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공개된 고위 공직자 재산등록현황에 보면 재물에 겸허하길 기대하는 염원과는 달리 벼슬이 높을수록 큰 승용차를 선호하고 또 4~5년 만에 바꾸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전통사회에서는 고위 공직자일수록 백성의 배리감을 덜고자 집의 크기나 넓이를 품계에 따라 제한했고 대문의 폭이나 높이도 함부로 하지 못했었다. 요즈음의 승용차랄 수 있는 타고 다니는 가마의 크기나 메고 다니는 사람 수도 신분이나 품계에 따라 제한이 까다로웠다.
지금 서울 종로구 수하동에 납작골이라는 옛 지명이 있었다. 납작 태화정이라는 집이 있었기에 얻은 지명이다. 한말 이 문안에 김흥근 대감이 사는 태화정이라는 저택이 있었다. 인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왕궁으로 규모가 컸다. 그 태화정 문인으로 중인인 임상현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돈이 꽤 많았다. 이에 수하동에다 제 살집을 지었는데 상전집을 선망하여 태화정과 똑같은 축대와 기둥높이, 집 칸수, 창호의 배치를 했다. 물론 국법에 어긋난 일이었다. 이 말을 들은 상전은 다 지은 집 허물게 할 수는 없고 해서 칸수를 줄이고 기둥높이를 규정에 맞게 잘라 낮추게 했더니 납작 태화정이 되고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다.
숙종 때 세도를 부렸던 장희빈이 여덟 사람이 메는 팔인교를 타고 다니다가 법을 어겼다 해서 가마꾼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고, 선조의 유모가 법에 어긋난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드는 것을 보고 선조가 궁 밖으로 돌아나가게 한 것 등 탈 것 사치에 대한 제재의 역사도 유구하다.
한말에 초헌이라 하여 외바퀴 수레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탈 것이 있었는데 정2품 이상의 벼슬아치만이 탈 수있는 고급 독륜차였다. 이 초헌을 타고 다니던 교사동 대감들 집에 손재간 좋은 종이 있었던지 이 초헌에 톱니바퀴를 달아 지렛대를 위 아래로 작동하여 굴러가게 하고서 자신이 타고 다녔던 것 같다. 법을 어긴 이 종의 말로는 뻔한 일이었다.
보다 크고 비싼 새차를 타고, 보다 좋고 큰 새집 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백성이 주는 녹을 먹고 사는 사람일수록 그 인지상정을 억제해야 했기에 규제를 한 것일 게다. 규제가 없어진 것은 스스로에게 맡긴 것뿐인데 그 자제의 도덕이 상류에서부터 너덜거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