형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박)주호 형, (구)자철이 형, (지)동원이 형 등이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또 덴마크에서 뛰어본 (윤)석영이 형에게도 이런저런 장단점을 물어봤다. 독일 2부에서 이미 뛰고 있던 동생 (박)이영이의 도움도 컸다. 다들 자신의 경험, 그 속에서 생각한 것들을 전해줬다. 덕분에 킬이라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가족과 주변인의 도움 없이 혼자 결정을 내리는 건 불가능한 것 같다.
‘이적’ 키워드가 담긴 나의 지난 순간들을 되돌아보니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과 배려로 이뤄졌단 사실을 느낀다. 아쉬움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이의 진심 어린 도움과 배려를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훨씬 크다. 어릴 적 축구선수를 꿈꿨지만, 해외에서 선수 생활을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목표만 바라보고 달렸는데, 단계별로 차례대로 지나다 보니 이곳 독일까지 나왔다. 지금 있는 이 자리가 내겐 꿈만 같다.
이적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결국 내 욕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내 실력보다 더 높은 팀을 원하는 건 욕심이다. 여러차례 이적 기간을 경험하며 깨달았다. 킬로 이적하기 전 수많은 이적건이 불발된 이유도 결국 내 실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인정할 만한 실력이 아니었으니 성사가 안 된 거다. 사실 다른 건 다 핑계다. 선수나 구단의 욕심만으로 이적은 절대 이뤄지지 않는다. 충분한 의사소통, 신뢰할만한 에이전트, 구단 사이의 적절한 합의 등 다른 요소가 다 갖춰져 있어도 ‘선수의 실력’만큼 결정적이진 않다. 앞서 의사소통 문제로 이적이 불발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지만, 결국 실력이 그 모든 문제를 뛰어넘을 만큼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적이 불발될 때마다 나는 꾸준히 내 실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전북이라는 최고의 팀에서 주전으로 뛰며 자칫 해이해질 수 있지만 내가 절대 안주할 수 없던 이유였다. 유럽으로의 성공적인 이적. 유럽 팀에서의 인정을 향한 갈망. 그 처절함과 간절함을 경험했기에 마인츠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무너지지 않는 ‘깡’을 갖춘 게 아닐까. 이적은 참 어떤 한순간 같지만 선수의 삶에 오래도록,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동경이와 동준이의 이적이다. 대표팀 소집 기간에 이적이 성사되는 경우는 처음 봤다. 파울루 벤투 감독님의 결정에 놀라웠다. 월드컵 최종 예선이라는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선수의 한 번뿐인 미래를 위해 배려해주신 감독님의 결단이 이번 이적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울산현대의 결정 역시 놀랍다. 개막을 앞두고 팀의 중요한 선수를 두 명이나 해외로 보냈다.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다. 선수들의 꿈을 위해 희생한 감독님과 울산현대 구단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렇게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은 동준이와 동경이에게는 유럽에서의 시간이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그들이 더 성장할 모습이 기대된다.
(황)희찬이도 언급하고 싶다. 희찬이를 보면 이적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올 시즌 개막전을 라이프치히와 치렀다. 당시 희찬이는 입지가 좋지 않았다. 경기 후 희찬이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스스로 충분한 기회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팀을 떠나고 싶어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정말 안타까웠다. 그런 와중 희찬이를 진심으로 원하는 팀, 희찬이를 뛰게 해줄 팀이 생겼다. 울버햄튼이다. 더 좋은 무대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보란 듯이 활약하고, 전에 없던 자신감도 얻었다. 축구를 진심으로 즐기고 다시 행복하게 공을 차는 희찬이를 보며 마치 내 일처럼 기뻤다. 그동안 독일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앞으로는 희찬이가 가진 멋진 모습을 팀에서도, 대표팀에서도 마음껏 보여주며 행복하게 축구를 했으면 좋겠다.
이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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