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른이나 상전이 밥상의 음식을 짐짓 남겨 아랫사람에게 물리는 상물림은 먹다 남은 찌꺼기의 청소수단이 아니라 한솥밥 한상밥을 더불어 공식함으로써 일심동체를 확인하고 다지는 의식인 것이다.
조식학파와 성혼학파에서는 한 책을 동문대대로 물려 읽었는데, 그 책머리에 물려받아 읽은 사람의 계보를 적은 책보(冊譜)가 붙어있게 마련이었다. 그렇듯이 옷을 물려입은 옷 물림도 빈곤했던 물자 결핍시대의 서글픈 유산이 아니라 체온이 스민 옷을 더불어 함으로써 같은 피와 살을 나눈 사이를 확인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신하로서 최고의 영광이요 자손 대대로 계승되는 명예는 임금님으로 부터 입던 옷을 하사받는 일이었다. 족보를 보면 벼슬보다도 '사의(賜衣)'란 말이 첫머리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임금님으로부터 옷 물림을 받는 일이 어떤 다른 벼슬보다 영광이기 때문이다.
등짐-봇짐장수인 보부상은 초면이라도 형님 아우하는 가족호칭을 쓰는 가족적 집단이었다. 지금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봇짐장수와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등짐장수가 천안삼거리에서 만났다 하자. 절을 10여번 하는 인사를 나누고는 입었던 저고리나 바지를 서로 바꿔 입는다. 이를 환의(換衣)라 했는데, 생사를 초월한 결의의 의식으로 삼국시대부터 있어내린 아름다운 정신습속인 것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오면 축하행렬이랄 수 있는 유가(遊街)를 하는데 인근 고을의 과거 지망생들 수십명이 그 뒤를 따르게 마련이다. 유가를 하다 저고리를 벗어 던지게 돼있고 그 저고리를 차지해 입는 자가 급제의 주력을 얻는다하여 서로 찢어 한 소매 한 가랑이만 꿰고 다니기도 했던 것이다. 아버지 옷을 맏아들이, 맏이가 입었던 그 옷을 둘째, 셋째로 물려입는 것은 베가 귀한 가난했던 시절의 슬픈 습속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4대를 물려입은 누더기 저고리를 가보로 간직하고 있는 집을 알고도 있다. 영국에서도 웨딩드레스를 5~7대씩 물려 한 가문의 딸 수십명이 한 드레스로 결혼한 사실을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동포(同胞)란 말의 뿌리가 한 옷을 더불어 입는 사이란 뜻인 동포(同布)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졸업 시즌이다. 경향의 여러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이 웃옷을 벗어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옷물림 행사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근검절약의 차원에서보다 떠나고 남아 있는 선-후배 사이의 정신적 결속의식이란 차원에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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