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5. 17
방출 후 은퇴 위기까지 몰린 베테랑이 새 팀에 둥지를 튼 후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팬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올 시즌엔 ‘거인의 진격’에 핵심 역할을 하는 베테랑 불펜 투수 김상수(35ㆍ롯데)가 주인공이다.
16일 현재 김상수는 19경기에서 3승 5홀드 1세이브에 평균자책점 1.88을 기록하며 롯데 마운드에 든든한 허리 역할을 하고 있다. 수치도 좋지만, 내용 면에서도 좋은 흐름은 이어가고 나쁜 흐름은 끊는 알짜배기 활약이기에 더욱 값지다. 16일 대전 한화전에서 롯데는 1-0으로 앞선 8회말 무사 2루에 필승조 구승민을 냈지만, 구승민의 3구째 공이 ‘헤드샷’이 되면서 퇴장당했다. 이때 김상수가 급하게 마운드에 올라 후속 타자들을 연속 삼진으로 잡고 급한 불을 껐다.
김상수는 17일 대전 한화전을 앞두고 본보와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쉬고 있다가 갑자기 나갔지만, 불펜 투수로서 언젠가 마운드에 올라 던질 수 있도록 마음과 생각이 준비돼 있다.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래리 서튼 감독도 “(김상수가) 등판할 때마다 상대 타선의 흐름을 끊고 우리 쪽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하고 있다”라며 팀 내에서 그의 비중을 높게 평가했다.
새로 팀에 합류한 베테랑의 활약에 롯데 팬들도 ‘올 시즌 최고의 영입 선수’ ‘그저 빛상수’ 등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특히 최근엔 김상수 등판 때 ‘기세’라는 응원 문구가 부쩍 늘었다. 김상수는 최근 구단 방송 채널에서 ‘마운드에서 긴장감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는 후배의 질문에 “기세!”라고 힘줘 답했는데, 이 발언이 팬들에게 회자된 것이다. 심지어 ‘기세’를 활용한 김상수 전용 ‘응원 상품’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하는 팬들도 있다. 김상수는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운도 중요하지만 나 스스로도 ‘기세를 가진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스프링 캠프 때부터 ‘기세’를 자주 말했는데, 나도 모르게 방송에서 입 밖으로 표현된 것”이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최근엔 팬들의 ‘기세 응원’ 덕분에 내가 더 기세를 얻는 것 같다”라며 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지난겨울 누구보다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키움 소속이던 2019년 역대 단일시즌 최다 홀드 기록(40개)을 세우며 홀드왕에 올랐지만, 이듬해엔 실망스러운 성적을 냈다. 2021년 SSG로 이적했지만, 반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지난해엔 단 8경기 등판에 그쳤다. 결국 시즌 직후 FA 연장 옵션을 행사하지 않고 SSG에 방출을 요청했다.
당시 심각하게 은퇴를 고민했다고 한다. 김상수도 “결과가 안 나오다보니 다시 시작하기 힘들다는 생각만 들었다. 정신적으로 너무나 지치고 힘들었다”라고 털어놨다.
역시 주변인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김상수는 “오주원 선배와 (이)택근이 형, 그리고 (박)병호 형 등 ‘딱 1년만 더 도전해 봐’라고 하셨다. 책도 많이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렸고, 특히 ‘멘털 스승’인 아내가 큰 힘이 됐다”면서 “‘진짜 1년만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을 즈음 마침 롯데에서 손을 내밀어 주셨다”라며 다시 일어서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 롯데 김상수가 4월 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과 경기에서 역투하고 있다. / 롯데 제공
롯데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 이대로라면 올 시즌은 전성기였던 2017~19시즌을 뛰어넘어 데뷔(2006년 2라운드 전체 15순위) 이후 ‘개인 통산 최고의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김상수는 그러나 “아직 시즌 초반인 만큼 ‘최고의 해’라기엔 너무 이르다”라며 몸을 낮췄다.
쉽지 않은 시간을 지나온 만큼 “지금은 그저 마운드에 서는 것 자체로 행복하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소속팀의 세 번째 우승’을 얘기했다. 그는 “신인이었던 2006년(당시 삼성)과 2022년(당시 SSG)에 소속 팀은 우승했지만, 정작 나는 멀리서 박수만 쳤다. 많은 축하 전화에도 불구하고 사실 마음은 편치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올해는 소속팀 롯데의 우승에 꼭 힘을 보태고 싶다”라고 다짐했다.
모국서 성공 신화 꿈꾸는 재일교포
롯데는 지난 2일까지 9연승을 달렸다. 15년 만이었다. 그 뒤로도 리그 1·2위를 다툴 정도로 기세가 뜨겁다. 그 상승세 중심에는 낯선 이름이 있다. 이대호(은퇴)도 손아섭(NC 이적)도 아니다. 새로 떠오른 전천후 공격수 안권수(安權守·30)다. 현재 롯데의 유일한 ‘3할 타자’이자 뜨거운 ‘클러치히터(clutch hitter·득점 기회가 생겼을 때 안타를 치는 타자)’. 17일 기준 타율 0.303(99타수 30안타), 득점권 타율 0.435로 롯데 타선을 이끌고 있다. 도루(6개)에서도 팀 내 1위. 그는 “득점권 타율 성적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꼽았다.
▲ 안권수가 지난 9일 사직야구장에서 국민의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 3세인 그는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태극 마크를 달고 싶다고 말했다. / 김동환 기자
할아버지 나라에서 뛰고 싶던 소년
안권수는 재일교포 3세다. 일본 사이타마현 출신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진 일본체육회 춘계 전국수영대회 자유형 50m에서 2위에 오른 수영 유망주였다. 그러다 6학년 때부터 비교적 늦게 야구방망이를 잡았다. “수영을 열심히 했던 것도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따면 야구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부모님 약속 때문이었어요. 어릴 적부터 집 근처에서 본 도쿄돔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수영 선수 시절 길러진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안권수는 승승장구했다. 고교 시절 고시엔(일본 최고 권위 고교 야구 전국 대회)에서도 활약하고, 야구 명문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일본 프로야구 문턱은 높았다. 그는 일본 구단에 지명받지 못하고 일본 독립 리그를 전전했다. 그러다 2020년 국내 프로야구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외파 트라이아웃 당시 부상을 입어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두산이 그 잠재력을 높이 사 마지막에 그를 호명했다. 전체 지명자 100명 중 99순위. 일본에서 한국으로 벅찬 첫발을 내디뎠다.
▲ 롯데 안권수./ 롯데 자이언츠
재일교포도 한국인... 태극 마크 꿈꾼다
두산에서 3년간 조금씩 발전하던 그는 지난해 말 ‘방출’됐다. 타율 0.297이란 호성적이었는데 그랬다. 2018년 5월 개정된 병역법 시행령 때문이었다. 1993년생인 안권수는 병역법 시행령 제128조에 따라 3년을 초과해 국내에 체류한 경우 재외국민 2세(국외 출생자) 자격이 취소되고 국외 이주자로 전환되어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한 국내에서 영리 활동과 체류 기간에 제한을 받게 됐다. 국내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면 올해 안에 군대를 가야 한다는 뜻이다. 30대에 이제 막 가능성을 보여준 타자를 2년가량 기다려줄 팀은 없다. 롯데는 일단 1년 ‘시한부 선수’일 가능성이 높은 그를 과감히 받아줬다. 연봉 8000만원이란 ‘헐값’이었기에 가능했을 이적이었다.
안권수는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기대하고 있다. 대표로 뽑혀 금메달을 목에 걸면 병역 특례를 받아 ‘시한부’ 꼬리표를 뗄 수 있다. 최근 실력도 일취월장,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와 KBO(한국야구위원회)는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을 만 25세 이하 또는 4년 차 이하 선수들로 짜기로 했다. 안권수는 나이는 많지만 프로 4년 차. 대표 선수 자격을 갖췄다. KBO가 지난달 28일 발표한 예비 명단 198명엔 안권수도 있었다.
안권수는 ‘병역’ 얘기만 나오면 조심스러워했다. 서툰 한국말 때문에 괜한 오해가 빚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병역 문제와 상관없이 태극 마크를 달아보고 싶다는 열망은 항상 있었어요. 일본에 살면서 계속 한국 국적을 간직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9월에 열리는)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발탁 중 무얼 고르겠느냐’는 짓궂은 질문엔 고민 없이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라고 말했다. 설령 롯데가 정상에 올라도 그는 곧바로 글러브를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
▲ 롯데의 안권수(왼쪽). /최문영 스포츠조선 기자
야구에 비유하자면 그의 선수 인생은 어디쯤 와 있을까. “(패배 위기에 몰린) 9회말 2아웃이죠. 연장전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야구 정말 계속 하고 싶거든요.”
강주형 기자 cubie@hankookilbo.com
+ 박강현 기자 iamchosun@chosun.com
한국일보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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