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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형 농구

  • [나의 삶 나의 농구] ㉘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2023.02.16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㉗ 뒤늦게 도전한 석·박사 학위

    2023.02.16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㉖ 필리핀의 농구사랑

    2023.02.15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㉕ 지금도 흐뭇해지는 팬들의 마음

    2022.11.20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의전 담당

    2022.11.20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㉓ 사우디에서의 지도자 생활

    2022.11.20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㉒ 쿠웨이트 농구 코치가 되다

    2022.11.19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㉑ 농구코트 위 엔테베 작전

    2022.11.19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⑳ 1970년, 농구 대 축구 술 마시기

    2022.11.18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⑲ 2002 한일 월드컵축구대회 조직위원회

    2022.11.18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⑱ 그리스국제올림픽 아카데미를 가다

    2022.11.18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⑰ 히딩크 같은 지도자를 만나다

    2022.11.17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⑯ 비난받는 자리, KBL 심판위원장

    2022.11.17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⑮ 제2의 인생, 농구해설가

    2022.11.15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⑭ 해군 군함에 몸을 싣고

    2022.11.13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⑬ 1977년 쿠알라룸프루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2022.11.13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⑫ 1975년 방콕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2022.11.12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⑪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2022.11.12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⓾ 한국농구의 천적 필리핀

    2022.11.12 by econo0706

  • [나의 삶 나의 농구] ⑧ 1970 방콕 아시안게임

    2022.11.11 by econo0706

[나의 삶 나의 농구] ㉘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2023. 02. 15. 내 마음도 젊어진 청소년수련관 2005년부터 9년간, 송파구 구립 마천 청소년수련관장을 역임했다. 남한산성 등산로 입구에 있는 5층 건물로 교실(2, 3층)과 도서관(4층), 강당(5층)이 있다. 도서관장직도 맡았다. 송파구청 예산으로 거여, 마천동 지역 저소득층 학생들을 교육하는 장소다. 초· 중등 학생들이 학교 과정을 마친 후 수련관에 와서 방과 후 수업을 받는 곳이다. 매일 200여 명의 꿈나무와 대면하는 것이 보람 있고, 자랑스러웠다. 국, 영, 수를 비롯하여 원어민 영어교실, 체험학습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저소득층은 무료지만, 일반 학생은 수강료를 낸다. 방학 기간은 종일 수업하고 점심까지 제공한다. 특별활동으로 수영, 스키, 농구, 농촌체험 등이 있다. 인근..

--유희형 농구 2023. 2. 16. 19:57

[나의 삶 나의 농구] ㉗ 뒤늦게 도전한 석·박사 학위

2023. 01. 16 “고려대 출신이죠?” 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려대학교에 진학 못 한 아쉬움을 늘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나를 고려대 출신으로 알고 있었다. 인천 송도고 출신 선수 대부분이 고려대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고려대 나왔죠?”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단국대 나왔는데요!” 대답할 때마다 부아가 났다. 1990년대 중반, 친분이 있는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로부터 대학원 진학 권유를 받았다. 석사과정이었다. 자신이 없었지만, 간곡하게 권하는 그분의 성의에 마음이 움직였다. 늦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 다짐하고 준비했다. 합격했다. 수업은 야간에 있었다. 주 3일 강의를 빠짐없이 참석했다. 원생 20명 중 최고령으로 원우회장을 맡았다. 석사과정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체육 관련 학문..

--유희형 농구 2023. 2. 16. 00:28

[나의 삶 나의 농구] ㉖ 필리핀의 농구사랑

2022. 12. 06. 필리핀의 국민 스포츠 필리핀은 농구의 나라다. 인구 1억 명이 넘는 필리핀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가 농구다. 직접 경기를 하면서 즐기기도 한다. 부잣집 마당과 공터에는 어김없이 농구대가 세워져 있다. 나무로 된 낡은 골대지만, 모이면 편을 갈라 경기를 한다. 그들은 대화도 늘 농구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 같은 사람은 금방 친구가 된다. 자국의 농구선수는 물론 미국 NBA, 외국의 유명 선수 신상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한국에서 온 농구선수라고 소개하면 바로 ‘신동파’하고 외쳐댄다. 필리핀 사람들의 농구사랑은 상상을 초월한다. 외국인인 신동파 씨가 여러 해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스타로 선정된 적이 있을 정도로 농구 사랑엔 국경이 없다. 필리핀 국회의장이 한국을 방문하면..

--유희형 농구 2023. 2. 15. 20:46

[나의 삶 나의 농구] ㉕ 지금도 흐뭇해지는 팬들의 마음

2022. 11. 08 그 시절에 인기스포츠는... 국가대표선수 시절 여성 팬이 많았다. 팬레터와 함께 선물도 과분하게 받았다. 나의 전성시대였던 60~70년대 팬은 주로 여고생이었다. 명문고 학생들이 많았고, 대부분 학교 성적이 우수한 모범생들이었다. 집과 학교만 오가는 공붓벌레로 가정이나 학교에서 시험압박에 시달렸지만, 풀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오가는 길에 보았던 YMCA 체육관을 방문했다가 난생처음 농구시합을 관전,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빠져들어 곧바로 농구 팬이 되곤 했다. 일부는 모교 팀 응원하러 갔다가 농구 좋아하는 학생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 인기 스포츠는 농구와 축구, 프로레슬링, 복싱이었다. 야구는 고등학교 경기가 인기가 있었다. 실업 야구는 관중이 없었다. 동대문야구장에 ..

--유희형 농구 2022. 11. 20. 19:50

[나의 삶 나의 농구] 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의전 담당

2022. 10. 06. ‘이기는 곳’만 찾아다닌 VIP의전 미국에서 개최된 제26회 애틀랜타올림픽은 1996년 7월 19일부터 8월 4일까지 열렸다. 전 세계 197개국에서 1만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생소한 국가도 많았다. 동유럽에서 분리 독립한 나라가 30여 개국이나 되었다. 우리나라는 15개 종목 503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성적은 금 7개로 10위를 했지만, 은메달이 15개였다. 손안에 들어왔던 금을 놓친 아쉬운 경기가 많았다. 유도에서는 3초를 버티지 못하고 지도를 받아 패하기도 했다. 나는 문화체육부에서 본부 임원으로 파견되었다. 선수단에 대한 지원, 관리 등이 나의 업무였지만, 가장 어렵다는 VIP 의전을 맡았다. 경기와 관련된 모든 것은 대한체육회가 주관한다. 애틀랜타올림픽에는 유난히..

--유희형 농구 2022. 11. 20. 17:05

[나의 삶 나의 농구] ㉓ 사우디에서의 지도자 생활

2022. 09. 06. 쿠웨이트에서 이란으로 2년간 쿠웨이트 코치 생활을 끝내고, 좋은 조건을 제시한 사우디아라비아로 자리를 옮겼다. 80년 6월이었다. 제다시에 있는 ‘에티하드’ 스포츠클럽으로 왕족이 후원하는 부유한 클럽이었다. 사우디는 모슬렘 국가 중 가장 율법이 엄한 나라이다. 도둑질하면 손목을 자르고, 살인, 강도, 성폭행범을 공개 처형하는 나라다. 여성은 운전할 수가 없고, 외출할 때는 얼굴과 몸을 가려야 한다. 여가문화를 위한 놀이시설이나 극장, 공연장이 전혀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술을 범죄로 다스리는 나라다. 술집은커녕 술 먹는 자체가 죄가 되는 곳이다. 외국인도 술 마신 것이 적발되면 1개월간 감옥에 있다가 곤장을 맞고 추방당한다. 사우디 인구가 1000만 명이었는데, 왕자가 1000명..

--유희형 농구 2022. 11. 20. 11:16

[나의 삶 나의 농구] ㉒ 쿠웨이트 농구 코치가 되다

2022. 08. 05. 쿠웨이트로 향한 이유 1978년 3월 태릉선수촌에서 아시안게임 대비 강화훈련을 하던 중 급성간염으로 입원했다. 곧바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간염은 과로와 술을 조심해야 하고, 재발하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다. 당시 소속은 전매청, 공무원 신분에 급여가 너무 낮았다. 은행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저축은 고사하고 생활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여자농구팀에서 코치직 제안도 있었지만, 지도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없었다.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이유는 술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술을 권한다.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간을 보호하기 위해 술이 없는 중동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쿠웨이트에서 코치 제안이 왔다. 스포츠클럽이었다. 중동 국가는 정부에서..

--유희형 농구 2022. 11. 19. 22:43

[나의 삶 나의 농구] ㉑ 농구코트 위 엔테베 작전

2022. 07. 19. 기업팀의 농구단 창단, 스카우트 전쟁 시작 1960-70년대 우리나라 남자 농구팀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기업은행, 전매청, 4개뿐 이었다. 재벌이나 대기업이 없던 시절, 스포츠 육성은 정부 기관과 국영 기업체가 전담했다. 심지어 국세청, 상공부에도 운동부가 있었다. 전매청과 철도청은 6, 7개 종목을 육성했다. 직원 수가 많은 공기업에 정부가 반강제로 운동팀을 운영케 한 것이다. 그 후 경제가 나아지고 재벌이 생겨나면서 대기업이 스포츠팀을 창단하기 시작했다. 기업 이미지와 상품 홍보에 효과가 크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1978년 재벌 1, 2위 삼성과 현대가 남자농구를 동시에 창단했다. 이때부터 남자 농구선수들은 살판이 났다. 몸값도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두 재벌 간의 양..

--유희형 농구 2022. 11. 19. 11:56

[나의 삶 나의 농구] ⑳ 1970년, 농구 대 축구 술 마시기

2022. 06. 13 농구 앞을 막아선 축구 우리나라 남자농구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부터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까지 3년간 전성시대를 누렸다. 필리핀, 일본, 대만, 이스라엘이 우승을 다투던 때였지만, 3년간 승자는 한국이었다. 이스라엘은 유럽에서 버림받고, 1974년까지 아시아로 출전했다. 농구가 강했다. 1966년과 1974아시안게임에서 1위를 했다. 그 후 중국의 등장과 중동국가 반대로 축출당하며 아시아 무대에서 사라졌다. 남자농구가 이룩한 1969년 아시아선수권, 1970년 아시안게임 우승은 유사 이래 처음이어서 국민으로부터 열렬한 관심과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특히 강적 이스라엘을 꺾고 따낸 금메달이어서 더욱 값진 것이었다. 그런데 남자농구가 우승할 때마다 축구가 찬물을 뿌렸다. 19..

--유희형 농구 2022. 11. 18. 23:36

[나의 삶 나의 농구] ⑲ 2002 한일 월드컵축구대회 조직위원회

2022. 05. 05 “농구한 놈이 왜 축구판에 와서 설쳐!” 1996년 5월, 2002 월드컵축구대회 개최지가 발표됐다. 치열하게 유치경쟁을 했던 한국과 일본 공동 개최로 결정되었다. 양국에 명분을 준 것이다. 대회 준비를 위한 조직위원회가 출범했다. 초대 위원장에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이 선임됐다. 6개월 후 이 위원장이 사퇴하고 박세직 씨가 위원장에 취임했다. 서울올림픽을 준비했던 경험과 능력을 고려한 임명이었다. 문화체육부에서 조직위로 파견된 나는 박 위원장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그 후 의전 부장, 등록본부장을 맡아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해 8월까지 근무했다. 그곳에서 마음고생도 많았고, 육체적 고통도 심했다. 축구인들로부터 미움을 많이 받았다. 농..

--유희형 농구 2022. 11. 18. 13:40

[나의 삶 나의 농구] ⑱ 그리스국제올림픽 아카데미를 가다

2022. 04. 11. 올림픽의 시초,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발상지는 그리스다.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처음으로 개최됐다. 육상 한 개 종목이었다. 그 후 달리기, 레슬링, 복싱, 승마 등의 경기가 추가되어 4년 주기 올림픽의 기원이 되었다. 근대 올림픽은 프랑스 교육학자 피에르 데 쿠베르탱이 자국 청년들의 신체단련과 스포츠 경쟁을 통한 교육을 목적으로 시작했다. 프랑스 국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범위를 전 세계로 확대, 스포츠 제 전을 통한 청소년들의 우정과 화합을 도모하는 의미의 올림픽을 창안한 것이다. 1894년 IOC가 만들어졌고,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됐다. 매년 6월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IOC가 주최하는 국제올림픽 ..

--유희형 농구 2022. 11. 18. 09:40

[나의 삶 나의 농구] ⑰ 히딩크 같은 지도자를 만나다

2022. 03. 07 평생의 스승 농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많은 지도자를 만났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분이 있다. 전규삼 선생님과 미국인 제프 가스폴(Jeff Gausepohl)씨다. 인천 송도 중· 고등학교 6년간 코치였던 전 선생님은 농구뿐만 아니라 인성교육과 함께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셨던 내 인생의 소중한 멘토였다. 가스폴 코치는 협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를 첫 대표선수로 뽑아준 분이다. 멕시코올림픽에서는 모든 경기에 베스트 멤버로 기용해 주었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나는 많은 경험을 쌓았고, 10년간 부동의 국가대표 주전 가드로 활약했다. 2002 월드컵에서 명감독 거스 히딩크를 만나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박지성 선수처럼 나도 가스폴 코치 덕분에 일찍 날개를 펼..

--유희형 농구 2022. 11. 17. 18:59

[나의 삶 나의 농구] ⑯ 비난받는 자리, KBL 심판위원장

2022. 02. 18. 비난 받는 자리 KBL(남자프로농구연맹)에서 심판위원장직을 두 차례 역임했다. 욕도 많이 먹었다. 그 자리는 어차피 비난받는 자리다. 2003년 첫 심판위원장을 맡았다. 심판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려고 노력도 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컴퓨터 배정도 시행해 보았다. 하지만 지탄받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맡은 시즌에 심판 관련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심판의 미숙한 운영과 구단의 승리욕이 빚어낸 결과였다. 경기가 끝나면 패한 팀은 심판 판정이 불공정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점수 차이가 근소할 때는 불만의 강도가 심할뿐더러 패배 이유를 심판에게 돌리기도 한다. 임원과 감독이 패배의 책임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서다. 경기를 마친 후 패한 팀에서 심판설명회를 요청한다. 오심 상황..

--유희형 농구 2022. 11. 17. 13:54

[나의 삶 나의 농구] ⑮ 제2의 인생, 농구해설가

2022. 01. 05. 초유의 방송 2개사 동시 해설 1984년 5월부터 KBS에서 농구 해설을 시작해 1997년 남자농구가 프로화되면서 그만두었다. KBS는 계속하기를 원했지만, 공무원 신분(체육부 서기관)으로 프로스포츠 해설에 대한 내부의 거부감이 있었다. 해설자 마이크를 내려놓을 때 아쉬움도 있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농구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고 팬들의 사랑을 원 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좋다. 명쾌하다, 설명을 쉽게 한다.’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미움을 받은 적도 많이 있었다. 패한 팀의 관계자로부터 편파적 해설을 했다고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해설 멘트는 이기고 있는 팀 위주로 하게 되어있다. 지고 있는데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패한 분풀이를 해설자에게 하는구..

--유희형 농구 2022. 11. 15. 21:37

[나의 삶 나의 농구] ⑭ 해군 군함에 몸을 싣고

2021. 12. 06. 2개월 늦춰진 제대 국가대표 농구선수 시절 항공료가 없어 대형 수송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전지훈련 갔던 추억이 있다. 호텔에 묵지 못하고 민박을 하고 장시간 버스로 이동하는 고생을 했지만 국가가 가난했기에 감수했다. 그 후 1974년 12월 해병대 농구단에 몸담고 있던 시절 공교롭게도 해군 군함을 타고 50일 동안 동남아를 원정 가야만 했다. 고난의 전지훈련이었다. 방문국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대만 4개국. 해군사관생도 졸업 훈련코스인 해양훈련단에 해병대 농구팀을 포함시킨 것이다. 만기제대를 코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나는 대학교 때문에 입대가 늦었다. 1972년 2월 해병대 농구팀에 들어갔다. 당시 군 팀에 입소하면 훈련소에 며칠 머물다 군번 받고 상경하면 되는데 운..

--유희형 농구 2022. 11. 13. 22:56

[나의 삶 나의 농구] ⑬ 1977년 쿠알라룸프루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2021. 11. 05 마지막 국제대회, 혼신을 다하다! 제9회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가 1977년 11월 28일부터 12월 10일까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렸다. 아시아 12개국이 참가했다. 나에게는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마지막 대회였다. 연장자인 내가 주장을 맡았다. 8회(1975년) 대회까지 팀을 지휘했던 김영기, 이인표 씨가 물러나고, 이경재, 김인건 씨 체재로 바뀌었다. 이경재 씨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 이후 9년 만에 돌아왔고, 김인건 선배가 처음으로 대표팀 코치를 맡았다. 선수는 나를 비롯해 강호석, 이광준, 김동광, 박형철, 정영수, 박상웅, 박수교, 김인진, 박인규, 진효준, 김형년이었다. 주장의 책임감 태릉선수촌에서 강화훈련을 시작했다. 순탄치가 않았다. 음주 관련 잡음이 ..

--유희형 농구 2022. 11. 13. 10:14

[나의 삶 나의 농구] ⑫ 1975년 방콕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2021. 10. 06 난장판이 된 코트 제8회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가 1975년 11월 15일부터 26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개최됐다. 방콕은 6년 전 우승을 경험했던 곳이다. 김영기 감독, 이인표 코치에 곽현채, 유희형, 이자영, 강호석, 황재환, 이광준, 김인진, 김동광, 이보선, 신선우, 박형철, 김형년으로 구성되었다. 1년 전 테헤란 아시안게임 멤버와 함께 김형년과 신선우가 새로 발탁됐다. 세 번째 아시아 정상 도전이었지만, 중국의 벽은 너무 높았다. 평균신장이 커졌고, 2m대의 선수가 외곽 슛까지 겸비했다. 190cm의 우리 팀 센터진이 2m 10cm가 넘는 중국팀 장신선수의 골 밑 플레이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외곽슛 공세도 무서웠다. 중국에 많은 점수 차로 패했다. 1974년 아시아 무대에 처..

--유희형 농구 2022. 11. 12. 22:49

[나의 삶 나의 농구] ⑪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2021. 09. 06. 올림픽이 여러 번 중단된 적이 있었다. 모두 전쟁 때문이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1948년 런던에서 올림픽이 재개됐다. 이후 어김없이 4년마다 열렸다. 우리나라도 런던대회부터 출전했다. 올림픽 유치도 치열해졌다. 1988년 서울로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치러내기도 하였다. 베일에 쌓인 중국, 북한의 등장 철의 장막 속에 있던 중국과 북한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처음 등장했다. 그 이전에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아시아 최초로 열린 1964년 도쿄올림픽도 불참했다. 당시 우리는 중국과 북한을 중공, 북괴라고 호칭했다.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1974년 9월 1일부터 16일까지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아시아 25개국, 300..

--유희형 농구 2022. 11. 12. 19:13

[나의 삶 나의 농구] ⓾ 한국농구의 천적 필리핀

2021. 08. 01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ABC)는 2년마다 개최된다. 제7회 대회가 1973년 1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다. 일본에서 열렸던 전 대회 성적이 저조했기 때문에 한국 농구의 자존심을 찾는 중요한 대회였다. 홈팀인 필리핀과 결승전을 펼쳤으나 패하여 2위를 했다. 농구의 나라에서 필리핀을 꺾는다는 것은 히말라야 정복보다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발을 구르고 고함을 치는 관중의 함성에 심판 호각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혼을 빼놓는 광적인 응원에 기가 죽어 제대로 플레이를 할 수가 없었다. 심판도 넋이 나가 덩달아 춤을 춘다. 웬만한 파울은 불지도 않는다. 남자농구, 자원외교사절단으로 활약 일정상 악재도 있었다. 정부 방침에 따라 남자농구대표팀이 석유확보를 위한 자원외교사절단으로..

--유희형 농구 2022. 11. 12. 14:27

[나의 삶 나의 농구] ⑧ 1970 방콕 아시안게임

2021. 07. 05 "태국 텃세 극복하고 이스라엘까지 잡았다"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70년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열렸다. 원래 우리나라가 개최하기로 했던 대회인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의 이유로 개최권을 반납했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4년 전 아시안게임을 개최했던 태국에 개최를 권유했다. 그러한 이유로 방콕에는 선수촌이 없었다. 대신 참가국마다 호텔을 하나씩 배정해 주었다. 우리나라 선수단은 방콕 시내에 있는 마노라 호텔을 숙소로 사용했다. 아시아 45개국 중 18개 나라가 참가했다. 당시 중동국가 대부분이 참가하지 않았다. 스포츠 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총 13개 종목 2,5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우리나라는 172명(선수 131명, 임원 41명)..

--유희형 농구 2022. 11. 11.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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