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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개막 최다 연패의 불명예 쓴 19년 전 11월의 대구 동양

--민준구 농구

by econo0706 2022. 10. 1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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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07.

 

“(전)희철이도 있고 (김)병철이도 있는데….”

1997년 KBL 출범 이래 대구 동양(현 고양 오리온)은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먼 팀이었다. 1997년 대구를 연고지로 창단한 뒤 1997, 1997-1998시즌은 나름 선전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최악의 순간으로 기억된 1998-1999시즌은 역대 최다 32연패 수렁에 빠졌고 이후 ‘꼴찌’ 이미지를 얻게 됐다. 반등의 기회로 삼은 2000-2001시즌은 기대와 달리 또 한 번 좌절에 빠진 기억으로 남았다. 무려 전희철, 김병철 등 국내 최고의 스타들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1999-2000시즌 8위에 머무른 동양은 김병철과 박재일의 복귀를 기점으로 반전을 기대했다. 최명룡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전희철·김병철로 구성된 원투 펀치까지 갖췄으니 플레이오프 진출을 꿈꾸는 것도 욕심은 아니었다. 당시 4강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기대감 역시 컸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엉뚱한 곳에 끼워졌다. 외국선수 의존도가 최고조에 올랐던 프로 초창기 시절인 만큼 ‘외국선수 농사’가 한 시즌 성적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동양은 전체 2순위로 데이먼 플린트, 19순위로 와이킹 존스를 지명하며 밝은 미래를 꿈꿨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사실 동양은 1998-1999시즌 역시 외국선수 문제가 심각했다. 그레그 콜버트가 개인 사유로 인해 팀을 이탈했고 존 다지는 외국선수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 자마리 마일즈 역시 기대 이하로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플린트는 미국 명문인 신시내티 대학 출신으로 가진 능력은 최고였던 선수였다. 하지만 팀플레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고 결국 현대로 트레이드된다(물론 현대가 플린트를 원했기 때문에 데려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발목 부상으로 인해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지 못했다). 존스는 부상으로 KBL 데뷔조차 하지 못했다.

이후 동양은 무려 6명의 외국선수가 오고 갔다. 끝내 전희철, 김병철에 연이은 분투에도 개막 11연패라는 역대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개막 11연패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이 됐다.

1997년 입사 후 동양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함께한 김태훈 오리온 국장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외국선수들의 기량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당시에는 외국선수 두 명이 4~50점은 해줘야 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수차례 교체가 진행되면서 안정적이지 못했다. 농구계에 있으면서 1998-1999시즌급으로 외국선수 수준이 낮았던 때였다”라고 회상했다.

전희철 SK 코치 역시 “플린트는 잘해줄 거라는 기대가 컸던 선수였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적응을 못하더라. 아마 몇 경기 뛰지 않고 다른 팀에 갔을 것이다. 외국선수가 안정적이지 못하면 성적을 낼 수 없는 시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의도적으로 교체하지 않는 이상 외국선수가 자주 교체되는 팀은 성적을 내기가 힘들다. 우리에게는 불운한 소식이지 않았나 싶다”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 2000-2001시즌 대구 동양 외국선수 잔혹사


데이먼 플린트-마이클 루이스-토드 버나드
와이킹 존스-앨버트 리차드슨-토시로 저머니

연패가 지속 되면서 팀 분위기 역시 좋을 수 없었다. 전희철, 김병철 코치를 중심으로 연패 탈출에 목표를 뒀지만 출범 이래 최초 1라운드 전패 수모를 겪어야 했고 11월 내내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전희철 코치는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려고 많이 노력했다. 20년 전 이야기인 만큼 하나, 하나 자세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침체된 건 맞다. 그래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던 기억은 있다”라고 말했다.

동양은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11월 28일 현대를 97-86으로 꺾으며 11연패를 끊었지만 곧바로 7연패에 빠지고 말았다. 최명룡 감독은 사퇴 의사를 밝혔고 끝내 팀을 떠났다(최명룡 감독 사퇴 이후 동양은 2패를 추가하며 9연패에 빠졌다).

전희철 코치는 “(최명룡)감독님이 그만두신다는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침에 선수들을 모아놓고 ‘열심히 잘해라’라는 한 마디만 남기신 채 떠나셨다. 너무 ‘쿨’하게 떠나셔서 선수들 모두 당황했다. 또 죄송하기도 했다. 우리가 못해서 감독님을 떠나게 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정말 좋은 분이셨다. 감독님과 선수들의 관계는 정말 좋았다. 다만 성적이 문제였다”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최명룡 감독 사퇴 이후 동양은 김진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으며 새로이 출발했다. 2연승, 3연승 등 조금씩 승수를 챙겼지만 마지막 순간 7연패를 기록하며 최종 성적 9승 36패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김태훈 국장은 “뭘 해도 안 되는 시기였다.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고 확실한 해결책도 없었다. 액땜이라고 하기에는 1998-1999시즌 역시 너무 힘들었다(웃음). 여러모로 미숙한 부분이 많았던 시즌이 아닌가 싶다. 사실 2000-2001시즌이 더 힘든 부분도 있다. 치고 올라갈 거라는 기대가 있었으니까”라고 이야기했다.

너무도 힘든 시기를 연이어 겪어왔던 동양. 주축 멤버가 전부 돌아온 상황에서 최악의 결과를 얻은 건 치명적이었다. 심지어 드래프트 순위 역시 3순위가 나오며 대학 최고의 센터였던 송영진을 지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 3순위 지명권은 훗날 동양은 물론 한국농구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주인공의 것이 된다.

 

민준구 기자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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