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3. 03.
대한민국 여자농구가 세계를 호령하던 2000년대, 세계 여자농구의 수많은 눈도 WKBL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보석들 가운데 가장 빛났던 정선민은 WNBA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끝내 세계무대 진출의 첫 관문을 열었다.
2003년 4월 26일(한국시간) 열린 ‘2003 WNBA 신인 드래프트’는 대한민국 여자농구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려왔던 WNBA에 그들이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바스켓 퀸’ 정선민이 지명된 날이기 때문이다.
정선민은 대한민국 여자농구 역사상 최초로 WNBA에 진출하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미 WKBL은 물론 올림픽과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최고임을 증명했던 그였지만 해외 진출이 생소했던 만큼 낯설게 느껴진 것 역시 사실이다.
이미 WKBL 최정상에 섰던 정선민이 성공 가능성을 쉽게 점칠 수 없는 WNBA에 도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수많은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돌아왔다. 그때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여자농구는 세계에서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결과 역시 좋았다. 2000 시드니올림픽 4강 이후 세계무대 진출에 대한 생각이 있었고 2002 중국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4강에 오르고 나서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정선민의 말이다.
현재의 성공에 대한 만족보다 새로운 무대에 대한 도전 의지가 강했던 정선민에게 WNBA는 엄청난 흥미를 가져다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현재와는 달리 17년 전의 일인 만큼 WNBA 진출 과정에 대해 쉽게 알 수 없었다. 의사는 확실했지만 방법을 몰랐던 그때, 앤 도노번 감독과의 인연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정선민은 “2002 중국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당시 미국의 수석코치로 계셨던 도노번 감독님께서 나를 주의 깊게 지켜보셨다고 하더라(웃음). 그때부터 관심을 주기 시작했고 도노번 감독님이 계셨던 시애틀 스톰에서도 많은 정보를 전해줬다”라며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 WKBL에는 세계 최고의 외국선수들이 뛰고 있었다. 타미카 캐칭부터 티나 탐슨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선수들이 있었으니까. 그들로부터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인연의 끈이 닿게 됐고 WNBA 진출 의사를 확정할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정선민의 WNBA 진출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WNBA는 사무국과 선수협회의 갈등으로 인해 2003시즌 개막이 불투명했다. 더불어 신인 드래프트마저 연기되면서 이미 시애틀의 지명이 확정적이었던 정선민의 입장에선 불행한 소식이었다. 다행히 극적인 타협이 이뤄지면서 신인 드래프트 역시 열릴 수 있었고 정선민은 1라운드 8순위로 당당히 WNBA 무대에 올라섰다.
아무런 정보 없이 떠난 미국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통역은 없었고 모든 대화가 영어로 통하는 미국에서 정선민은 잠시 말을 잃었다. 신인 드래프트 이후 첫 도전이었던 만큼 모든 것이 생소했던 정선민에게 그나마 힘이 되어준 건 시애틀 교민들. 대대적인 환영회를 열어 정선민의 외로움을 덜게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갔을 때만 하더라도 따로 통역을 구해주지 않았다. WKBL에선 외국선수들에게 통역을 붙여주니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웃음). 수소문 끝에 대학에 다니는 어린 친구에게 통역을 부탁했는데 농구를 아예 모르는 친구더라. 코트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고 일상생활에선 어느 정도 도움을 줬다. 모든 대화가 영어로 통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솔직히 외롭기도 했는데 시애틀에 있는 교민분들이 환영회도 해주시고 여러모로 챙겨주셔서 텅 빈 마음을 채울 수 있었다. 시애틀에는 LA만큼 교민분들의 규모가 크더라. 덕분에 외로움을 덜어낼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인 드래프트 후 곧바로 정식 멤버가 된 줄 알았지만 최종 캠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미국에서 깨달았다. WKBL과 전혀 다른 환경이었지만 정보가 전혀 없었던 만큼 현지에서 모든 새로움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힘든 하루, 하루를 보낸 정선민은 드디어 시애틀의 최종 12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대한민국 여자농구 역사상 최초의 WNBA 선수라는 타이틀을 품에 안게 됐다.
여러 세계대회에서 대한민국 여자농구를 이끌었던 정선민인 만큼 WNBA에서의 적응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거라고 예상됐다. 이미 전성기에 올랐기 때문에 시애틀의 정상 도전에 큰 힘이 될 거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WNBA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선민은 “WKBL이나 국가대표팀에서는 내 신장(185cm)으로 4번(파워포워드)으로 뛸 수 있었다. 근데 WNBA에선 4번으로 뛰기에는 너무 작다고 하더라. 그렇다고 해서 당장 3번(스몰포워드)으로 뛸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자동적으로 포지션이 파괴됐다”라며 “또 내 신장에 3점슛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실 지금은 모르겠지만 17년 전, 대한민국 농구계는 장신 선수가 3점슛을 던지면 욕을 먹던 시절이었다. 농구를 한 지 20년 가까이 된 그때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입지는 좁아졌고 뛸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었다”라고 회상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정선민의 첫 WNBA는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까운 결과를 냈다. 시애틀이 소화한 34경기 중 절반인 17경기에 출전했으며 평균 1.8득점 0.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세계무대에서도 당당히 자신의 기량을 뽐냈던 정선민에게 기대하기 힘든 성적표였다. 그만큼 ‘최초’라는 무게감은 매우 컸다.
2003년의 WNBA는 1라운드 지명자에게 최대 3년 계약을 맺을 수 있게 했다. 정선민 역시 다음을 기약했지만 아쉽게도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있었다.
“첫 시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도노번 감독님과 코치님들, 그리고 같이 뛰었던 선수들이 ‘다음 시즌에는 더 좋아질 거야’라고 하더라. 지금은 WNBA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17년 전만 해도 아기였던 수 버드는 내게 할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친근함을 표시했다. 갓 프로에 뛰어든 친구가 보기에는 이제 30대가 된 대한민국의 선수와 함께 뛴다는 게 신기했을 것이다. 다음에 한 번 더 같이 뛰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다음 시즌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정선민은 WNBA에 다시 도전하고 싶었다. 이미 3년 계약이었던 만큼 재도전 의사가 확실했다면 그리고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 여자농구계는 정선민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그 역시 재도전 의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WNBA에 진출한다거나 캠프에 초청되면 엄청 많은 관심을 받지 않나. 내가 WNBA에 간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래? 한 번 가봐’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첫 시즌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주변 시선은 더욱 싸늘했다. 다시 도전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 정도로 말이다(웃음). WNBA에 다시 가고 싶다는 마음은 컸지만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예상보다 컸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쉬운 일이다.”
‘바스켓 퀸’의 WNBA 도전은 결과로만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첫 관문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직접 겪어보지 못하면 절대 알 수 없다. 정선민이 먼저 발을 디뎠기에 이후 김계령, 고아라가 WNBA 시범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고 박지수가 두 번째 진출을 이뤘으며 강이슬과 박지현이 주목받을 수 있었다.
정선민은 “후배들의 도전 의식이 강하다는 건 너무 기쁜 일이다. (박)지수는 이미 2년의 경험을 쌓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성적일 수 있겠지만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강이슬, 박지현과 같이 올해 주목받고 있는 선수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서 생존했으면 좋겠다. 막연한 불안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캠프에 초청받거나 목(mock) 드래프트에 이름을 올렸다는 건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금의 시간을 소중히 썼으면 한다”라며 선배다운 모습을 보였다.
이제는 현역 시절의 추억을 안고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정선민. 농구 선수로서 모든 것을 다 이룬 그에게 있어 WNBA 도전은 추억 이상의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만약 17년 전과 같은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 어떤 주변의 시선에도 나는 다시 도전했을 것이다. 정선민이라는 사람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 같다. 개인의 영광도 중요하지만 대한민국 여자농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반드시 만들어냈을 거라고 자신한다. 만약 내게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을 것 같다.”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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