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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비화] 장정구를 세계챔피언으로 만든 사나이 ‘국가대표 장흥민’

--조영섭 복싱

by econo0706 2022. 11. 11.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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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3.  26

 

지난 주말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LF급 국가대표 출신의 장흥민이 경북 안동에서 상경해 해후했다. 사연인즉 지난달 아시아투데이에 필자가 기고한 한국체대 은사인 페스탈로치 박형춘 선생의 칼럼을 커다란 액자로 제작해 전달하기 위해 승용차를 몰고 온 것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란 말이 생각난다. 임금·스승·아버지의 은혜는 다 같다는 뜻이다. 팔순의 노스승에게 이순(耳順)이 훨씬 넘은 제자가 큰절을 올리며 액자를 전달하는 모습은 요즘 같은 척박한 현실에 큰 감동을 전했다.

 

▲ 장흥민(왼쪽)과 스승 박형춘 선생  / 조영섭 관장


장흥민은 1957년 부산태생이다. 중학교 때 사업하던 부친을 따라 상경한 그는 1974년 3월 서대문의 일반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제기동에 있는 경동체육관에 입관, 복싱을 수련했다. 경동체육관은 최만성, 강흥원, 황철순, 이필구, 김인창 등 역대급 복서들이 포진된 명문체육관이었다. 장흥민은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고 싶어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란 생각에 과감히 궤도를 수정, 1975년 복싱 명문 한영고에 재입학했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 해 제7회 학생신인대회 결승(코크급)에서 서울체고 김철규에 판정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학생선수권에도 나섰으나 결승에서 부산 극동체육관 이영래 사범의 수제자 박인태(동아고)의 칼날 같은 스트레이트를 허용하고 패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것을 체득했다.

 

▲ 서울체고 김철규에 승리하는 한영고 장흥민(오른쪽)  / 조영섭 관장

 

복싱선수의 스트레이트 펀치는 초속 8m로 추산된다. 1m 내외의 접근전에서 내뻗는 상대의 펀치를 잘 피하느냐에 따라 승부의 향방이 갈라진다. 이를 패배를 통해서 터득한 그는 이후 공수에서 균형잡힌 복서로 거듭 태어났다. 1976년 제26회 학생선수권 결승에서 서울체고 김철규와 또다시 맞대결을 펼쳐 우승을 차지한 후 1977년 김명복배와 대통령배 마저 휩쓸며 국내 톱복서로 입지를 구축했다. 그 해 제27회 학생선수권을 앞두고 경흥체육관에서 훈련하던 어느 날 장흥민에 세차례 맞대결 끝에 패한 김철규가 불쑥 나타났다. 이번 대회에 한번 양보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부탁도 하는 사람이 힘이 있으면 강요가 되지만 힘이 없으면 무시 당하는 법이다. 김철규는 후자에 속하는 복서였다. 하지만 장흥민은 흔쾌히 허락하고 부상을 핑계로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김철규는 무적함대 장흥민이 빠진 제26회 학생선수권 LF급에서 금메달을 획득과 함께 서울체고는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 우승으로 김철규는 한국체대에 진학하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진정으로 용기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맨 나중에 생각하는 것이다, 둘은 1978년 나란히 한국체대에 입학했다. 그 해 김명복배에서 LF급에서 장흥민이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로 선정되었고 F급에선 김철규가 우승하면서 체급별로 사이좋게 우승을 나눠가졌다

또 뉴욕에서 벌어진 제1회 월드컵 대회에서도 장흥민은 F급에서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지만 개인사정으로 출전하지 않고 친구 김철규에게 양보했다. 김철규는 당당히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졸업 후 김철규는 체육교사로 발령이 나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성공은 나누는 것이다. 커다란 행복을 혼자서 독차지 하기보다는 작은 행복을 여러사람이 나누어 갖는 것이 훨씬 더 값어치 있지 않을까. 1979년 12월 장흥민은 모스크바올림픽 2차선발전 LF급 준결승에서 부산 극동의 장정구와 맞붙는다. 장흥민의 노련한 복싱과 만 17세의 복싱 신동 장정구와의 대결은 예상 외로 접전이 펼쳐졌지만 장흥민의 판정승이었다. 결승에서 충남 종합체육관의 한정훈을 꺽은 홍진호를 제압했다.

 

▲ 프로 데뷔전을 치르는 장흥민(왼쪽)과 이재훈 트레이너  / 조영섭 관장

 

여기서 잠깐 장흥민과 장정구의 묘한 인연을 살펴보자. 장정구는 장흥민과 경기결과에 대해 국가대표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이 승패를 갈랐다고 회고했고 장흥민은 당시 정구는 나이에 비해 세련된 복싱을 구사했지만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1980년 전국체전 부산 선발전에서 장정구는 김재홍, 김상찬, 최연갑을 누르고 부산대표로 선발됐다. 하지만 부산체육회에서는 선발전에 출전하지도 않은 장흥민을 전격적으로 등록시키고 장정구를 탈락시켰다. 1979년에도 부산대표로 선발된 장정구는 김재홍에 밀려 탈락한 전례가 또다시 반복되자 결국 아마추어 복싱 부산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다는 생각에 프로로 전향했다.

장정구는 장흥민에게 당한 1패가 복싱인생에 전환점이 되면서 결국 1980년 11월 MBC신인왕전을 통해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장흥민이 1983년 프로에 데뷔해 단 한차례 경기를 국제경기로 치러 판정승을 거둔 후 곧바로 은퇴를 선언해 버린데 반해 장정구는 1983년 세계정상에 올라 불멸의 15차방어의 대업에 성공하며 WBC에서 선정한 최우수복서로 뽑혀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국내 최고의 복서로 주목을 받았다.

 

▲ 1979년 아마추어 복서로 활동할 때 장정구  / 조영겁 관장

 

두 복서가 프로에서 명암이 갈린 것은 열정의 차이였다. 칼이 녹슬어서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쥐고 있는 사람의 의지가 사라졌을 때 칼의 가치가 사라지듯이 활화산처럼 불타는 투지로 중무장한 장정구에 비해 장흥민은 차갑게 식어버린 열정으로 인해 복싱을 접었다.

장흥민은 소탈하다. 25년 전 구입한 조그만 아파트에서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다.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검소한 복싱인이다. 그는 “복싱을 통해 한국체대에 진학하면서 국가대표로 활동했고 군대면제도 받았다. 교직에도 34년간 봉직하면서 결혼도 했고 자녀들도 출가시켰다. 그리고 노후에 연금만으로도 풍족하게 살 수 있으니 감사한 마음 뿐”이라고 말한다. 그를 보면 인생은 매 순간이 선물인 것 같다. 나쁜선물은 공부가 되고, 좋은선물은 감사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말이다.

 

조명섭 /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아시아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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