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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헵번주의

溫故而之新

by econo0706 2007. 2. 15.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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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도청 한국사연만한 분들은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로마의 휴일'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왕궁을 벗어나 자유시민으로서 분방한 로마의 휴일을 만끽한 앤공주의 기자회견 장면이다. "가장 좋았던 도시는 어딥니까"고 묻자 공주는 시중하는 시녀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어느 도시건 제각기 좋은데가 있었습니다"고 대꾸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하지만 아무래도 로마가 제일이에요. 제일 좋았어요"하여 시녀들을 당황하게 한다. 먼저 대답은 공주로서 본심을 숨긴 의례적 대답이요,나중 대답은 인간으로서 격을 벗어난 진솔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수복 후인 50년대 후반이었다. 전쟁으로 집이며 도시가 쑥밭이 되고 가족과 공동체가 해체되었으며 의존할 희망이나 도의나 가치관마저 누더기가돼 있던 시절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구각(舊閣)에서 방출된 것같은 빈곤 속의 해방감 같은 것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을 어떻게 살아가는 역량으로 결실시키느냐는 아무도 모르고 있을 때 였다.

 

그런 때에 곰팡이 내나는 구각을 벗어던지고 싱싱한 휴머니즘의 풋내를 풍겨주던 이 영화는 동토에 여린 새싹이 돋는 것같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무렵 젊은이들 간에 '헵번주의'라하여 기존의 도의나 체제나 가치관에 구애받지 않고 위선하지 않으며, 없으면 없는 그대로, 못났으면 못난 그대로, 모르면 모르는 그대로 솔직하게 신선하게 사는 태도가 유행하기까지 했었다.

 

언젠가 헵번은 그의 연기생활에 있어 못다한 여한(餘恨)을 묻는 기자에게 영화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의 역을 하지못한 것이라했다. 그 역을 맡기에는 당시 너무 늙어 있었다는 것이다.

 

여한이 되도록 안네가 되고 싶었던데는 그 나름대로의 인생역정이 복선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2차대전이 일어났을 때 소녀 헵번은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었다. 독일 나치 침공을 받으면서 헵번의 삼촌, 조카가 처형당하고 형제들도 강제 노동판에 끌려간다. 안네 프랑크가 바로 그 네달란드의 한 다락방에서 그 큰 눈으로 그 참상들을 지켜보았듯이 헵번도 그 큰 눈으로 그 참상들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는 영양실조로 쓰러져가면서도 대(對)나치스 저항운동의 자금마련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의 눈이나 몸매를 두고 청초하고 천진난만하다는 평을 들었을 때마다 거울을 보고 그의 눈동자 깊이 가라앉아있는 눈물과 고통의 앙금을 확인하곤 했다고 한다. 그 눈가장자리에 주름이 잡힌 만년(晩年)에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헌신한 것도 그런 과거의 업보(業報)였는지 모른다. 그 헵번이 커다란 눈만 뇌리에 기억시켜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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