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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GENDS] ⑱ 세계를 감동시킨 순한 흑표범 성정아

---KBL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5.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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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5. 13

 

구김 없는 환한 미소와 뽀얀 피부. 수줍은 많은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는 예전 그대로였다. 성정아의 농구 인생은 화려함과 어두운 그늘이 공존했다. 코트 위 성정아를 기억하는가. 세계가 인정한 수비와 돌파, 패스 능력은 한국여자농구에 구기 종목 최초로 올림픽은메달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현역시절 언제나 붕대로 칭칭 감겨 있던 무릎보호대. 이제는 학생들과도 농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무릎. 그의 파란만장했던 농구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삼천포 ‘전성시대’를 열다


타고난 운동신경이 그를 농구로 불렀다. 어려서부터 달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깡마른 체구에 농구는 상상도 못했다. 농구공 대신 비치볼을 집어든 아이에게 ‘이게 농구다’라고 가르치던 부모. 유독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권유로 농구부에 들어갔지만, 정작 그는 왜 농구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시작한 그가 삼천포여중·고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다.

Q. 농구가 아닌 육상 선수가 될 뻔 하셨다고요?


어려서부터 달리기가 굉장히 빠르고 운동 신경이 좀 타고났었어요.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면 항상 1등이었거든요. 그걸 보시고 엄마가 육상을 시키려고 하셨죠. 그런데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모 친구 분이 육상을 했는데, 정말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육상 대신 농구부가 있던 외가 근처 진주 수정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Q. 농구는 처음이었을 텐데 어땠나요?


아버지가 전자랜드 대리점을 하셨는데, 그 대리점 앞에서 비치볼 같은 것을 던지고 받고 했었어요. 제가 농구를 모르니까 엄마가 ‘이게 농구다’라고 가르쳐주신 거죠. 신기해요. 엄마는 운동도 전혀 안 하신 분인데 왜 저한테 그토록 운동을 시키려고 하신지 모르겠어요. 코치 선생님이 제가 너무 말랐으니까 손목을 잡더니 “이 팔로 어떻게 공을 잡겠냐”며 엄마 손 잡고 병원에 가보라고 농담을 하실 정도였거든요.

Q. 그 팔로 어떻게 농구를 했나요?


농구는 아무 것도 몰랐죠. 오로지 승부욕 하나로 한 것 같아요. 달리긴 잘했으니까 무조건 공을 잡고 앞으로만 뛰어서 속공으로 넣고 오는 거죠. 너무 빨라서 다 뚫었거든요. 경기를 하면 ‘정아한테 공주고 뛰어’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Q. 초등학교 때부터 전학이 잦았어요. 그때부터 스카우트를 당한 건가요?


진주시 초등학교 대회에서 제가 혼자 다 하니까 세상에서 제가 농구를 제일 잘 하는 줄 알았어요. 그때 삼천포초등학교와 붙었는데, 우리 팀이 형편없이 졌어요. 상대가 되지 않았죠. 그 때 삼천포초교 최동권 코치님이 저를 데리고 가서 운동을 시키고 싶다고 하셔서 전학을 가게 됐어요. 삼천포가 더 센 팀이었으니까요. 그때는 진주와 삼천포가 굉장히 먼 거리라 생각해서 최 코치님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운동을 했었죠. 정선민도 그 선생님한테 배웠거든요.

Q.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있어서 힘든 적이 많았겠어요.


삼천포에서는 운동이 너무 힘들었어요. 엄마가 옆에 없으니까 감기몸살이 걸려도 돌봐줄 사람이 없고, 밥도 안 먹고 그랬죠. 그러다 갑자기 시력이 나빠진 거예요. 손바닥 위에 있는 동전도 구별을 못할 정도였죠. 그때 아버지가 대리점 문도 닫고 여기저기 뛰어다니셨죠. 안과에서 시력이 영영 안 돌아올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부산대학병원으로 갔어요. 영양실조였어요. 운동은 힘들고 밥은 제대로 안 먹었으니까요. 15일 정도 치료 후에 제 시력을 찾았죠. 아마 아버지 아니었으면 시력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Q. 진주여중에서 다시 삼천포여중으로 옮겼어요.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게 싫어서 진주여중으로 갔어요. 그런데 농구에 대한 열의 때문에 다시 삼천포여중으로 옮긴 거죠. 그때는 농구 인기가 대단했어요. 굉장히 큰 대회였는데, 저희가 우승을 했죠. 그랬더니 택시도 공짜로 타고, 무단행단을 해도 괜찮고 그랬어요. 하하.

Q. 중학교 팀이었는데, 실력이 어느 정도였기에 ‘삼천포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온 거죠?


중2때 코오롱 실업팀과 시소게임을 했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대표팀이 빠진 태평양도 여전히 잘했는데, 저희가 이긴 적도 있을 정도였어요. 실업팀에서 중학교로 연습경기 하러 왔으니까 대단했죠. 그뿐만이 아니에요. 일본 대학팀들도 모조리 다 이겨버렸어요. 일본 코치가 일본 선수들에게 했던 말이 기억나요. 너희들 좌절하지마라. 너희가 못한 게 아니라 쟤네가 괴물이다.

Q. 특별히 잘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심리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했던 것 같아요. 최동권 선생님이 경기 전날 밤 우리가 자고 있는데 다 깨우시더라고요. 하얀 박하사탕 같은 알약을 12개 꺼내서 선수들에게 하나씩 나눠줬어요. 수소문해서 어렵게 구해온 건데 이것만 먹으면 잘 할 거라고 하시면서요. 저희들은 그 말만 믿고 물과 함께 삼켰죠. 아마 아무 것도 아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들한테는 그런 부분이 상당히 컸던 것 같아요.

Q. 훈련 방식에 있어서 특별한 것은 없었나요?


훈련 방식은 잘 모르겠지만, 농구 경기를 정말 많이 봤어요. 논술 시험을 보듯 쪽지 시험도 많이 봤고요. 존 디펜스 같은 것을 풀어 쓰는 시험이었죠. 경기를 할 때는 코치 눈빛과 사인만 보고 하면 다 됐어요. 최 선생님은 정말 농구에 미쳤던 분이셨거든요. 천장을 봐도 체육관 코트가 보일 정도로요. 우리에게 그런 에너지를 많이 주신 것 같아요.

Q. 삼천포여고로 진학을 하셨습니다.


원래는 삼천포여중 선수들을 스카우트해서 진주사면여고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때마침 삼천포여고 농구부가 창단을 한 거죠. 진주는 농구보다 교육의 도시였기 때문에 삼천포여고로 모두 진학을 했어요. 당시 창단 멤버로 종별선수권과 대통령배 우승을 했었죠.

Q. 농구에 가장 재미를 느꼈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재미보다는 주어진 환경이 운동을 해야만 하는 것이었어요. 재미를 느낄 겨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 부산 동주여중으로 동계훈련을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강현숙 언니가 이끄는 대표팀이 전지훈련을 왔는데 너무 잘하고 재밌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와서 따라하는데, 저도 그런 것이 조금 되는 거예요. 그때 ‘이게 농구다’라고 처음 느꼈죠. 실력이 확 늘어난 것을 느꼈거든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너무 잘 되니까 어떻게 더 재밌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태극마크를 달다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세계는 아시아 변방 한국여자농구의 위력에 감탄사를 내뿜었다. 아시아 구기 종목 최조의 올림픽 메달. 그것도 은메달이었다. 그 중심에는 성정아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태극마크를 단 그는 기라성 같은 언니들과 함께 주축 멤버로 활약하며 장대 숲 사이에서 리바운드를 낚아챘다. 단순한 리바운드가 아닌 세계를 낚은 것이다.

Q.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게 언제인가요?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그 해 7월 청소년대표에 뽑혔고, 다음 달인 8월 국가대표팀에 발탁됐죠. 오전에는 국가대표팀에서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청소년대표팀으로 갔다가 저녁에 다시 태릉선수촌에 입촌하는 생활이었죠.

Q. 어린 나이에 태극마크를 달았는데, 느낌이 어땠나요?


지방 선수는 저밖에 없었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사투리는 저만 썼고, 어색해서 말도 못하고 있었죠. 게다가 막내였거든요. 중학교 때는 박찬숙 언니가 농구공을 들고 있는 큰 사진을 방에 붙여 놓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래도 농구장에만 들어가면 주눅 들지 않았어요.

Q. 막내이다 보니 대표팀에서 역할이 많았을 것 같아요.


홍혜란 언니와 9년차, 김화순 언니와는 4년차였죠. 그렇다보니 해야 할 일이 1~2가지가 아니었어요. 물 뜨러 다니랴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녔죠. 정말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뛰어다니기만 한 것 같아요.

Q. 왜소한 몸에서 그런 파워가 나왔던 것이 그때 길러진 힘인가요?


힘이 길러질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죠. 태릉선수촌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할 때도 전 아무 것도 모르고 다 했어요. 모르니까 언니들이 시키는 대로, 트레이너가 시키는 대로 힘든 웨이트트레이닝을 다 견뎌냈어요. 태릉선수촌 내에서도 ‘성정아는 장사다’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거든요. 바로 그 해 동계훈련을 하는데 저와 부딪친 상대 선수가 나가떨어지더라고요.

Q. 당시 여자농구 선수들이 인기도 많았잖아요. 태릉선수촌 내에서도 인기가 많았겠어요.


예쁜 언니가 정말 많았어요. 박찬숙 언니도 그렇고 홍혜란 언니도 예뻤죠. 프라이드도 강해서 여자농구선수는 밖에서도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배웠어요. 막내인 주제에 그런 것을 보고 배운 거죠. 덩달아 인사도 잘 안하고 다니고요. 철이 없었죠. 그런 게 품위인 줄만 알고요. 그래서 박수교 선배한테 쟤는 인사도 안 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으니까요.

Q. 1984년 LA 올림픽을 앞두고 프레올림픽에서 최악의 성적을 거뒀어요.


중국한테 34-74인가? 아무튼 40점차 정도로 완패를 했었죠.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게임을 못하고 졌어요. 전체적인 침체 상태여서 게임 자체가 풀리지 않았죠. 그때는 시원하게 제대로 해본 경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신발을 벗으면 181.6cm 인데 센터와 포워드를 맡았죠. 덩치 좋은 흑인 사이에 서면 완전 암흑 세계였어요.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정말 자포자기 상태로 돌아왔어요.

Q. 한국에서는 여자농구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잖아요?


비난이 정말 심했죠. 예산 낭비다. 비행기 값이 아깝다. 동구권 국가들이 불참을 선언하면서 자동출전권이 주어지면서 LA올림픽에 극적으로 나가게 된 것이었거든요. 그 비난 덕분에 정말 열심히 훈련을 했어요. 너무 뛰어서 근육 파열이 일어날 정도로요.

Q. LA올림픽에서 결국 일을 냈습니다. 최초의 구기 종목 올림픽 은메달이라는 기적 같은 성적을 거둬냈습니다.


프레올림픽 때 워낙 못해서 부담 없이 나간 것이 한 몫 한 것 같아요. 찬숙 언니도 마지막 대회라 생각하고 나갔고, 화순 언니가 굉장히 잘했죠. 실업 4년생이 되면 컨디션이 가장 좋을 때거든요. 화순 언니가 딱 그 때였죠. 전 고3 때였는데, 아무 것도 몰랐던 것 같아요. ‘넌 진월방만 막아’라고 하면 전 그것만 했어요. 심리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한 것 같아요.

Q. 당시 경기는 어땠나요? 기적을 이룬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요?


주전이긴 했지만, 첫 경기가 9시여서 그런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요. 코치님이 저보고 정신 차리라고 커피를 타 주시더라고요. 하하. 언니들이 굉장히 잘했어요. 3점슛 제도가 없을 때였는데, 외곽슛이 대단했죠. 앞선 수비도 정말 좋았어요. 사이드 스텝으로 거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죠. 정신적인 부분이 하나로 뭉치면서 팀 전체가 하나가 된 것 같아요.

Q. 40점차로 졌던 중국을 꺾고 결승에 진출을 했어요. 중국의 장신 트윈타워 진월방과 정하이샤를 완벽하게 막아냈어요.


제가 그렇게 잘했다고는 생각을 안 해요. 진월방이 잘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어 보였어요. 제가 막으면서 별로 힘들게 한 것 같지 않거든요. 느낌이 그랬어요. 정하이샤도 1982년도 청소년대표팀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 당시 정말 위협적이었거든요. 진월방이 막혀서 나가고 정하이샤가 들어왔는데, 역시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어요. 아마도 우리가 프레올림픽 때 그랬던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그래도 그 당시 DVD를 다시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투지가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은 들어요. 중국은 8월 LA 올림픽 이후 10월 상해 아시아선수권에서 또 한 번 이겼죠.

Q. 대표팀에서 궂은일을 도맡았어요. 올림픽은메달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삼천포여고에서는 제가 중심이 돼서 했었어요. 하지만 대표팀에서는 제가 아니라도 다른 잘하는 언니들이 알아서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전 궂은 일을 중심으로 소극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죠. 하기 싫은 것보다 주어진 일이라 생각했어요. 웨이트트레이닝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밀어내는 것은 자신이 있었고, 리바운드 위치 선정이나 그런 것은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있었어요. 제가 생각해도 그 부분만큼은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올림픽 때 리바운드 2위 정도를 했을 거예요.

Q. 공격형 선수에서 수비형 선수로의 변화에 대해 아쉬움이 남지 않으세요?


아쉬운 부분은 있죠. 제가 좀 일찍 대표팀에 됐기 때문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스타일이 된 것 같아요. 게다가 정통 센터가 아니라서 포워드에 가까운 피딩을 하는 센터여서 정은순 같이 피벗을 하는 플레이를 해보지 못했어요. 아마 더 늦은 나이에 대표팀이 됐으면 그런 색깔이 아닌 눈에 띄는 농구를 했을 것 같아요. 지금도 가끔 제 기사를 보면 ‘수비형 선수였다. 리바운드가 좋았다’라는 얘기가 많거든요. 화려한 선수 뒤에서 보조 해주는 역할이 아닌 수비도 잘하고 공격도 잘하는 공격형 선수가 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좀 있어요.

Q. 피딩 능력이 대단했는데, 타고난 것인가요?


어려서부터 전체적인 것을 보는 눈을 익혔던 것이 도움이 많이 돼요. 가드부터 센터까지 모두 소화를 했으니까요. 시야는 좀 타고난 부분도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타이밍이나 센스는 타고나는 것이니까요.

Q. 금메달은 미국이 땄지만, 은메달을 딴 한국선수들이 더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캐나다와 유고는 좀 잘 했고, 중국은 말할 것도 없었죠. 바로 전 대회에서 40점차로 졌으니까요. 미국은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고요. 우리가 결국 결승에서 미국에 졌는데, 우리가 더 좋아하니까 미국 선수들이 황당해 했던 기억이 있어요.

Q. 프레올림픽 이후 비난 때문에 부담이 더 많지는 않았나요?


‘금 사냥하러 간다’고 하잖아요? 주위에서 부담을 주면 어차피 기대에 못 미칠 텐데 그런 부분이 좀 아쉬워요. 선수 마음이 편해야 경기도 잘 하거든요. 우리도 마음을 비우고 갔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낸 거죠. 전 어렸기 때문에 ‘너희들은 비난해라. 난 재밌게 하고 오면 되지’라고 생각했지만요.

Q. 나갈 때와 달리, 돌아올 때는 찬사가 대단했겠어요.


사실 우린 그냥 열심히 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대단한 줄 몰랐어요. 언론에서 얘기가 나와도 몰랐고요. 세월이 지나서 보니까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죠. 지금 대단한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긴 하죠. 학교 아이들도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보고 “선생님, 올림픽 가서 은메달 땄어요? 대단해요”라고 물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우리가 잘하긴 잘했구나’라고 느끼죠.

억대 스카우트, 3년의 기다림


소위 잘나가던 성정아의 시련은 실업 1년생이던 1955년 가을에 시작됐다. 여자농구 최초로 억대 스카우트라는 찬사 속에 실업농구에 뛰어든 그는 부상 악령에 시달렸다. 1985년 9월 첫 무릎부상을 시작으로 1986년 모스크바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또 다시 무릎부상을 당해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1987년까지 1, 2차 수술을 받은 그는 1988년 기적 같은 재기에 성공하며 서울올림픽에 참가에 이어 농구대잔치 MVP를 차지했고, 1989년 삼성생명을 전승 우승으로 이끌며 또 다시 MVP의 영예를 누렸다. 3년 동안 눈물로 참고 기다린 값진 성과였다.

Q. 고등학교 졸업 후 스카우트 파동이 대단했습니다. 여자농구 최초로 억대 스카우트의 주인공이 됐고요.


중2, 3때부터 말이 많았어요. 결국 고2 때 스카우트 파동으로 징계를 받아 1983년 브라질 세계선수권에 못 나갔죠. 태평양과의 가계약이 틀어지면서 생긴 문제였죠. 고등학교 때 태평양에서 저를 데리고 가고 싶어 했어요. 워낙 주목을 많이 받고 있을 때여서 주위 언니들이 ‘넌 태평양으로 가면 안 돼’라고 만류했죠. 태평양이 독주를 하고 있던 팀이었거든요. 저도 태평양으로 가면 ‘내 역할이 있을까’라고 생각했고요. 현대에서 저를 비롯해 삼천포여고 선수들을 데리고 창단을 하고 싶어했어요. 반상회 때 현대 농구팀 창단과 함께 공장을 지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면 차가 여러 대 서 있었죠. 저를 데려가려고요.

Q. 결국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에 입단을 했습니다.


조승연 선생님의 인상도 좋았고, 차양숙 언니가 옆에서 자상하게 다독여 주고, 김화순 언니도 말은 없지만 좋았어요. 그래서 삼성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을 했죠. 실업팀에 들어가서도 뛰질 못했어요. 우리 때만 3학년을 못 뛰게 했어요. 실업팀 가서 벤치 옆 바닥에서 소리만 질렀었죠.

Q. 실업팀 입단 후 바로 부상을 당했어요. 그때가 고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선수 생활을 돌이켜 보면 가장 아쉬운 부분이에요. 전 조문주 언니처럼 리바운드 기록이나 득점 기록 같은 것이 없어요. 무릎부상 때문에 수술과 재활로만 3년 연속 코트에서 뛸 수가 없었거든요. 계속 뛰지를 못하니까 아침에 해가 뜨면 눈물이 나는 그런 세월이었죠. 선수들이 훈련하러 나가면 홀로 남아 그렇게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그래도 대표팀 명단에는 항상 제 이름이 올려져있더라고요.

Q. 실업 1년생 때 부상을 당해 마음고생이 더 많았겠어요?


항상 빚진 마음이 많았죠. 빨리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많았고요. 실업팀에 가서 공을 만진 시간보다 웨이트트레이닝으로 재활하는 시간이 더 많았었으니까요. 예전에는 병원에 누워서 하늘 보고 쉬는 생각도 했었는데, 3년을 내리 쉬니까 정말 못 참겠더라고요.

Q. 재기의 시작이 1988년이었어요.


삼천포여고 때부터 저를 봐주시던 의사선생님이 미국에서 비행기 만드는 소재로 특수 제작된 무릎보호대를 주문해 1987년 농구대잔치 챔프전만 뛰었어요. 재활만 하다가 처음 뛴 거죠. 리바운드와 패스만 해주는 역할이었는데, 우리가 우승을 했어요. 재기의 발판이 된 거죠.

Q. 88서울올림픽이 본격적인 재기 무대가 됐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팀 훈련보다는 재활 때문에 패턴 플레이만 했어요. 하지만 무릎이 아파서 벤치에 앉아 있는 날이 많았어요.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조문주 언니가 올림픽을 얼마 앞두고 새벽에 슈팅 연습하다 빈혈로 쓰러지면서 턱을 크게 다친 거예요. 나쁜 거지만 언니가 빠지고 제가 뛰면서 다시 뛰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됐죠. 비록 그 올림픽에서는 7-8위전으로 밀리며 부진했지만요.

Q. 서울올림픽을 마치고 MVP가 되면서 완벽한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제2의 전성시대를 연 것인데요.


실업 4년차가 되면서 농구가 훤히 보이기 시작했어요. MVP에도 이때 선정됐죠. 외곽슛이 워낙 좋은 최경희 선배와 함께 이뤄낸 결과였어요. 제 기량은 절정이었고요. 우리 아버지는 마음이 여리셔서 우는 것을 많이 봤는데, 어려서부터 엄마가 우는 것을 한 번도 못 봤어요. 그 때 MVP 타고 나서 엄마가 저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죠. 그동안 고생한 것을 옆에서 보고 계셨기 때문에 더 그러셨던 것 같아요. 그 뒤로 정은순이 들어오면서 더 강해졌죠.

Q. 성공적인 재기 이후 1992년 2월에 은퇴를 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요?


그동안 고생한 부분이 많았어요. 우리 때 선수들이 한국농구 발전에 정말 많은 힘을 쏟았고요. 그런데 은퇴 확정 발표를 미리 하니까 마지막 대회 베스트5에 저희 이름을 빼 버렸어요. 미래를 내다보고 정은순과 전주원에게 상을 줬죠. 은퇴한다고 상에서도 빼는 것이 좀 아쉬웠어요. 마지막까지 멋있게 은퇴를 하고 싶었거든요.


Q. 은퇴를 조금 빨리 했는데, 더 뛰고 싶은 마음은 없으셨나요?
은퇴한 이후에 1992년 올림픽대표팀에 다시 들어와 달라고 제안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완강히 거부를 하셨죠. 이제는 여자로 살아야 한다고요. 무릎 통증이 너무 심했거든요. 다시 하려고 마음도 먹었다가 고민 끝에 결국 포기했죠. 어느 기자가 묻더라고요. 왜 포기했냐고. 그래서 그랬죠. 무릎을 완전히 다쳐서 못쓰게 되면 누가 보상해주나요? 지금 생각하면 잘 한 결정인 것 같아요. 이렇게 선생님도 할 수 있었고요. 하하.

 

▲ 성정아-이윤환 부부와 아들 이현중. 미국 대학농구에서 활약 중인 이현중(데이비슨대)은 올해 NBA 드래프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평범한 인생에 도전하다


성정아는 화려한 농구인생을 뒤로 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1992년 은퇴 후 곧바로 숙명여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해 교직 이수를 마쳤고, 수원영생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변신했다. 대학졸업과 함께 인생의 반려자도 만났다. 은퇴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유쾌했다. “한국을 대표했던 농구선수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했다. 여전히 소녀 같은 미소와 다정다감한 말투. 그 안에 엿보이는 끝없는 열정만이 그가 운동선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Q. 은퇴하자마자 숙명여대로 진학을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엄마가 농구를 해도 대학을 무조건 가야 된다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은퇴를 했으니까 당연히 대학을 가는 거라 생각했죠. 원래 가고 싶었던 대학이 숙명여대였어요. 때마침 특기자도 받아준다고 해서 완전 기회가 좋았죠.

Q. 늦은 나이에 화려한 생활을 버리고 수업을 따라가기 쉽지 않았겠어요.


전공 수업은 괜찮은데, 교양 수업은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교수한테 잘 보이려고 맨 앞에 앉아 수업을 들었죠. 시험기간에도 별 일이 다 있었죠. 제가 모르는 시험 문제가 나와도 제가 다시 문제를 만들어 답을 쓰고, 리포트 써서 제출하는 등 별 쇼를 다했어요.

Q. 숙명여대 졸업 후 곧바로 결혼을 하셨어요. 남편 역시 농구선수 출신이잖아요? (※ 성정아 씨의 남편 이윤환 씨는 고려대와 삼성전자에서 선수생활을 한 뒤 현재 삼일상고 체육교사 겸 농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아버지가 워낙 자상하신 분이라 남편도 자상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요. 남편도 여러 가지로 자상하고 섬세하게 잘 챙겨줘요. 학교에서 선생님들도 부러워하죠.

Q. 러브스토리가 궁금해요. 처음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나중에 들리는 말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저를 짝사랑했다고 들었어요. 그때는 많은 사람이 저를 알아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한 번은 제가 숙소 앞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남편이 “쟤 하얗고 괜찮네”라고 옆에 같이 가던 선배에게 얘기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선배한테 뒤통수를 한 대 맞았죠. “넌 인마, 농구선수가 성정아도 모르냐?”라고 꾸중을 들으면서요. 남편이 농구를 중3 때부터 늦게 시작했거든요.

Q. 그럼, 본격적으로 인연이 맺어진 것은 언제부터예요?


마산 출신인 강을준 감독이 연결을 해줬죠. 남편이 저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압구정동 카페에서 가볍게 밥 한 번 먹을 자리를 마련해 준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부끄러워서 손에 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못 들고 있더라고요. 첫 인상은 그냥 ‘깔끔하네’ 정도였어요. 그 이후 계속 전화하고 찾아오고 그러더라고요.

Q. 남편이 마음에 확 들어온 건 언제예요?


1991년도인가 그랬을 거예요. 남편이 양복을 갖춰 입고, 선물을 한 번 사 왔어요. 깔끔하고 멋있었어요. 이미지도 좋고 호감이 확 가기 시작했죠.

Q. 특별한 프러포즈는 없었나요? 낚시터 에피소드도 닭살이 돋던데요?


아아, 점프볼에 소개됐던 거요? 선생님 4명이서 낚시를 갔는데, 너무 멀리 걸어갔다가 제가 발목을 삐끗 했었죠. 그때 업혀서 오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믿음이 생겼었죠. 프러포즈는 특별히 없었지만,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맞고 결혼을 하게 된 것 같아요.

Q. 1997년부터 교사로 변신을 했는데, 어떠세요?


너무 잘 맞아요. 운동을 하면서 단체 생활을 오래 경험하다 보니까 짜여진 생활에 익숙한 거죠. 다행히 체육이라서 아이들과 스킨십도 할 수 있고, 좋아요. 담임하면서 우수교사상도 받았거든요. 하하.

Q. 농구스타 출신이라는 것을 학생들도 알고 있나요?


아이들도 잘 따르지만,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라는 것이 유리할 때가 있어요. “아빠가 선생님 아신다고 하던데요?”, “예전에는 선생님이 예뻤다고 하던데요?”라고 물을 때가 있어요. 그럼 저도 “그래, 너희들 만나면서 삭았다”라고 받아치죠. 농구시범을 보이면 “선생님, 진짜 농구선수 같아요”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Q. 농구선수 성정아를 돌이켜보면 어떠신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해 운동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눈만 감고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시절 대표팀 갔던 것이 생각나는데, 세월이 정말 빨라요. 운동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제가 가장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시기였고요. 부상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성정아라는 존재를 다시 확인시켜주고 나왔다는 사실에 어떤 일이 닥쳐도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니까요.

성정아는…


1965년 12월 25일 경상남도 진주 출생인 성정아는 1980년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감동시킨 한국여자농구의 간판스타다. 진주수정초교 5학년 때부터 농구공을 잡기 시작해 삼천포초,중,고교를 거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고교 1학년이던 1982년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했고,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2년 은퇴 후 숙명여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 현재 교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들 이현중은 미국 대학농구(NCAA) 디비전 I 데이비슨 대학에서 뛰고 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A10 컨퍼런스 올-루키 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서민교 기자

 

자료출처 :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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