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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인생의 전환점이 된 보상선수 지명, 송영진의 인생역전

--민준구 농구

by econo0706 2022. 11. 1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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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5. 31.

 

한때 한국농구 최고의 유망주로 꼽힌 남자가 있었다. 198cm의 장신, 내외곽을 오고 갈 수 있는 다재다능함. 그러나 프로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좀처럼 빛을 보지 못했던 그에게 한 줄기 희망이 찾아왔고, 놓치지 않았다.

2001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 전체 1순위의 주인공 송영진은 프로 통산 14시즌을 뛰었으며 606경기 출전 평균 7.3득점 2.4리바운드 1.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박지현, 황진원, 김주성과 함께 중앙대 천하를 이끌었던 그는 농구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전체 1순위라는 최고의 영광과 함께 창원 LG로 향했다.

그러나 송영진의 초기 프로 생활은 실망스러웠다. 드래프트 동기생인 김승현이 오리온을 정상으로 이끈 반면, 그는 확실한 주전으로 올라서지 못했다. 신장에 비해 스피드가 좋았던 송영진은 외국선수를 막기 위해 체중을 불렸고, 이후 신체 밸런스가 무너진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도 느낀 부분이지만, 김태환 감독님과 구단 역시 몸무게를 늘려야 한다고 하셨다. 체계적으로 몸을 키웠어야 했지만, 단기간에 해결해야 할 부분이었기에 무리가 있었고, 결국 과도한 나머지 내 몸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안 좋은 모습만 보였던 기억이 있다.” 송영진의 말이다.

어느 정도 자신의 몸에 익숙해질 때 즈음 송영진은 또 한 번의 비극을 맞게 된다. 전환점이라고 생각했던 2004-2005시즌 중반, 맹장 수술로 인해 한 달여의 공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송영진은 “맹장 수술이라고 해서 쉽게 생각했었다. 근데 수술이 잘 못 되는 바람에 재수술까지 해야 했다. 한 달 정도 누워 있으면서 10kg이 빠졌고, 도저히 운동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천천히 몸을 끌어올렸어야 했는데 LG에선 외국선수의 부상으로 조기 복귀를 바랐고, 이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고 전했다.

당시 송영진은 강동희 코치에게 어려움을 전했고, 결국 그대로 시즌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2004-2005시즌 송영진의 성적은 34경기 출전 평균 5.0득점 1.7리바운드. 이대로 가다간 송영진이라는 이름이 잊혀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위기 속에 기회가 있었다. LG는 FA로 풀린 현주엽을 영입했고, 보호선수 명단에 현주엽, 조우현, 황성인을 포함했다. 베테랑 김영만과 송영진을 선택할 수 있었던 추일승 KTF 감독은 고심 끝에 송영진의 이름을 바라봤다.

“상무 감독으로 있을 때,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중앙대와 자주 만났었다. 그때마다 (송)영진이의 플레이에 놀랐고, 앞으로 크게 될 친구라고 생각했다. LG에서의 생활이 어려웠을 테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농구와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했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추일승 감독의 말이다.

KTF에 합류한 송영진은 추일승 감독의 배려 속에서 체계적인 몸 관리에 들어갔다. 몸무게 불리기에 그쳤던 LG 때와는 달리 근육을 키웠고, 자신의 장점인 스피드와 긴 슛 거리를 100% 활용할 수 있는 플레이에 초점을 맞췄다.

KTF 소속으로 뛴 첫 시즌, 송영진은 50경기에 출전해 평균 8.9득점 2.3리바운드 1.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신인 시절을 제외하면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것. 기량발전상까지 손에 쥐며 반전된 모습을 보였다. 이름값을 되찾은 그에게 국가대표 역시 손을 벌렸다. 2006 월드바스켓볼 챌린지, 도하아시안게임 등에 출전하며 태극기를 가슴에 품었다.

이후 FA 자격을 얻어 5년, 2억 4천만원에 재계약했으며 2006-2007시즌에는 평균 13.8득점 3.5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KTF의 창단 첫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이끌었다.

송영진은 “내가 가장 잘 뛸 수 있는 포지션을 찾았다는 게 중요했다. 추일승 감독님이 계실 때 4번(파워포워드) 역할도 했지만, 주로 3번(스몰포워드)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선수들이 워낙 탄탄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줄 수 있었다. 잘 될 때는 생각 없이 해도 몸이 알아서 따라줄 정도였다(웃음)”며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KTF는 애런 맥기, 필립 리치라는 정상급 외국선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공격 이외에 국내선수들의 움직임을 잘 살폈다는 것. 추일승 감독은 “영진이는 상대 수비의 빈 공간을 정말 잘 찾아들어 갔다. 그런 선수들을 활용할 때는 외곽보다 골밑에서 나오는 패스가 중요한데 외국선수들이 잘 준 것 같다”며 “내가 추구하는 농구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던 시기였다. 영진이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퍼즐이었다”고 말했다.

추일승 감독이 떠난 뒤에도 송영진은 여전히 리그 정상급 포워드의 위치를 고수했다. 전창진 감독과 함께 정규경기 1위를 차지하기도 했고, 2001 드래프트 동기들 중 가장 오래 뛴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송영진은 “사실 보상선수로 다른 팀에 지명된다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반대의 입장이었다(웃음). 다른 선수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보상선수로 다른 팀에 간다는 건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일이다. 프로에서의 생활이 누군가에게는 행복할 수 있지만, 누구는 너무 힘든 시간이 될 수도 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한 번 더 마음가짐을 다 잡을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른 팀에서도 필요하니 선택한 것이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면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송영진 이후 많은 보상선수들이 다른 팀으로 이적해왔다. 올해에는 2010년 이후 처음으로 서민수가 DB에서 LG로 이동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송영진의 조언은 뜻깊을 수밖에 없다. 아직은 상무 소속인 만큼, 심적인 부담과 어려움이 크겠지만, LG에서 그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는 보상선수 이적. 송영진의 조언, 그리고 경험은 서민수를 비롯해 앞으로 나올 보상선수들에게 나침반이 될 것이다.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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