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찾아오는 손님에게 불편없게 친절해야겠지만 그에 앞서 찾아오게 하는 유인 조성이 보다 중요하고 역점을 둬야 할 문제다.
그 중 하나로 500년 수도의 옛모습을 보존해내린 북촌을 정비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북촌은 서울 풍수의 핵인 경복궁과 창덕궁 양대 궁을 잇는 북악과 매봉 연맥의 완만한 양지바른 남쪽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다. 궁이 가깝기에 임금의 후손이나 조정에 드나드는 사대부들이 주로 살아온 권문귀족촌이다.
북촌 집들의 특징을 문헌에서 모두어 가려보면 이렇다.
첫째, 그 집의 몸채와 사랑이 남향으로 돼있다는 점을 들수 있다. 본래 서울의 집들은 궁전이 남향이기에 관청은 동향이나 서향이어야하고 백성은 임금을 등지고 살아서는 안된다하여 북향으로 짓는것이 법도였다. 한데 <송와잡설(松窩雜說)>에 보면 중종 이래로 이 법도가 해이해져 세도가들이 사는 북촌에서 몸채와 사랑을 남향으로 짓기 시작, 그것이 북촌의 이권처럼 정착이 됐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북천하고, 서울이 비자 난민들이 궁궐 관아 북촌 순으로 불질렀던 것으로 미루어 당시 지배층에 대한 서민의 감정을 읽을수 있게 한다.
둘째, 대체로 3품이상의 당상관이 살기에 가마나 말을 타고 출입할 수 있게끔 출입문이 솟을 대문이고 나라의 신분별 건축규제에 따라 집 넓이도 30칸 이상이요, 기둥 높이도 11척이다. 일반 서민 집이 10칸에 기둥이 8척인것과 차등을 두었다.
벼슬이 높다고 아무나 북촌에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영조·정조 이래 고종초까지 150년간을 집권해내린 노론이 주로 북촌을 점거하고 있었다. 북촌집 가운데 권세가 있고 없고의 집을 그 담벽에 꽃장식을 하고 안하고로 식별했다 한다. 시사를 익살하고 전전하는 풍자객이 이 꽃담이 없는 집을 찾아들어가 벼슬못한 자들의 공감대를 형성시키고 다녔던것도 북촌의 한 풍물이었다.
북촌만 정비할 게 아니라 그 상대하고 있던 남산 북록의 남촌도 부활시켰으면 한다. 청빈과 인격만으로 한국적인 인생관을 구축했던 깡마른 선비들 마을에는 세계인을 감동시킬 일화도 비일비재하다.
외국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보고싶은 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있는 그런 것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