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이 26일 괴한의 흉탄에 급서하였다는 비보에 접하자, 정치적 노선의 여하를 막론하고 다 같이 비통한 애도를 금할 수 없으니 선생이야말로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열열한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생은 19세의 약관시에 일군에 의한 명성황후의 살해를 보자 분노하여 일헌병을 타살한 것을 계기로 이후 1923년 상해망명시까지 수차의 옥중생활의 신산을 겪었고 풍찬노숙의 망명생활의 갖은 고초도 선생의 투지를 꺾을 수는 없었으니 이봉창, 윤봉길, 최창식 제의사의 의거는 실로 선생의 지도에 의함은 물론이요, 기외에 허다한 독립열사의 의거가 오로지 선생의 불요불굴의 투지의 표현 아님이 없었던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와 같이 지성한 백범 김구선생의 급서는 천수를 다하지 못함에 있어서 더욱 우리 마음을 애통하게 하는 것이다.
선생의 공적과 덕을 추모하여 작 27일 임시국무회의에서는 국민장을 하기로 결정함은 실로 당연한 처사로서 국민이 다같이 애도의 충정을 표시할 기회를 가진 것이니 선생의 애국혼을 우리가 답습함으로써 선생의 명복을 빌어야 할 것이며, 추호라도 탈선적 행동이 있다면 이것은 오히려 선생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서 명복을 비는 소이가 아닌 것이니 선생의 급서를 계기삼아 또한번 강조하고자 하며 명심하기를 바라는 바는 일체의 테러 행동을 철저히 근절시키자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할 뿐 아니라, 실로 법치국가의 위신을 손상함이 이에 더할 바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감정은 이론화 되어야 하고 이론을 여론화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시비가 결정되어야 하며 어떠한 개인의 감정과 감정적인 행동에 의하여 시비가 결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범과는 법에 의하여 질서 있게 처리되어야 하며 개인적인 테러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민주주의적 상식일 것이다.
해방 이후 조국의 민주재건의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누차 민주주의적 상식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테러의 흉변을 당했으니 고하 송진우 선생을 비롯하여 설산 장덕수, 몽양 여운형 양선생의 흉변에 단장의 애통을 느낀 것이 엊그제 같이 새로운데 이제 또다시 백범 김구 선생의 흉변의 보에 접하게 되니 이러고서야 우리 자신의 상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조국의 민주재건에 커다란 지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하수자가 어떠한 자인지를 아직 모른다. 그 자가 어떠한 훌륭한 생각과 애국심의 소유자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훌륭한 애국자라 하더라도 그 애국심이 이렇게 표현되는 것을 우리는 수긍할 수 없으며 이러한 표현방식은 오히려 비애국적인 결과가 되고마는 것을 유감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라! 고하, 설산, 몽양 같은 분들이 지금도 살아 계신다면 다난한 조국의 전도에 얼마나 많은 광명이 되었을 것을! 일시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과격한 행동을 삼가자. 국가사회의 시비는 여론과 법률로 결정되는 것이며 개인적인 독단과 지나친 행동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후 일체의 테러행동을 근절할 것을 선생의 영전에 맹서함으로써 선생의 급서를 애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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