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6. 28.
“신에게는 아직 7명의 선수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기념한 영화 「명량」이 개봉했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불과 12척의 군함만 남아 있던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수군 해체 명령에도 불복하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며 당당히 왜군을 향해 나섰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승전보가 도착했고, 멸망의 위기에 빠졌던 조선은 구사일생했다.
같은 시기, 대만에선 8명의 한국 선수들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다. 8월 대만 타이페이대학 천모체육관에서 열린 제36회 윌리엄존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동안 최정예로 구성된 국가대표도 쉽사리 이루지 못했던 대업을 주전 멤버가 대거 빠진 모비스(현 현대모비스)가 해냈다.
▶ 2014 윌리엄존스컵 울산 모비스 선수 명단
라건아(당시 리카르도 라틀리프), 문태영, 박구영, 김종근, 김주성, 송창용, 전준범, 김영현
당시 모비스는 형편이 좋지 못했다. 2013-2014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하며 윌리엄존스컵 출전 자격을 부여받았지만, 전력은 온전치 못했다. 양동근은 월드컵 국가대표로 차출됐고, 함지훈과 박종천, 천대현, 이대성도 부상으로 국내에 잔류하고 말았다. 유재학 감독 역시 월드컵 국가대표 감독이 되면서 김재훈 코치가 지휘봉을 잡아야 했다. 결국 윌리엄존스컵 참가 엔트리는 불과 8명. 그중에서도 몸 상태가 좋지 못한 박구영과 부상 당한 김종근까지 실질적으로 출전 가능한 전력은 6~7명뿐이었다.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었던 건 라건아가 조기 합류했다는 것이다. 로드 벤슨은 계약 문제로 조기 합류를 거부한 반면, 라건아는 흔쾌히 윌리엄존스컵에 참가했다.
이도현 현대모비스 사무국장은 “사실 처음에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주축 선수들이 빠진 것도 문제였지만, 남아 있는 선수들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우리의 대회 목표는 모든 선수들을 고루 기용하며 부상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었다. 대회 초반, 1승 2패로 밀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다”고 회상했다.
박구영 현대모비스 코치 역시 “난 대만에 넘어가기 전부터 몸이 좋지 못했다. 원래는 안 가려 했지만, 인원이 너무 없어서 따라가게 됐다. 가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뛰고 천천히 회복하는 걸 목표로 했다. 그 정도로 우리 사정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회 출전에 대해서도 대립이 있었을 정도로 모비스의 윌리엄존스컵 출전은 모든 이들의 우려를 낳았다. 정상 전력이 아닌 상태, 더불어 대만의 홈 텃세와 9일 동안 9경기를 치르는 강행군은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적은 있었다. 초반 부진했던 모비스는 일본을 시작으로 이란, 요르단, 대만A를 꺾고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선 예선에서 패배한 이집트에 복수전을 펼쳤고, 결승에선 편파 판정과 압도적인 홈 텃세 속에서도 대만A를 무너뜨렸다. 당시 유재학 감독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며 선수들의 활약에 기뻐했다.
이도현 사무국장은 “워낙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국내 언론도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현지 언론 역시 8명의 선수만 온 것에 대해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윌리엄존스컵을 무시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가 연승을 하고 결선 토너먼트까지 진출하니 상황이 달라졌다. 대만 언론 역시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라며 선수들의 몸 상태를 걱정해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물론 연이은 승리 속에서도 모비스의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기용할 수 있는 선수는 7명. 이 안에 신인 김영현은 아직 실전 투입이 어려웠던 만큼 6명의 선수가 대부분의 시간을 소화했다. 경기가 끝나면 그대로 쓰러진 선수들은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이도현 사무국장은 “대만으로 넘어가기 전에 즉석밥부터 라면, 통조림 등 많이 챙겨갔다. 대만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한 방법이었다. 경기장 근처에 있는 한식당에도 가려고 했는데 선수들이 너무 힘들다고 안에서 먹자고 하더라(웃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정을 적은 선수들이 소화했다. 지금도 다시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고 이야기했다.
박구영 코치 역시 “음식은 대부분 입에 맞았다. 근데 힘들어서 먹는 것에 큰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하. 워낙 타이트한 일정에 적은 선수들이 뛰다 보니 경기가 끝나면 안에서 편히 먹거나 자는 데 집중했다”고 동의했다.
처음에는 무관심했던 언론도 모비스의 승승장구에 조금씩 반응했다. 이도현 사무국장은 “워낙 기사가 안 나오다 보니 스스로 상보 형식으로 글을 써서 구단 홈페이지와 SNS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4강, 결승을 가니 기자 분들이 연락을 주시더라. 따로 연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경기 상황을 전달해 드렸다. 경기를 보면서 글도 써야 하니 힘들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모비스의 윌리엄존스컵 우승은 한국팀이 이룬 두 번째 우승이다. 1999년 이후 15년 만에 이룬 쾌거이기도 하다. 대외적인 위상이 올라간 부분 역시 대단했지만, 모비스는 이 대회를 계기로 자연스러운 리빌딩에 성공했다.
당시 활약한 모비스 선수들 중 주전급은 문태영뿐이었다. 리그에선 벤슨에 밀렸던 라건아는 이번 대회에서 대만이 자랑하는 퀸시 데이비스를 압도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라건아는 “단순히 모비스의 선수라는 느낌보다 한 나라를 대표해 뛴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귀화를 생각한 건 이후의 일이지만, 아이디어가 된 대회가 아니었나 싶다”라고 밝혔다.
라건아를 비롯해 전준범과 송창용의 활약도 대만을 들끓게 했다. 중요한 순간마다 3점포를 터뜨린 전준범은 이후 시즌부터 모비스의 스나이퍼로 활약했다. 라건아, 문태영과 함께 대회 베스트5로 선정된 송창용 역시 국내 팬들에게 ‘송브론’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박구영 코치는 “윌리엄존스컵 대회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준범이나 (송)창용이는 유망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대회를 계기로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팀의 입장에서도 우연한 기회에 젊은 선수들이 제 역할 이상을 해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싶다”라고 이야기했다.
금의환향한 모비스는 2014-2015시즌 역시 정상을 차지하며 KBL 역사상 첫 ‘쓰리 핏(Three-Peat)’에 성공한다. 양동근, 함지훈, 문태영이라는 국내 최정상급 선수들에 전준범과 송창용, 라건아 등 윌리엄존스컵의 영웅들이 합작한 작품이었다.
5년이 흘렀지만, 모비스의 윌리엄존스컵 우승은 아직도 많은 농구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수많은 악조건을 이겨냈고, 또 결국 정상에 선 그들의 투지와 열정. 모비스가 그린 2014년 8월의 그림은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걸작을 만들어 낸 고흐의 작품과 같았다.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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