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13
미국 메이저리그는 힘의 야구. 일본 야구는 세기의 야구. 그렇다면 한국 야구는?
그동안 한국 야구는 미국 야구와 일본 야구의 이종결합이라는 얘기들을 했다. 미국식 힘과 일본식 세기가 적절히 조화됐다는 뜻이었다.
한국 야구는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미국식을 많이 따랐다. 한국 야구의 제1 목표는 역시 일본 타도.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역시 미국식 야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최근 이종이 아닌 순종 한국 야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 주니치도 쩔쩔 맸다. ‘한국식 발야구’다. SK 타자들은 내야 베이스 위를 훨훨 날아다녔다. 일본 프로야구 최강 키스톤 콤비라는 2루수 아라키, 유격수 이바타 듀오도 SK의 ‘발야구’에 정신을 잃었다. 최강 내야수들이 넘어지고 자빠져서 공을 더듬는 모양새는 차라리 슬랩스틱 코미디를 닮았다.
김성근 감독이 쐐기를 박았다. 김감독은 “일본 친구들이 ‘파닥파닥’ 뛰는 두산 발야구 봤더라면 더 놀라 자빠졌을 것”이라고 했다.
두산은 30도루 3인방을 바탕으로 올시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팀 마스코트 곰은 더이상 힘만 센 느림보가 아니었다. 새로운 야구의 탄생.
그러나 두산 발야구가 한국 발야구의 원조는 아니다. 원조 발야구는 1995년 롯데였다. 두산은 올시즌 161개 도루를 성공시켰지만 그때 롯데는 자이언츠라는 팀명이 무색하게도 무려 베이스를 220개나 훔쳤다. 30도루 3인방도 멋졌지만 당시 롯데 라인업을 채운 두자릿수 도루 8명의 파괴력은 더 컸다. 나가면 뛰었고, 뛰면 들어왔다. OB와의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아쉽게 패했지만 롯데는 새로운 발야구의 세계를 열었다.
롯데 1번 전준호는 도루 69개를 했다. 김응국이 31개, 공필성이 22개, 김종헌이 21개를 훔쳤다. 4번타자 마해영도 그해에는 16도루를 성공시켰다.
신 발야구를 만든 것은 당시 김용희 감독과 조 알바레스 코치였다. 현대에서 뛰고 있는 전준호는 “프로야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 프로야구 처음으로 주루코치 손에 스톱워치가 들렸다. 그때부터 투수들이 공을 던지면 그라운드에서 삑삑 거리는 스톱워치 소리가 들렸다. 전준호는 “캠프 때부터 베이스러닝 훈련량을 엄청나게 늘렸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신감이다. 그때 전준호에게 김용희 감독이 말했다. “충분히 뛸만 했는데 왜 시도하지 않았냐”고. “스타트가 잘 안걸려서 그랬다”고 답하자 김감독의 말.
“가서 죽어라. 그러면서 느껴라.”
이를테면, 사즉생. 아웃카운트는 아깝지만 거기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얻는다면 못할 이유가 없다. 그 발야구, 전쟁도 가난도 독재도 그리고 외환위기도 견뎌낸 대한민국을 꽤나 닮지 않았나.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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