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06
코트 위의 악동, 벌금왕, 득점왕, 물탱크….
1997년 출범한 KBL의 역사에는 수십, 수백명의 외국선수가 존재했다. 누군가는 KBL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이름을 날렸고 누군가는 쓸쓸히 퇴출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냉정한 프로 세계에서 만남이 있다면 이별도 있는 법. 그러나 이 남자만큼 강렬했던 만남, 그리고 이별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바로 3년 만에 KBL 복귀를 알린 트로이 길렌워터(31, 197cm)의 이야기다.
▲ 실력만큼은 끝내줬던 길렌워터
미국 보스턴 출신인 길렌워터는 고교 시절부터 말 그대로 ‘끝내주는’ 선수였다. 뉴멕시코 주립 대학을 졸업한 길렌워터는 사이프러스 리그를 시작으로 이스라엘, 러시아, 터키 등에서 활약하며 이름값을 높였다. KBL 역시 길렌워터의 기량을 인정했고 2013-2014시즌 KBL을 지배했던 데이본 제퍼슨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2013 KBL 외국선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던 길렌워터는 애매한 신장에 특출나지 않은 운동 능력으로 인해 저평가를 받고 말았다. 이후 터키 리그로 떠난 그는 26경기에 출전 평균 17.2득점(전체 3위) 5.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다시 KBL 구단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체 선수로도 수차례 거론될 정도로 말이다.
다시 한 번 참가한 2014 KBL 외국선수 트라이아웃에서 길렌워터의 평가는 180도 달라졌다. 물론 이전에 언급된 애매함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안정된 기량을 갖추고 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고양 오리온스(현 오리온)의 추일승 감독 역시 길렌워터를 눈여겨 봤고 당시 통역이자 국제업무 담당자였던 *최은동 에이전트의 추천까지 더하며 2라운드 3순위로 지명했다.
*최은동 에이전트는 10여년 전 최금동과 함께 ‘재미교포 쌍둥이’로 KBL 무대에 나선 도전자였다. ‘황금 드래프트’로 불린 2008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참가했지만 지명받지 못했고 이후 KT&G(현 KGC인삼공사)의 수련선수로서 코리안 드림을 꿈꿨다. 현역 은퇴 후 2010-2011시즌부터 KGC인삼공사의 통역을 맡았고 2014-2015시즌 오리온스의 통역으로 활약한 후 에이전트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은동 에이전트는 “(트로이)길렌워터는 미국에서 농구를 했을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고교 시절부터 엄청 유명했던 선수였고 개인적으로도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였다. 기량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길렌워터가 KBL로 오려고 했을 때 기회라고 생각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어 “(추일승)감독님께서 나를 믿고 맡겨 주셨기 때문에 길렌워터와 함께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데이본)제퍼슨이 KBL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길렌워터가 더 뛰어난 선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 KBL에서 성공하려면 골밑에서 파괴력이 있어야 한다. 길렌워터는 골밑은 물론 외곽에서도 플레이가 가능한 만큼 충분히 통할 거라고 자신했다. 농구에 대한 마인드, 자신감, 그리고 실력까지 모두 갖춘 선수였다”라고 덧붙였다.
▲ 행복과 슬픔 공존했던 길렌워터와 오리온스의 동행
오리온스는 찰스 가르시아를 1라운드 8순위로 지명한 후 2라운드 3순위로 길렌워터를 선택했다. 다소 의외의 선택이었지만 도박과도 가까웠던 가르시아보다는 길렌워터가 메인 외국선수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그리고 예상은 현실이 됐다.
비교적 탄탄했던 오리온스의 전력에 전체 1순위 신인 이승현과 길렌워터의 존재는 KBL에 거대한 태풍처럼 다가왔다. 2014-2015시즌 개막 이후 8연승을 질주하며 KBL 역대 최다 타이 기록을 세운 것이다(2011-2012시즌 ‘동부산성’을 앞세운 동부가 먼저 개막 8연승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길렌워터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골밑에서는 막을 자가 없었다. 50% 중반대를 넘는 야투 성공률과 70% 후반대의 자유투 성공률은 그가 무적임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심지어 또 다른 장기인 3점슛의 영점이 맞지 않은 상황에서도 평균 20득점 이상을 올리며 오리온스의 폭풍 질주를 이끌었다.
추일승 감독 역시 “그 정도 덩치를 가진 선수 중 순발력 하나만큼은 최고였다. 운동 능력도 애매하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결코 나쁘지 않았다. 반대로 최고였다”라며 “골밑은 물론 외곽 플레이까지 가능했다. 경기력만 보면 탑 클래스라고 생각한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길렌워터도 완벽한 선수는 아니었다. 가르시아의 KBL 적응 실패로 인해 출전시간이 늘어났고 체력적인 문제가 드러났다. 평균 23점대를 유지했던 3라운드를 지나 4라운드부터 10점대로 급격히 무너졌고 오리온스 역시 상위권 유지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김태훈 오리온 사무국장은 “기량은 출중했지만 체력적인 문제가 있었다. 4쿼터에 힘이 빠지는 장면이 잦았고 라운드를 넘어갈수록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아쉬웠다”라고 말했다.
오리온스의 갑작스러운 성적 하락이 길렌워터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확실한 앞선 자원이 부족했고 길렌워터에게만 의존하는 모습도 자주 나타났다. 오리온스는 결국 자신들이 시즌 개막 전부터 원했던 리오 라이온스를 데려오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라이온스, 방경수-가르시아, 이호현/2대2 트레이드).
결과적으로 길렌워터와 라이온스의 조합은 실패로 끝났다. 메인 외국선수는 여전히 길렌워터였고 라이온스는 삼성 시절보다 적은 출전시간을 받으며 좀처럼 득점력을 뽐내지 못했다. 정규리그 5위로 어렵게 올라선 6강 플레이오프는 오리온스와 길렌워터의 마지막 동행이 됐다. ‘길렌워터 vs 제퍼슨’의 구도가 형성된 오리온스와 LG의 6강 플레이오프는 최종전까지 가는 명승부였다. 하나, 김시래가 펄펄 난 LG가 시리즈 전적 3대2로 4강에 올라서며 오리온스는 2014-2015시즌을 비교적 일찍 마감해야 했다. 길렌워터는 라이온스와 출전시간을 나누면서도 평균 22.2득점 5.8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플레이오프 탈락을 막지 못했다.
▲ ‘좌충우돌’ LG에서의 2015-2016시즌, 그리고…
어쩌면 KBL 팬들에게 ‘트로이 길렌워터’라는 이름을 가슴속에 새긴 시즌은 2015-2016시즌이 아닐까 싶다. 성공적이었던 첫 시즌 이후 길렌워터는 다시 한 번 KBL 무대에 도전장을 건넸다. 외국선수 제도의 변화(장/단신제 도입)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197.2cm의 신장은 장신 선수로서의 메리트가 크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전 시즌에 증명한 기량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LG가 1라운드 8순위로 지명하면서 2시즌 연속 KBL 무대를 밟게 됐다.
김시래의 군입대, 문태종의 이적까지 겹친 LG는 최약체로 평가됐다. 당시 언론 역시 LG를 최하위권으로 평가할 정도로 전력이 좋지 않았다. 길렌워터 역시 농구 외적인 평가가 좋지 않았던 만큼 불안감은 점점 더 커졌다.
2015-2016시즌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 암울했던 LG에 깜짝 이벤트가 등장했다. 라커룸 미팅이 끝난 후 길렌워터가 김진 감독은 물론 선수들에게 복사물을 전달한 것이다. 이 종이에는 LG를 최하위로 평가한 언론의 전망이 담겨 있었다. 이후 길렌워터는 “이 평가에 따르면 우리는 최하위권 팀이다. 우리가 하나로 뭉쳐서 이 평가를 바꿔보자. 우리는 해낼 수 있다”라고 말하며 선수단을 격려했다.
박도경 LG 사무차장은 “코트 위에서의 논란은 있었지만 외적인 부분에선 정말 최고의 선수였다. 실력도 좋았고 국내선수들과의 교류도 잦았다.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수 없지만 길렌워터에 대한 인식은 좋은 편이었다”라고 전했다.
한 명의 외국선수가 아닌 리더로서 LG를 이끌었던 길렌워터. 그는 2015-2016시즌 51경기에 출전해 평균 26.2득점 9.0리바운드 1.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2015년 10월 31일 전자랜드 전에서는 개인 최다인 50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이 종료된 후 득점 1위는 단연 길렌워터였다. 비록 LG는 21승 33패로 8위에 머물렀지만 말이다.
LG에서의 길렌워터는 기록만 놓고 보면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 새로운 외국선수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자신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아쉬운 건 계속된 패배에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점.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은 매 경기 등장했고 심판을 비하하는 제스처는 물론 방송사 카메라에 수건을 던지기도 했다. 결국 수차례 벌금을 납부한 길렌워터는 ‘벌금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함께 했다. 2015-2016시즌에만 무려 1,420만원을 납부할 정도(코트에 물병을 던진 후 납부한 벌금 600만원은 역대 최고였다).
외국선수에 대한 차별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KBL은 끝내 길렌워터의 트라이아웃 참가를 제한시키고 말았다. 이후 길렌워터는 베네수엘라, 일본, 터키, 중국, 필리핀 등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길렌워터에게도 기회는 찾아왔다. 2018-2019시즌 외국선수 제도가 자유계약제로 바뀌며 제재가 자동으로 풀렸고 복귀 가능성 역시 높아진 것이다.
▲ 맨몸으로 입국, 결과는 해피 엔딩
지난 11월 21일. 길렌워터는 최은동 에이전트와 함께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그동안 수많은 소문이 있었지만 길렌워터는 사실 어떤 팀과도 접촉하지 않은 상태였다. 맨몸으로 들어온 그는 박대남 대표의 「스킬 팩토리」에서 연세대 박지원, 이정현, 박준형과 함께 훈련하며 해피 엔딩을 바라고 있었다.
잠시 휴식기를 맞이한 KBL 및 10개 구단은 길렌워터의 입국 소식을 전해 들었다. 외국선수 교체가 유력해 보인 몇몇 구단 역시 관심을 가졌지만 실제로 협상 단계까지 이어진 상황은 아니었다. 2주의 시간이 지난 후 길렌워터와 최은동 에이전트는 결국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미국으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길렌워터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 좋은 가정, 그리고 좋은 환경 속에 있는 선수다. 근데 계약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대한민국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있었다. 비싼 항공료를 지불하면서 길렌워터를 데려온 건 나만의 확신이 있었다. 2주 동안 함께 지내면서 다시 한 번 좋은 시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전자랜드에서 제의가 왔고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최은동 에이전트의 말이다.
최은동 에이전트는 자신만의 확신이 있었다. 기다림은 길었지만 결국 KBL 복귀라는 꿈을 이룰 수 있었고 길렌워터 역시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길렌워터는 이번에 KBL에 복귀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휴식기에 들어왔지만 사실 시기가 조금 늦은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다행히 전자랜드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고 길렌워터 역시 엄청 기뻐했다(웃음). 기도한 보람이 있었다며 말이다.”
길렌워터는 지난 5일 섀넌 쇼터를 대신해 전자랜드의 외국선수로 합류했다. 전자랜드가 이대헌의 손가락 골절, 강상재의 체력 저하를 보완할 수 있는 길렌워터를 선택한 것이다. 아직 선수 등록 절차가 완료되지 않아 7일 SK 전 출전은 불투명하다. 경기 시작 2시간 전에만 해결된다면 화려한 복귀를 알릴 수 있다.
KBL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길렌워터의 복귀. 그러나 우려의 시선이 함께 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길렌워터는 호불호가 분명히 갈린 선수였고 코트 위에서 보인 ‘악동’ 기질 역시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최은동 에이전트는 “길렌워터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폄하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조용하고 착한 선수다. 말을 나누다 보면 ‘이런 선수였나?’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하하. 지금은 한 가정의 기둥이 됐다. 또 자신의 감정 컨트롤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달았을 것이다. 3년 전의 일로 KBL에 오지 못했기 때문에 알아서 잘해 낼 거라고 생각한다. 길렌워터 역시 굶주려 있다”라고 자신했다.
추일승 감독도 “마인트 컨트롤 문제는 오리온스에 있을 때도 존재했다.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직접 봐야 알 수 있다. 그 부분만 잘 조절할 수 있다면 무서울 게 없는 선수다. (이)승현이가 특히 껄끄러워한다(웃음). 힘도 좋고 빠르니까”라며 견해를 드러냈다.
길렌워터의 복귀는 많은 이들이 바랐고 기다렸던 소식이다. 조금씩 인기를 되찾아 가고 있는 KBL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흥행 요소이기도 하다. 승부에 대한 열정이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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