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3. 28.
180cm의 작은 신장, 그러나 앨런 아이버슨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드리블, 공격성 강한 야수와 같은 남자였던 토니 애킨스. 그가 처음으로 KBL 무대에 들어섰을 때 국내 농구 팬들은 새로운 농구에 눈을 뜰 수 있었다.
2008년 11월 5일 KBL은 이사간담회를 개최, 선수층 확대와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혼혈 선수들을 전향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진행되어 오던 국내외 드래프트가 아닌 별도의 드래프트를 마련해 KBL에 설 수 있도록 한 결정이었다.
이에 그동안 해외리그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혼혈 선수들이 KBL 무대에 데뷔할 수 있게 됐고 새로운 재미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물론 이전에도 해외동포선수들의 KBL 진출 사례는 존재했다. 김효범, 한상웅, 최금동, 최은동 등이 존재했으며 이동준 역시 귀화 후 당당히 나설 수 있었다.
귀화하지 않았던 에릭 산드린(이승준)의 경우 2007-2008시즌 외국선수 신분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KBL은 아직 귀화를 하지 않은 혼혈 선수들에게도 외국선수와 다른 신분으로 데뷔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물론 이 과정에서 기회 상실의 문제가 될 수 있었던 대학농구는 크게 반발했다. 아마농구에 큰 피해가 올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한 이의제기였다).
전태풍은 “2005년? 2006년?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KBL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를 계속 전달했다. 하지만 아직 귀화하지 않은 내가 뛰려면 외국선수로 와야 된다고 하더라. 외국선수 신분으로 뛰어야 한다는 건 조금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유럽 생활을 더 하다 보니 혼혈 선수 드래프트가 열리니 참가해도 좋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갈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2009 귀화 혼혈선수 드래프트는 2009년 2월 2일 양재교육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모두의 관심사는 두 남자에게 집중됐고 전체 1순위의 주인공은 당시 그리스 리그에서 뛰었던 애킨스가 차지했다.
당시 허재 감독은 ‘행운의 남자’로 불렸다. 2008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하승진을 지명한 뒤 정상에 섰던 그는 귀화 혼혈선수 드래프트에서도 전체 1순위의 지명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승진이란 최고의 빅맨을 보유하고 있었던 허재 감독에게 애킨스는 KCC의 앞선을 보강할 수 있는 확실한 무기였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애킨스를 지명한 그는 “우리 팀에 잘 맞는 선수를 뽑았다”라며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국내 농구 팬들에게 익숙한 전태풍이란 이름은 2009년 6월 9일 KBL 센터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2월 귀화 혼혈선수 드래프트 선발자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에서 애킨스는 자신의 한국 이름을 ‘전태풍’이라고 밝힌 것이다.
전태풍은 “사촌 동생이 지어준 이름이다. 어머니의 성(姓)인 전을 받았고 강한 인상을 주고 싶어 태풍이란 이름을 정하게 됐다”라고 이야기했다.
첫 한국에서의 생활에 걱정이 많았던 전태풍은 기대감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KCC에 합류했다. 그는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스스로 적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내 주변에는 가족들이 있고 그들에게 한국 문화에 대해 많이 배웠다. 엄마도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이야기해줬다. 물론 농구적인 부분은 적응이 필요했지만 사람들끼리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전태풍을 처음 보게 된 당시 KCC 선수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추승균 감독은 “우리가 이제까지 보던 농구와는 다른 것을 하는 선수였다. 문화도 달랐고 (하)승진이가 미국 생활을 해서 그런지 잘 맞았지만 다른 선수들과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강병현은 “처음에 (전)태풍이 형이 팀에 들어왔을 때 머리가 굉장히 길었다. 속으로 ‘이런 사람이 다 있지’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웃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오더라.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지금 태풍이 형을 그때 만날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긴 적응기를 보낸 전태풍에게 자신의 기량을 과시할 수 있는 쇼케이스 무대가 마련됐다. 2009년 9월 5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KBL 올스타와 NBA 레전드들의 이벤트 매치에 초대받은 것. 이날 전태풍은 32득점을 퍼부으며 114-98, 승리를 이끌었다.
미국 청소년 대표, 조지아 공대 출신, 러시아, 프랑스, 터키, 폴란드, 크로아티아, 그리스, 불가리아 등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던 전태풍. 더불어 NBA 레전드들과의 경기에서 증명한 화끈한 공격력은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듯 전태풍 역시 KBL에서의 시작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한국농구가 바라는 포인트가드와 전태풍이 바라는 포인트가드는 전혀 달랐다. 자신의 짙은 공격 성향을 코트에서 뽐내고 싶었던 전태풍에게 패스와 볼 운반을 원하는 코칭스태프의 입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다.
전태풍은 “미국에서 오랜 시간 농구를 하다 보니 그동안 해왔던 것을 코트에서 보이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리듬에만 맞추다 보니 선수들과의 호흡도 좋지 못했고 감독, 코치님들도 그 부분에 대해 많이 야단쳤다”라고 말했다.
추승균 감독 역시 “한국농구의 문화에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였던 만큼 대화를 많이 하려고 했다. 태풍이의 패스 타이밍과 우리 선수들의 움직임이 잘 맞지 않았떤 것도 사실이다. 정말 많이 이야기하려 했고 나중에 들어서서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라고 기억했다.
강병현도 “태풍이 형의 농구는 우리가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것이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개인 기량이 너무 출중한데 합이 맞지 않아 100%로 결과가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전태풍의 실력 과시는 대단했다. 초반 15경기 중 단 3경기를 제외하면 모두 두 자릿수 이상의 득점을 올렸고 20득점 이상도 세 차례나 기록했다. 2008-2009시즌을 장악한 마이카 브랜드의 이유 모를 부진 속에서도 KCC가 5할 이상의 승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하나,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위치 속에서 KCC의 성적은 그리 만족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브랜드와 테렌스 레더가 유니폼을 갈아입었고 전태풍 역시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농구를 하면서 아이반(존슨)과 테렌스(레더)를 만났다는 건 행운이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미국식 농구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됐고 코트에 같이 서면 너무 편했다. 상대한테는 쓰레기(?)였을 수 있었던 아이반도 우리 선수들의 입장에선 최고였다. 처음보다 더 편해진 상황에서 나 역시 재밌게 농구할 수 있었다.” 전태풍의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규경기 3위에 오른 KCC는 이승준이 버티고 있던 6위 삼성을 3승 1패로 물리쳤고 포워드 농구의 성공을 이끈 2위 KT 역시 3승 1패로 꺾었다. 부상 중이었던 하승진이 없었음에도 KCC는 강했고 그 중심에는 전태풍과 존슨, 레더가 있었다.
백투백 우승까지는 이제 단 한 걸음만 남은 상황. 하승진까지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KCC의 정상 탈환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하승진은 챔피언결정전 5차전부터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랜 시간 KCC에 몸담은 송원진 운영팀장 역시 “2009-2010시즌은 개인적으로 KCC 역사상 가장 강한 전력을 갖춘 시기라고 평가하고 있다. 우승이 어울리는 선수들로만 구성됐고 또 좋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난 모비스는 강력했다. 양동근과 함지훈을 중심으로 한 조직력은 KBL 최고였고 김효범의 날카로움, 애런 헤인즈와 브라이언 던스톤의 조합 역시 KCC에 밀리지 않았다.
전태풍은 “아직도 가끔씩 모비스와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이 기억난다. 16점차까지 앞섰던 그 경기에서 마지막에 역전패를 당했다. 그 경기만 넘어섰더라도 우리가 우승했을 거다. 승진이가 부상 때문에 처음부터 나오지 못했던 것도 아쉬웠다. 그래도 1차전에서 우리가 잡았다면 우승은 우리가 했을 것이다”라고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KCC는 모비스에 2승 4패로 밀리며 백투백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전태풍과 함께 성공을 바랐던 그들에게 있어 그때의 아픔은 아직도 추억(?)으로 남았다.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전태풍의 플레이오프 활약은 대단했다. 삼성과의 6강 플레이오프부터 모비스와의 챔피언결정전까지 단 한 경기를 제외,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할 정도로 언터쳐블한 활약을 펼쳤다.
전태풍의 플레이오프 기록은 평균 17.6득점 2.2리바운드 6.6어시스트 1.6스틸. 라이벌로 불린 양동근에게 한 수 위의 기량을 뽐냈음에도 정상에 서지 못했다.
전태풍은 “양동근은 예전에도 말했지만 정말 ‘짐승’ 같았다(웃음). 한국농구가 바라는 포인트가드의 완성형 선수라고 해야 할까. 팀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승했다면 분명 평가는 달랐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했던 첫 시즌의 종료. 그러나 전태풍은 많은 팬들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으며 이승준, 문태영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받았다. 어눌한 한국말,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노력을 팬들은 느끼고 있었고 인터뷰에서 나오는 가식 없는 행동 역시 사랑스러웠다.
다사다난했던 첫 시즌을 마친 전태풍은 어느새 11번째 시즌을 마친 베테랑이 됐다. 그동안 챔피언결정전 우승, 정규경기 1위 등 모든 것을 이뤘으며 이제는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고 제2의 인생을 바라보고 있다.
방송인으로서의 활동, 그리고 자신만의 농구교실을 마련해 농구 유망주들을 키우겠다고 전한 전태풍. 어쩌면 다시는 나오기 힘든 그의 캐릭터를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민준구의 타임머신」은 이번 편을 끝으로 연재 종료됩니다. 다음에는 스타 선수들의 데뷔전 이야기를 담은 글로 찾아오겠습니다. 「민준구의 타임머신」을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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