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30.
“신동파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신에게 기도하는 것뿐이다.”
방콕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이 열린 1969년 11월 29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하루 지난 50년 전의 이날에 우리는 역대 최고의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시아의 강호였지만 ‘무관의 제왕’으로 불린 대한민국의 첫 아시아 제패라는 새 역사가 쓰인 날이기도 하다. 신동파라는 전무후무한 최고의 영웅이 탄생한 이날은 대한민국 농구 역사의 원조 ‘황금세대’가 탄생한 기념일이다.
◇ 고난의 미국 전지훈련
1960년대는 대한민국의 성장기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 국토는 피폐해졌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유엔군 사령관으로 참전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이 나라가 재건되려면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라며 암울한 전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故박정희 대통령 취임 후 경제 발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국민들은 가난했고 스포츠 역시 제대로 된 지원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대한민국 농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대로 된 지원 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현재와 같이 ‘프로’라는 현대적인 시스템을 꿈도 꿀 수 없는 시절이었다(물론 지금도 제대로 된 지원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1968년 1월,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캐나다 밴쿠버를 시작으로 미국 서부 일대까지 이어진 전지훈련에 나선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전지훈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미국 자선단체 「피플 투 피플」의 초청으로 전지훈련을 떠날 수 있었지만 환경은 좋지 못했다. 여객기를 타고 화려하게 떠나는 전지훈련이 아닌 미군 수송기로 이동하는 등 하루, 하루가 피로로 가득한 ‘지옥의 전지훈련’ 일정을 보내야 했다.
그 당시를 회상한 신동파는 “돈이 없었던 그 시절에 여객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먼저 떠난 선발대 10명은 샌프란시스코 공군 비행장에 도착했고 나를 포함한 6명은 시애틀로 뒤늦게 쫓아가야 했다. 누가 대신 연락을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끼리 어렵게 소식을 나눴고 밴쿠버에서 겨우 모일 수 있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무려 사흘이나 걸렸던 이동 시간은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을 녹초로 만들었다. 여러 국가를 거쳐 이동하는 과정이었던 만큼 선수들은 공항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신동파는 “한마디로 거지들이었다(웃음). 공항에서 쪽잠을 자고 끼니는 핫도그로 겨우 때웠으니까”라고 말할 정도. 상상만 해도 힘든 그 시간을 보낸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연습경기 시간에 겨우 맞춰 도착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연습경기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몇몇 선수들은 벤치에서 졸 정도로 피로를 호소하기도 했다. 6연패로 시작한 미국 전지훈련의 성적은 총 6승 11패. 당시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의 막내였던 유희형은 “피곤한 상황에서 곧바로 경기를 하니 이길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가장 큰 선수가 192cm(박한)였고 주전 센터였던 故김영일은 188cm였다. 근데 캐나다, 미국은 다들 신장도 크고 힘도 좋다 보니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6승을 거두고 돌아오긴 했지만 말이다”라고 말했다.
신동파 역시 “밴쿠버에선 코트에 설 때마다 어지럽더라. 조금 적응이 되나 싶었지만 강행군 속에 모든 선수들이 힘들어했고 마지막 장소였던 샌디에이고에선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엉망이었다”라고 밝혔다.
◇ 담금질 마친 대한민국, 아시아를 정복하다
힘든 과정을 거친 캐나다, 미국 전지훈련의 성과는 대단했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선수들은 눈만 봐도 팀플레이가 될 정도로 완벽호흡을 자랑했다. 가장 큰 수확은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상대로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1968 멕시코올림픽에서 실전 테스트를 모두 마친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방콕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시에도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강호’로 불렸다. 중국(당시 중공)이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필리핀, 일본, 대만과 매번 정상을 다퉜으니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단 한 번도 아시아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따내지 못했다. 농구가 한반도에 들어온 지 60여년이 흘렀음에도 정상은 필리핀과 일본이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이번만큼은 다르다는 각오로 나섰다. 선수들 간 호흡은 최고였고 수년간 손발을 맞춰 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신동파는 “일본과 필리핀이 우리의 적수였지만 당시에는 항상 크게 이겼다. 확실한 베스트5가 있었고 벤치에 있는 선수들 역시 제 역할을 다해줬다.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경험은 큰 자산이 됐고 아시아에서의 경쟁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당시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의 베스트5는 김인건, 유희형, 이인표, 신동파, 故김영일. 벤치에는 조승연, 이자영, 서상철, 신현수, 곽현채, 박한, 최종규가 있었다. 김영기 감독은 공격력이 뛰어났던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을 선 수비, 후 공격의 팀으로 180도 바꿔놨고 이는 정상으로 가는 지름길이 됐다.
대한민국 포인트가드의 효시였던 김인건, 탄탄한 체격을 바탕으로 수비와 리바운드에 강점이 있었던 유희형, 돌파의 귀재 이인표, 아시아의 에이스 신동파, 영리함을 바탕으로 피딩 능력과 허슬 플레이에 능했던 故김영일.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의 베스트5는 역대 최고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유희형은 “우리는 선수마다 주특기가 있었다. 각자 맡은 역할을 100%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김영기 감독의 전술에 맞게 기계처럼 움직였다. 이전까지의 대한민국과는 많이 달랐다. 고생한 만큼 결실을 맺었다고 해야 하나(웃음). 전지훈련을 통한 교훈을 바탕으로 아시아 최고의 팀이 됐다”라고 자부했다.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풀리그 첫 경기에서 말레이시아를 92-72로 크게 이겼고 홍콩(112-38), 파키스탄(115-49), 대만(94-69), 인도(15-78)를 무너뜨렸다. 정상으로 향하는 첫 번째 고비 일본 전 역시 어렵지는 않았다. 전반을 32-29로 앞선 채 마무리한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후반 유희형과 故김영일의 퇴장에도 75-66, 승리를 차지했다. 일본이 필리핀을 78-77로 꺾었던 상황에서 일본 전 승리는 사실상 우승과도 같았다. 태국을 93-52로 무너뜨린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필리핀과의 최종전을 남겨두고 있었다.
필리핀은 3차례 아시아선수권대회 정상에 섰고 아시안게임 역시 4회 우승에 빛나는 ‘아시아 최강’이었다. 1967 서울아시아선수권대회에선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의 발목을 잡으며 첫 정상의 꿈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당시 필리핀은 위성 생중계로 전국민이 이 경기를 지켜봤다. 대한민국 역시 TV 생중계는 아니지만 KBS 라디오로 모든 소식을 생생히 전해 듣고 있었다. 故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지켜봤다고 하니 그저 1경기의 의미 이상을 담은 최종전이었다.
필리핀과의 최종전은 김영기 감독의 전술이 딱 들어맞은 완벽한 경기였다. 당시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주포였던 신동파, 이인표의 출전시간을 제한하며 마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처럼 위장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신동파의 기량이 떨어진 것이 아니냐”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첫 우승을 위한 기다림이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필리핀을 95-86으로 꺾고 첫 정상에 선다. 전반까지 47-47,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지만 후반에만 31득점을 기록한 신동파의 압도적인 활약에 아시아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이날 신동파는 무려 50득점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은 물론 필리핀의 영웅이 된다.
◇ 대한민국·필리핀 농구의 영웅이 된 신동파
김영기 감독과 12인의 태극전사를 아시아 정상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12월 4일, 조국으로 귀환했다. 당시 한국일보의 기사를 살펴보면 김포공항에는 故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는 물론 500여명의 인파가 몰려 대한민국의 영웅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금의환향. 그러나 수많은 영웅들 가운데 가장 빛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동파였다.
필리핀과의 최종전에서 펄펄 날았던 신동파는 현장은 물론 TV 생중계로 지켜본 필리핀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대한민국의 한 선수에게 무려 50득점을 허용하며 아시아 정상이라는 타이틀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방콕아시아선수권대회 이후 필리핀의 농구 전문가들은 슬로우 비디오를 통해 신동파의 움직임을 분석할 정도였다. 손의 각도, 팔을 뻗는 동작, 체공 시간까지 신동파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에 대해 모든 농구인들이 머리를 맞댔다고 한다.
신동파는 “지인을 통해 받았던 필리핀 신문에 재밌는 기사가 있었다. 제목이 ‘누가 신동파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였다(웃음). 한 전문가는 ‘신동파를 막으려면 신에게 기도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필리핀이 깜짝 놀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라며 웃음 지었다.
농구가 전부였던 필리핀은 자신들을 무참히 무너뜨린 신동파를 잊지 못했다. 1970년 3월 필리핀농구협회는 대한민국농구협회에 7가지 조건을 포함한 실업팀 초청 공문을 보내게 된다. 7가지 조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신동파’가 포함된 팀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7가지 조건이 전부 기억나지는 않는다. 마닐라에서 8경기를 하는 것, 선수 12명과 임원 4명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 모든 경비를 지불해준다는 것 정도가 생각난다. 가장 핵심은 ‘신동파’가 있는 팀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기업은행에 있을 때였는데 나 때문에 모두 필리핀에 갈 수 있었다. 은퇴할 때까지 말이다. 하하.” 신동파의 말이다.
1970년 5월, 신동파를 포함한 기업은행 선수단은 마닐라에 도착했다. 신동파는 당시 마닐라에 도착하자마자 바라본 광경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기자가 자신을 취재하기 위해 트랙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초청 경기 내내 상대의 집중 견제를 받았던 신동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경기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상대 선수들은 어떻게든 나를 막기 위해 거친 반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근데 참 재밌는 일들이 나타났다. 내가 넘어질 때마다 필리핀 관중들이 상대 감독과 선수들에게 야유하더라(웃음). 바나나, 종이부터 시작해서 손에 쥘 수 있는 건 전부 던졌다. 자기 나라 소속 팀인데도 말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뛰는 경기를 보러온 것인데 다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말 재밌는 일이 아닌가. 나 때문에 아시아 정상에서 내려온 나라가 환대해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경기당 45점씩 넣으며 최대한 즐겁게 해주려고 했다.”
1969년 이후 필리핀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단연 신동파였다. 1972 뮌헨올림픽 이후 필리핀 언론은 최고의 스포츠 스타 설문조사에 나섰고 1위에 오른 건 신동파였다. 뮌헨올림픽의 영웅 마크 스피츠, 복싱 레전드 조지 포먼도 필리핀에선 신동파에게 비교될 수 없었다. 이에 신동파는 “금메달 10개를 따도 소용없었다. 필리핀에선 내가 영웅이었을 때였으니까”라며 기뻐했다.
어쩌면 기쁘면서도 아쉬운 일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신동파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농구의 인기가 과거와 같지 않고 역사에 대한 정리 및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은 달랐다. 대대손손 내려온 신동파의 영웅담으로 현재까지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신동파는 “필리핀을 방문한 어느 날이었다. 어린 소년이 나를 알아보는 것이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45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우리나라에선 50대 밑으로는 신동파를 잘 모른다. 근데 필리핀에선 10대도 알아보니 신기했다. 나를 어떻게 아는지 물어보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책에서도 자주 봤다’라고 이야기하더라. 필리핀은 아직도 나를 잊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2018년 7월 29일, 필리핀의 농구 명문 데 라 살 대학은 2018 아시아-퍼시픽 챌린지 대회 참가를 목적으로 입국했다. 다른 팀들과는 비교적 일찍 대한민국으로 들어온 것. 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신동파에게 지도받기 위함이었다.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신동파에 대한 필리핀의 존경심은 유효하다는 것이 증명된 일이었다.
◇ 50주년 맞이한 1969년의 영웅들
대한민국 농구의 원조 황금세대는 아름다웠던 청춘을 지나 백발의 노신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여전하다. 해마다 3~4회 만남을 가지며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방콕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50주년을 맞이한 올해에는 역사의 장소가 된 방콕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 무산됐지만 만약 성사됐다면 이보다 더 뜻깊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50주년 기념 모임은 곧 이뤄질 예정이다. 50년 전의 영웅들은 오랜만에 회동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기려 한다.
※ 1969 방콕아시아선수권대회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 명단
감독_김영기
선수_김인건, 유희형, 이인표, 신동파, 故김영일, 조승연, 이자영, 서상철, 신현수, 곽현채, 박한, 최종규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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