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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복싱 (2)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2. 11. 11.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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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4. 03

 

1931년 한반도에 복싱 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메이지대학교 출신의 황을수가 4월에 열린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파견 일본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했고 조선권투구락부 주최 학생권투선수권대회가 열렸으며 10월에는 배재고보에 권투부가 신설됐다.

 

이런 복싱 붐을 더욱 살리기 위해 조선체육회는 조선일보의 후원을 얻어 1931년 10월 22일부터 이틀 동안 천도교기념관에서 제1회 전조선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를 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종목별로 주최 단체는 다르지만 이름은 같은 대회가 있었다. 앞에 나온 서울YMCA 주최 대회와 다른 대회다.

 

▲ 재미 동포들이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출전한 조선인 선수들을 환영하는 행사를 열었다. 행사장에 걸린 태극기에서 망국민의 아픔이 느껴진다. / ⓒ대한체육회

 

1932년 7월 30일부터 8월 14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10회 대회에 조선인 선수 3명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마라톤의 권태하와 김은배, 복싱 라이트급의 황을수는 조선체육회가 뽑아 올림픽에 파견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에 나라를 강점당하고 있던 당시 일본 대표 선발전에 나갈 수 있는 조선 지역 대표는 일본인 조직인 조선체육협회가 뽑게 돼 있었다. 오츠 쇼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출전한 황을수는 1회전에서 독일의 프란츠 칼츠와 잘 싸웠으나 판정패했다. 이 대회에는 아시아에서 일본과 필리핀이 출전했으나 메달을 따지 못했다.

 

1934년 1월 20일에는 조선권투구락부, 조선무도관 권투부, 경성권투구락부, 선만(鮮滿, 조선과 만주)권투회, 수원권투구락부, 광주권투구락부 등 여러 복싱 단체에서 2명씩 대표들이 천향원에 모여 전조선아마추어권투연맹을 창립했다. 복싱 발전을 위한 든든한 발판을 바련한 것이다.

 

1937년 제9회 메이지신궁대회 복싱 종목에서는 플라이급의 박춘서, 밴텀급의 김명석, 라이트급의 최용진, 웰터급의 이규환, 미들급의 김승환이 우승해 조선 복싱의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일제 강점기에 복싱 마라톤 축구 등 스포츠는 항일운동의 하나였다. 복싱과 관련한 아래 일화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인 복서들의 항일 독립 의지를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 복싱 선수들 사이에서는 ‘일본 선수들에게는 판정으로 이기지 못한다. 이판사판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고 한다. 판정이 아니라 누가 보기에도 승패가 뚜렷한 KO승이 아니면 일본 선수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조선인 선수들은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강한 펀치를 키웠다. <3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스포티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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