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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所有] 책(冊) 속에 길이 있다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5.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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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얼마 전에 제가 사는 오두막 방을 뜯어 고쳤습니다.
 
방을 고친 지 오래됐고 또 서툴게 고쳐서 그동안 불이 잘 안 들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굴뚝으로 나가는 연기 보다 아궁이로 나오는 연기가 더 많을 정도였고 방바닥에도 많은 틈이 생겨서 새로 고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굴뚝과 아궁이의 위치를 정반대로 바꿨더니 불이 제대로 듭니다.

 

그 뒤 도배를 했는데 20일이 넘도록 가구 등을 일체 들여놓지 않은 빈방에서 방석 하나만 깐 채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텅 빈 공간이 좋아서 아직 그대로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빈방으로 놓아둘 수는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구를 들여놓겠지만 될 수 있으면 그 기간을 연장해서 빈방인 채로 더 있고 싶습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혼자서 빈방에 남게 됩니다. 살만큼 살다가 몸이 굳어지면 빈방에 홀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곳이 관속이든 무덤 속이든 홀로 빈 공간에 남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부장품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미리부터 빈방에 홀로 있는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을 가져 보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이 다음에 홀로 있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은 여럿이 어울려 살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홀로 있는 것입니다. 가족끼리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써 공동체 안에 살더라도 홀로 있는 것입니다. 홀로 있음으로써 이웃과의 관계가 새삼스럽게 보입니다. 늘 얽혀 있으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도 안되고 이웃과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텅 빈 데서 오는 충만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새로 이사할 집에서 아직 가구를 들여놓지 않고 빈방에 앉아보십시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저것 걸리적거릴 게 없기 때문에 신경쓸 데가 없습니다. 물론 늘 그렇게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때로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라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과 같은 어려운 시기는 우리가 처음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누군가가 겪어왔던 일들입니다. 그것이 갑자기 우리 앞에 닥쳐왔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당황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어려움이 닥쳐올수록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안으로 삶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토인비가 지적한 것처럼 끝없는 도전 속에서 그에 대처하는 응전應戰으로 발전해 온 것입니다. 현재의 경제 위기도 그런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일깨우라는 표식일 수 있습니다.

 

세월은 한결같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고정불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늘 변합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 어려운 일도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된다면 개인이고 사회이고 생기를 잃고 타락해 갑니다. 우리 시대의 이와 같은 어려움은 이 우주가 우리에게 안겨준 메시지라고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버릴 것 안 버릴 것 가리지 않고 막 버리면서 아깝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미국식 산업구조를 성장모델로 삼아왔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벽에 부딪힌 것입니다. 선진국 대열에 끼었다고 해서 OECD에 가입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로비를 해가면서 가입했습니다. 이때 일부에서는 우리의 경제가 OECD에 가입할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이르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에서는 '신한국, 신경제'를 세계시장에 과시하기 위해 무리를 해가면서 OECD에 가입했습니다. 그 결과 금융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교활한 외국자본이 마음놓고 들어와 우리의 금융시장을 완전히 교란시킨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탐욕의 시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이 채울까 혈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 차지하고 채우고 앞서며 이기는 것만 가지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가졌던 것을 줄 수도 있어야 하고, 차지했던 것을 내 놓을 수도 있어야 하며 채웠던 것을 텅 비울 수도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앞서면 어떻게 됩니까. 뒤쳐지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이기기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때로는 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을 조화롭게 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이루어진 이 지구촌에서 100살도 못사는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늘 공허한 상태입니다.

 

자원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와서 얼마나 많은 자원을 탕진하고 허물고 소비합니까. 오늘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경제 뿐만은 아닙니다. 인간존재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저 입만 벌리면 경제, 경제 하는데 그것은 한 부분입니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보다 훨씬 적게 가졌으면서도 잘 살아왔습니다. 착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며 알뜰살뜰하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많은 것, 큰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그걸 잘 활용할 줄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새롭게 자기 삶을 정립해야 합니다.

 

오늘의 어려움에 우리가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기가 죽으면 다른 일도 안 됩니다. 전 생애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닥친 이와 같은 시련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IMF사태 이전처럼 살아갔더라면 우리는 어디까지 타락했겠는지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남의 빚더미 위에 앉아서 마치 선진국 대열에 낀 것처럼 착각하지 않았습니까. 국내외로 다니면서 그렇게 낭비하고 과소비를 하고 추태를 연출했는데 이제 이런 계기를 통해서 뭔가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고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모진 마음을 먹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 풀립니다. 남을 미워했던 사람도 그 미움이 자기 자신을 괴롭히니까 스스로 그 마음을 버리게 됩니다. 이 변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고 가야 침몰하지 않습니다.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침몰한 잠수정 신세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뉴스를 듣고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 영감靈感을 얻었습니다. 사람을 살상하는 잠수정이 꽁치 그물에 걸려서 꼼짝 못했습니다. 꽁치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고 있습니까. 그런 무기들조차 전혀 예상치 않았던 꽁치그물에 걸려 침몰한 것입니다. 변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하면 그렇게 침몰하고 맙니다.

 

넘치는 물량에만 현혹되어서 우리는 그 동안 절제의 미덕을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우리 할머니·할아버지, 어머니·아버지 시대에는 조그만 것을 가지고도 절제를 했습니다. 넘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때에 와서 절제의 미덕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난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볼 때가 되었습니다.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해야 할 맑은 가난입니다. 그것은 빈곤이 아니라 절제된 아름다움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부자로 살기 보다 가난하게 살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가난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선진국 국민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이겨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당연한 일인데 그동안 너무 흥청망청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치뤄야 할 값도 치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많고 큰 것만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는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우리 조상들은 가난 속에서도 도락道樂과 풍류風流를 잃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가난을 풍류로까지 승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옛 시조에 보면 가난을 풍류로 승화시킨 노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꼭 돈을 들여야만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는 풍류의 무한한 소재인 자연이 있습니다. 산과 바다가 있고 강이 있습니다. 달과 별과 구름이 있습니다. 나무와 꽃과 맑은 바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가슴만 활짝 열면 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우리 한국인의 창의력 부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경제도, 축구도 창의력이 부족해서 탈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되풀이와 비슷비슷한 모방, 그것은 창의력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힘을 창의력이라고 합니다. 창의력은 본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탐구하고 추구하는 노력을 통해서 그 바탕이 이루어집니다.

 

한국인의 창의력 부족을 이야기할 때 첫째로 꼽는 게 교육문제입니다. 해방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제도도 계속 바뀌어서 창의력을 기르는 교육을 그동안 못한 것입니다.

 

독창적인 창조 능력은 머리가 비어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빈 머리를 채우는데는 독서만한 것이 없습니다.

 

독서란 무엇입니까. 남들이 오랫동안 겪으면서 축적해온 지혜를 우리가 손쉽게 책을 통해서 자기 삶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낱낱이 이 도시 저 항구로 몇 백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남들이 일찍이 겪으면서 축적해 온 그런 지혜를 책을 통해 자기 삶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을 키우면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게 바로 독서입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명언입니다. 분명히 책 속에 길이 있습니다.

 

송나라 때 시인이며 서화가인 황산곡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장부가 사흘 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스스로 깨달은 언어가 무의미하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추해진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옛사람의 서화를 대하면 얼굴에 끼는 속기俗氣를 털어낼 수 있다."

 

흔히 책에서 오는 기를 서권의 기[書卷氣]라 하지 않습니까. 서권기란 독서에서 얻어지는 기개와 기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글씨와 그림에 서권기가 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이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명화와 글씨를 날마다 대하며 감상함으로써 그것을 창조했던 그 인격이 옮겨와서 내 자신의 서권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독서하던 태도를 이 자리에서 함께 음미해 보고 싶습니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 선생은 독서량이 굉장합니다. 최근에 제가 문헌을 이것저것 들춰보고 있는데 [한정록閑情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독서에 대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독서에는 독서하기 좋은 때가 있다. 위 나라의 동우라는 사람은 삼여三餘의 설을 들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있음직한 이야기입니다.

 

"밤은 낮의 여분이고, 비오는 날은 맑은 날의 여분이며, 겨울은 한 해의 여분이다. 이 여분의 시간에 일념으로 집중하여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농경사회에서는 밤과 비오는 날에는 들에 나가서 일 할 수 없기 때문에 집에서 책을 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겨울철에는 일을 다 해놓고 차분히 집에 앉아 독서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뜻으로 삼여의 시간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세 가지 말하고 있습니다.

 

"맑은 날 밤에 고요히 앉아 등불을 밝히고 차를 달이면 온 세상은 죽은 듯 고요하고 이따금 멀리서 종소리 들려온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책을 펴들고 피로를 잊는다."

 

밤새워 독서를 했기 때문에 새벽 세 시에 범종 치는 소리가 들려왔는가 봐요. 이와 같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책을 펴들고 일상생활에 묻었던 피로를 잊는다는 것입니다.

 

"비바람이 길을 막으면 문을 닫고 방을 깨끗이 청소한다. 사람의 출입은 끊어지고 서책은 앞에 가득히 쌓여있다. 아무 책이나 내키는 대로 뽑아든다. 시냇물 소리 졸졸 들려오고 처마밑 고드름에 벼루를 씻는다. 이처럼 그윽한 고요가 둘째 즐거움이다."

 

책만 읽는 것이 아니고 책을 읽을 때의 어떤 풍류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 잉크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붓으로 메모도 하고 그랬던가 봅니다.

 

"낙엽이 진 숲에 한 해는 저물고 싸락눈이 내리거나 눈이 깊이 쌓였다. 마른 나무가지를 바람이 흔들며 지나가면 겨울새는 들녘에서 우짖는다. 방안에 난로를 끼고 앉아있으면 차 향기 또한 그윽하다. 이럴 때 시집을 펼쳐들면 정다운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 이런 정경이 셋째 즐거움이다."

 

허균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옛사람들은 독서를 하면서, 오늘 우리처럼 책장만 훌훌 넘기며 내용만 빼는 것이 아니라 독서하는 분위기, 자연과의 교감, 다시 말해 독서를 통해서 아직 활자화되지 않은 여백까지도 읽어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풍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인격이 제대로 닦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독서의 분위기라든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책밖에 들어있는 그 소식까지도 우리가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책은 안 읽었지만, 산골에 살면서 곁에 책이 있기 때문에 든든할 때가 많습니다. 혼자 살고 있지만 좋은 책들이 있기 때문에 내 스승이 곁에 있고, 내 친구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든든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도 책으로 맺어진 인연입니다. 책이란 그런 것입니다. 전혀 낯선 사람도 이렇게 연결시키지 않습니까. 동서고금의 어떤 작가와 작품을 대한다 하더라도, 오늘 나와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이란 이처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좋은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제 산중생활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도 책을 읽는 재미에 있습니다. 물론 독서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낮에는 이것저것 밭도 가꾸고 일을 하다가 저녁에 등불을 켜놓고 책을 몇 장이라도 읽고 있으면 매우 좋습니다. 새책을 읽을 때는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다시 볼 때에는 옛친구를 만난 것 같습니다.

 

같은 책도 읽는 때와 장소에 따라 그 감흥이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경험담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 글을 유배지의 현장인 강진의 다산초당에 가서 읽어보십시오. 집에서 읽는 것과 그 감흥이 전혀 다릅니다.

 

고산 윤선도 선생의 [어부사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을 보길도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읽어보십시오. 아파트 몇 동 몇 호에서 읽는 것과는 그 감흥이 전혀 다릅니다.

 

저는 국내에서도 그렇고 여행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책을 몇 권 가지고 나갑니다. 인도 불교 유적지를 순례할 때도 책을 몇 권 가지고 나갔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은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가서 부처님이 설법했던 [숫타니파타]라는 초기 경전을 읽으니까 마치 부처님의 육성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는 느낄 수 없었던, 머리로만 받아들였던 그런 법문이 그 현장에 가서 들으니까 전류를 느끼게 합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도시에서 읽을 때는 감흥이 별로였는데 산골 오두막의 겨울 난롯가에서 읽으면 그렇게 좋습니다. 물론 저도 보스톤에 갔을 때 '월든'이라는 그 작은 호숫가를 들러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스스로 머릿속으로 그렸던 현장을 목격하면 책에서 읽었던 감흥과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자와의 교감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책[良書]은 베스트셀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스트셀러는 한때입니다. 말하자면 베스트셀러가 모두 좋은 책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좋은 책은 세월이 결정합니다.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있는 책들은 모두 세월이 결정해 준 것입니다. 세월의 체에 걸러져서 남은 책들이 바로 양서입니다. 그런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그리고 읽는 사람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합니다.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사실 한 번 읽을 가치도 없습니다.

 

독서인은 양서良書와 비양서非良書를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양서와 비양서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 독서인입니다.

 

또한 책을 읽을 때는 느긋하게 읽어야지 조급하게 건성으로 읽지 마십시오.

 

조선조(16세기)에 지리산에서 사시던 청매 선사의 글 중에 '십무익성十無益聲'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열 가지 무익한 노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보면 독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기 마음속에 비춰보지 않으면 그런 독서는 무익하다.[心不觀照無益]"

 

이 말씀은 우리가 책에 읽히지 말고 책을 읽으라는 뜻입니다. 입시생들은 흔히 책에 읽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독서가 아닙니다. 시험을 치고 나면 그냥 잊어버려요. 책을 읽으면서 자기 마음속에 비춰보지 않으면 그런 독서는 무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벌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 책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활자로 나타나지 않은 여백까지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 기댈 곳이 없어서 갈팡질팡 헤맬 때일수록 인간의 지혜가 모인 책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책을 더 읽어야 합니다. 밖의 물결이 거세니까 안으로 탐구하는 길을 스스로 모색해야 합니다.

 

독서를 통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하는 살아있는 기쁨을 누려 보십시오. 그 자체가 삶의 충만입니다. 이것은 방송이라든가 영상매체에서는 누릴 수 없는 활자매체만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창의력이 부족해서 오늘과 같은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하니까 독서를 통해서 창의력을 길러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기죽을 것은 없습니다.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삶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런 지혜를 우리가 받아들여서 오늘을 지혜롭게 산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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