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06. 26
모처럼 국내 소설이 베스트셀러 꼭대기를 차지하고 앉았다. 소설 ‘남한산성’은 현실과 명분 사이의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길 속으로 끌고 들어가며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를 묻는다. 그 길을 따라가고 있노라면 어느새 가슴이 먹먹하다.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다’고 적으며 조선왕조 500년 사상 가장 민감한 사건을 가로질렀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라고 했다. 인조는 삼전도에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땅에 박으며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남한산성’은 야구 소설이다. 프로야구 KIA는 24일 두산전을 이겨 7연패를 끊고 선수단 전원이 잠실구장 잔디에 머리를 조아렸다. 팬들을 향해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제사’였다.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사는 길을 택한 것도 아니고, 함부로 감히 인조의 삼전도 굴욕에 비교할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몰락한 왕조의 바짓자락 끝단을 붙잡고 있는 듯한 7연패 탈출 세리머니였다. 9번이나 챔피언컵을 들었으나, 이제는 꼴찌로 떨어진, 8개 구단 중 가장 오랫동안 한국시리즈에 가보지 못한 KIA의 절. 잠실구장 3루쪽 응원석은 그때 그 삼전도를 닮았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최명길의 화친 주장에 대해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하려는 자”라고 했다.
비통한 KIA의 ‘에이스’는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을 한다. 윤석민은 15번 등판해 평균 6과 3분의 2이닝을 던지고 방어율 2.56(2위)을 기록하면서도 혼자서 벌써 10패를 떠안았다. 제 아무리 투구의 길을 물어 구석구석을 찔러도 절대 도와주지 않는 팀 타선은 겨우 경기당 1.68점밖에 뽑아주지 않았다. 역대 한 시즌 최다패 기록은 장명부의 25패(1985년)이지만 이후 기록은 2002년 롯데 김영수의 18패(2승)이다. 김영수의 방어율은 4.79였으니 윤석민과 비교되지 않는다.
그러나 ‘패배’는 어쩌면 결국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말 그대로 죽어서 살고, 살아서 죽는 일이다. 져본 자가 이기는 법을 안다.
윤석민은 “야구 전자게임 ‘마구마구’에서는 연승 중”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게임에서도 정작 자신은 자신을 쓰지 않는 아이러니. 단순한 승패 성적으로 능력치가 결정되는 전자게임의 한계이자 냉정함이다. 그러나 어쩌면 윤석민은 일본의 괴짜 투수 이가와 게이(뉴욕 양키스)가 될지도 모른다. 이가와는 전자게임 ‘파워풀 실황 프로야구’의 능력치가 낮은데 화가 나 2003년 20승(4패)으로 MVP를 따냈다고 했다.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은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긴다”고 했다. 뜻을 잃지 않으면 KIA도 윤석민도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이마를 땅에 댄 인조의 콧속에도 봄볕에 익은 흙냄새가 향기로웠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자료출처 : 경향신문
[베이스볼 라운지] '야구'를 심자 (0) | 2022.09.28 |
---|---|
[베이스볼 라운지] 소문과 검증, 그리고 진실 (0) | 2022.09.28 |
[베이스볼 라운지] 기다림의 미학 (0) | 2022.09.27 |
[베이스볼 라운지] 훈수와 조언 (0) | 2022.09.26 |
[베이스볼 라운지] KBO의 '취재 제한' (0) | 2022.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