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제작된 '노스탤지어'란 이탈리아 영화가 있다.
소련의 거장 타르코프스키가 감독한 종교적 색채가 물씬한 작품으로, 그 가운데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인근 유럽 사람들보다 신심이 깊으냐"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국토가 바닷속에 노출되어 있는 데다 땅 아래 화산대를 깔고 있어 유럽의 어느 다른 나라들보다 자연에 시달리며 살아 왔다. 따라서 자연이란 인간이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럽 일반의 합리주의를 초월,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편이 안정을 주기 때문이라 했다. 곧 반도기질이 신심을 깊게 한다는 것이다.
"왜 여자쪽이 더 신심이 깊으냐"고 묻는 대목도 나온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또 기른다. 남자에 비해 뭣인가 잘못된 것이 없나 하는 우연의 연속(連續)에서 못헤어난다. 그래서 초월자 앞에선 무릎이 절로 꿇어지고 손바닥이 절로 합쳐진다는 것이다.
일전 신도숫자를 기준한 세계 50대 교회의 1~2위가 한국에 있으며, 그 50대 교회의 반수에 가까운 23개가 역시 한국에 있다는 외국 종교전문지의 인용보도가 있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교회의 대형화를 초래한 한국인의 심층 심리란 도대체 어떤 뭣일까. 여러가지 복합이유 가운데 하나로 영화 '노스탤지어'에 나오는 이탈리아의 신심 문답이 우리나라에도 고스란히 들어 맞는다고 본다. 지구상의 기후변동에 가장 큰 변수인 남태평양의 열기단과 시베리아의 냉기단이 하필이면 우리 한반도 위에서 맞부딪치는지라 자연의 횡포는 이탈리아보다 우리 한반도가 한결 혹심했다. 그래서인지 절대자에게 귀의(歸依)하고 인생만사를 절대자의 섭리(攝理)에 맡겨야 마음이 놓이는 종교심이 심층 심리로 정착이 됐음직 하다.
그래선지 우리 조상들은 무슨 소망하는 일이나 기쁜 일이나 불행한 일이 생기면 따지기 이전에 일단 빌고 본다. 불교이론으로 뛰어났던 원효대사가 끝내는 이론보다 염불(念佛)로 종교적 경지에 드는 염불불교로 교화하게된 것도 바로 이같은 한국적 신심 때문이다.
1866년에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베르누이 프랑스 주교는 조선 민중의 신앙 성격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 사람은 매우 단순하여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진리를 기르치면 쉽게 감동하여 입신하고 십계같은 간단한 경문만을 외우는 것으로 종교적 만족을 느끼며 부나비처럼 순교도 불사한다."
달리 말해서 신앙 감도(感度)가 별나게 높고 민감하다는 것이 된다. 거기에 가족중심 촌락중심의 기존 공동체가 도시화-핵가족화로 급속도로 와해 이산하여 소외를 느끼고 고독해진 사람들에게 구심점을 제공한 것이 바로 교회였다. 이같은 사회 심리가 한국교회의 양적인 팽창을 가속시켰음직한 것이다. 중세 유럽의 교회가 전철을 밟았듯 양적인 확대가 반드시 질적인 향상을 뜻하진 않으 며 오히려 쇠퇴를 몰아올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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