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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아시아 제패! 20년 전 시즈오카 대첩 이룬 태극낭자

--민준구 농구

by econo0706 2022. 10. 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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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13

 

1980년대 대한민국 여자농구는 아시아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천하제일을 자랑했다. 하나,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다. 시대가 지나며 황금 멤버들의 연이은 현역 은퇴와 중국의 꾸준한 견제, 일본의 급성장 등 여러 위협이 찾아오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또 한 번의 황금 세대를 맞이하며 다시 한 번 아시아 제패에 성공했다. 2000 시드니올림픽 4강 신화의 밑거름이 된 1999 시즈오카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말이다.

◇ 대한민국 여자농구의 위기

1990년대 들어 대한민국은 여전히 아시아 여자농구 최강자로 꼽혔다. 1990 베이징, 1994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1997 방콕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선 9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1997년 말 외환 위기(IMF 사태)로 인해 대부분의 기업이 구조 조정에 들어갔고 가장 먼저 칼을 들이민 것 역시 실업농구였다. 한국실업여자농구연맹에 속해 있던 13개 팀 중 8개 팀이 하루 아침에 해체됐고 불과 5개 팀만이 생존했다. 심지어 1997-1998 농구대잔치 우승팀인 SK증권이 해체를 선언한 것은 심각한 타격이 됐다. 풍부했던 인력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 아시아 최강을 이어왔던 대한민국의 여자농구가 이제는 생존 자체에 위협을 받은 것이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이어진 국제대회에서 과거의 호성적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1998 독일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13위, 1998 방콕아시안게임 동메달 등 만족하기 힘든 성적을 안고 돌아왔다. 특히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결승조차 가지 못한 건 큰 충격이었는데 첫 출전이었던 1974 테헤란아시안게임 이후 사상 최초로 결승 진출에 실패한 사건이었다.

이대로 대한민국 여자농구는 목적지 없이 표류하고 마는 것일까. 하지만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말처럼 대한민국은 바닥을 치고 정상을 향해 달려나갔다.

 ‘명장’ 유수종 감독의 스파르타 훈련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출범 이후 처음으로 소집된 대한민국 선수들은 전과는 다른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대한민국농구협회 강화위원회는 한빛은행의 유수종 감독을 수장으로 세운 뒤 신세계의 이문규 감독을 코치로 세웠다. 시드니올림픽까지 이어지는 코칭스태프 라인이 이때 탄생한 것이다.

유수종 감독은 가장 먼저 잠시 코트를 떠나 있었던 정은순을 찾아갔다. 정은순은 “개인적으로 은퇴까지 바라보던 시기였다. 그때 유수종 감독님이 잡아주시면서 다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을 수 있게 됐다”라고 이야기했다.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았던 유영주는 물론 전주원, 정선민 등 베스트 멤버가 합세한 대한민국은 호주 전지훈련까지 다녀오면서 다시 한 번 아시아 제패를 다짐했다.

유수종 감독의 스파르타 훈련은 지독했고 혹독했다. 슈퍼 서킷 트레이닝으로 불리는 훈련은 선수들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였고 이어진 트랙 훈련은 녹초로 만들었다. 정은순은 “매주 두 번씩 음악과 함께하는 슈퍼 서킷 트레이닝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 번 하고 나면 대부분 기어서 태릉선수촌을 나올 정도였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힘든 훈련 속에서 선수들은 하나 됨을 느꼈다. 전주원은 “유수종 감독님의 체력 훈련이 얼마나 힘든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근데 단순히 체력 강화만 바라고 하신 훈련은 아니다. 선수들에게 정신적인 부분도 많이 강조하셨다. 우리가 왜 이토록 힘들게 훈련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설명해주시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박정은 역시 “트랙 훈련을 하면 모든 선수들이 마지막 지점을 통과해야만 했다. 만약 시간 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선수들이 있으면 부축해서 같이 올 정도로 끈끈했다. 유수종 감독님이 바라신 건 체력과 함께 선수들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라고 전했다.

 일본과 중국을 넘어라!

시즈오카여자농구선수권대회는 두 가지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역대 4번째 2연패 도전 및 통산 11번째 우승이 걸린 대회였으며 둘째는 아시아에 배정된 단 1장의 시드니올림픽 티켓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수종 감독은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 선수들을 모아 주머니 속에 든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제목은 “정신 재무장”. 핵심 내용은 침체된 대한민국 여자농구의 부활을 위해 피와 땀을 쏟자는 것이었다. 선수들은 유수종 감독의 편지를 복사해 각자 한 장씩 가지고 다녔으며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꺼내 읽었다고 한다.

철저히 준비한 대한민국은 결전지인 일본 시즈오카로 떠났다. 솔직한 말로 대회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일본은 방콕아시안게임 우승 멤버들이 대부분 남아 있었고 중국은 세대교체 속에서도 강한 전력을 유지했다. 특히 일본의 언론은 “역대 최고의 전력”이라는 자화자찬 속에 1970년 이후 29년 만에 우승과 시드니올림픽 티켓을 기대하고 있었다.

유수종 감독은 “시즈오카여자농구선수권대회는 정말 많은 것이 걸려 있는 대회였다. 국내 언론 역시 시드니올림픽 진출과 엮어 많은 관심을 보였고 이는 일본과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일본은 시드니올림픽 진출을 위해 시즈오카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전력 역시 만만치 않았고 솔직히 우승까지 바라기가 힘든 상황이었다”라고 말했다.

 

/ 경향신문 캡쳐


 중국과 일본을 넘어 시드니로

1차전 상대는 태국이었다. 왕수진(25득점)과 전주원(19득점), 양선애(13득점)가 화력을 뽐내며 92-39, 대승을 거뒀다. 흐름을 탄 대한민국은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고전했던 대만을 66-61로 간신히 꺾고 2연승 행진을 달렸다.

3차전은 숙적 중국과의 맞대결이었다. 세대교체가 한창 진행 중이던 중국은 과거의 막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반을 44-27로 크게 앞선 대한민국은 최종 결과 81-67로 승리하며 기분 좋은 3연승을 신고했다. 정은순(32득점)과 전주원(26득점)이 58득점을 합작하며 이룬 최고의 결과였다.

그러나 예선 최종전에서 만난 일본은 잠깐의 좌절을 느끼게 했다. 전승을 예상했던 대한민국은 전반을 42-41로 힘겹게 앞섰지만 후반 들어 하마구치 노리코와 타카코 카토에게 대량 실점을 허용하며 72-85로 패했다. 4강에서 대만을 노렸던 대한민국은 득실차에서 밀리며 다시 중국과 만나게 됐다.

중국은 예선 때와 180도 다른 모습으로 대한민국 앞에 섰다. 장신 선수들을 앞세운 물량 공세에 대한민국은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전반을 34-42로 내주며 이번 대회 들어 처음으로 전반 리드를 허용하기도 했다.

유영주의 원맨쇼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대한민국은 치열한 득점 공방전 속 승리 의지를 불태웠다. 경기 종료 1분여까지 60-67로 밀렸지만 연속 10득점을 퍼부으며 70-69, 짜릿한 1점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결승에서 다시 만난 일본은 중국만큼 버거운 상대였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선수도 패배를 예상하지 않았다고. 양선애는 “일본에 예선에서 한 번 진 적은 있지만 다시 질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진 건 예선이었고 진짜 중요한 건 결승이었으니까. 중요한 순간에 일본한테 진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라고 밝혔다.

절치부심한 대한민국은 경기 초반부터 일본을 몰아붙였다. 한때 35-19까지 앞서며 손쉽게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는 듯했다. 그러나 홈팀 일본의 자존심도 만만치 않았다. 대한민국의 실책을 역이용해 전반을 30-37로 마무리했다.

후반은 팽팽하게 흘러갔다. 역전을 용납하지 못한 대한민국과 극적인 뒤집기를 바란 일본은 쫓고 쫓기는 승부를 이어갔다. 경기 종료 1분여 전 대한민국은 일본에 64-65, 역전을 허용하며 잠시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정은순이 득점인정반칙을 얻어내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고 일본의 마지막 3점슛이 림을 벗어나며 68-65, 짜릿한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 MVP는 매 경기 최고의 활약을 펼친 전주원의 차지였다. 일본과의 결승에서 20득점을 집중한 그는 생애 첫 국제대회 MVP에 선정되며 최고의 기쁨을 누렸다. 전주원은 “농구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고 하면 시즈오카여자농구선수권대회와 시드니올림픽이 떠오른다. 특히 시즈오카여자농구선수권대회는 처음으로 MVP에 선정됐기 때문에 더 기억이 나는 것 같다. 사실 국내에서는 팀 전력이 좋지 않아 MVP는커녕 우승도 하기 힘들었다(웃음). MVP는 물론 시드니올림픽 티켓까지 따낸 좋은 추억이 많은 대회였다”라고 추억했다.

거대한 쓰나미를 이겨낸 대한민국은 시즈오카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기점으로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시아 정상을 차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를 거둔 셈이지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1년 뒤에 누릴 수 있었다. 바로 시드니에서 말이다.

※ 1999 시즈오카여자농구선수권대회 대한민국 명단


감독_유수종
코치_이문규
선수_김경희, 박정은, 신원화, 양선애, 왕수진, 유영주, 이종애, 장선형, 전주원, 정선민, 정은순, 조혜진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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