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새로 세웠거나 새 임금이 등극했을때 맨먼저 하는 일이 사면(赦免)선포다.
신라 문무왕은 통일후 전국의 대-소 죄인을 가리지 않고 방면(放免)하고 있다. 이 태조도 즉위와 더불어 흉악육범(凶惡六犯) 이외의 죄인 모두를 사면하고 있다. 광무4년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리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역모죄(逆謀罪)로 들어가 있는 명성황후 시해범과 천도교 최제우관련 사상범까지 포함된 파격적인 것이었다.
세자나 왕비 등 왕실의 경사가 있을 때도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한국사상 최초의 대사령을 고구려 둘째 임금인 유리왕이 내리고 있는데 세자를 세우던 날의 일이었다. 임금이 지방에 행차했을때 그 지역이나 연변의 죄수를 풀어 은혜를 베풀었다. 세조가 평양에 행행했을때 연변 감옥의 죄수들에게 사면을 하고 있다.
천재지변으로 민심이 흉흉하면 대사령을 내려 옥문(獄門)을 열기도 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백성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 내린 천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신라 성덕왕은 5년에서 15년까지 13번의 대사령을 해마다 내리고 있는데, 천재지변으로 흉년이 잇따랐기 때문이며, 그래도 흉액(凶厄)이 멎지않자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가슴을 치고 통곡했다던 임금님이시다.
만백성에게 수범이 될 도덕범죄가 발생했을때도 사면령을 내렸었다. 이를테면 인조 6년에 이극명이라는 자가 살인죄로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그의 아우가 나타나 사람을 죽인 것은 형이 아니라 내가 죽였다면서 죽음을 대신하려 서로 싸우자 임금이 그 말을 듣고 가히 군자도 못할 일이라면서 두사람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팔도에 대사령을 내려 동기간의 도리를 팔도에 선양시키고 있다.
악군(惡君)일수록 감옥이 비면 태평성세의 징후라는 성인의 말을 악용, 사면령을 남발하고 감옥이 비었다는 '옥공(獄空)'이라 쓴 깃발을 팔도 요도에 나부끼게 했던 것이다. 그때 마다 강도, 강간, 유괴, 살인같은 흉악강력범이 배가(培加)하였기로 사면남발로 급증한 도적을 옥공적(獄空賊)이라 부르기까지 했던 것이다.
조선조 후기의 극심한 사회 혼란은 사면 남용(濫用)이 유발한 것이라고 지탄한 임금은 숙종이요, 남사소(濫赦疏)를 올린 재상은 남구만이며, 남사폐(濫赦弊)를 적어남긴 학자는 정약용이다.
어제 문민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대사령이 내려 4만여명의 수의(囚衣)를 벗기고, 문민시대에 동참할 기회를 주고있다. 가히 반옥공(半獄空)의 깃발을 나부낌직한 대규모의 사면령이요, 그많은 사람을 가두어 두고서야 가능했던 그런 정치의 전철을 밟지 말기를 당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