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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서른 다섯 번째] 장판교에 홀로선 장비, 레이더스 4번타자 김기태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3. 5. 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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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2. 22 

 

홀로 주군의 젖먹이 아들을 품에 품은 채 백만의 칼과 창이 이루는 숲을 무아지경으로 헤치고 달리는 조자룡의 거친 말발굽소리와 꼭 같은 리듬으로 넘어가던 <삼국지>의 책장이 순간 멈추는 곳은 항상 장판교 앞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조자룡이 건너간 다리 위에 홀로 버티고 선 장비. 장판교 앞뒤로 흐르는 거친 물살에 의지해 한 몸으로 조조의 백만 추격군을 가로막고 선 장비의 포효는 그대로 거친 판화로, 세밀한 유화로, 그윽한 수채화로 거듭 마음속에 그려졌던 그 긴 소설의 고갱이였다.

 

▲ 김기태의 타격 자세 / ⓒ SK와이번스 홈페이지


쌍방울 레이더스의 경기를 보고 나면 항상 삼국지가 읽고 싶어졌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아마도 제일 척박한 연고지에서 빠듯한 살림과 허약한 전력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래저래 천하제패의 망상을 놓지 않는 레이더스의 가소로운 투지가 촉나라의 군신을 떠올렸거나, 그나마 윗돌 빼서 아래 괴고 아랫돌 빼서 위에 올리는 분주한 용병술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던 김성근 감독의 고심에서 제갈량의 주름살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역시 그것은 김기태 때문이었다. 타석에 들어서면 장판교에 버티고 선 장비처럼 꼭 들어차 빈틈을 보이지 않았던 김기태. 그 나이 때 목말라했던 그 눈물겨운 비장미.

객관성과는 거리가 있는 개념이지만, '존재감'이라는 척도로 보았을 때 김기태를 앞설 선수는 없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김기태는, 그를 상대하는 모든 팀의 선수와 팬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던지는 타자였고, 그래서 고의사구 하나가 가장 아깝지 않게 느껴졌던 타자이기도 했다.

쌍방울 레이더스를 보며 <삼국지>를 떠올리다

김기태는 힘과 정확성을 겸비한 흔치 않은 타자였다.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멤버로 데뷔한 그는 그 해 27개의 홈런으로 신인 최다홈런을 기록했고(뒷날, 96년에 데뷔한 박재홍이 30개를 때려냈다), 94년에는 25개로 홈런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가 92년에 기록한 31개의 홈런은 이승엽 등장 이전까지 왼손타자 최다홈런 기록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97년 0.344의 타율로 타격왕에 오른 적이 있으며 통산 타율도 0.294에 달하는 정확한 타자였다. 우리 프로야구사에서 홈런왕과 타격왕에 모두 올라 본 선수는 '트리플 크라운'의 주인공 이만수와 이대호 그리고 김기태 외에는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만수의 경우에는 확실히 김기태보다 나은 업적을 쌓은 선수였다. 그리고 새겨보면 91, 92년의 이정훈 역시 그보다 덜 무서운 타자였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김기태의 존재감이 돋보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쌍방울 레이더스라는 허약한 팀의 배경효과 때문이기도 하다.

장효조, 이만수, 박승호가 늘어서있던 80년대 초반 라이온즈의 타선이나 이강돈, 이정훈, 장종훈으로 이어지던 90년대 초반 이글스의 타선이 아니더라도, 흔히 '우동수 트리오'니 'KKK포'라느니 '마림포' 따위의 별명으로 기억되던 강타선은 오히려 타자 하나하나의 존재감에 둔감해지게 한다.

그러나 그의 전성기였다고 할 90년대 전반을 통틀어 김기태에게는 딱히 더불어 '포'나 '라인'이라고 불릴만한 짝이 없었다. 대개의 경우 그는 레이더스 타선에서 주의할 유일한 경계대상이었고, 어지간하면 그냥 걸려 내보내면 되는 상대였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라도 투수에게는 혹 한 방을 맞더라도 당장 큰 점수 줄 걱정 없는 비어있는 누상을 배경으로 집중력을 가지고 상대할 수 있는 타자이기도 했다. 그가 그리 길지도 않은 15시즌동안 무려 975개의 사사구(통산 3위에 해당)로 걸어 나간 기록이 그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는 항상 80,90개를 넘나드는 타점을 기록하며 타점왕을 넘보곤 했다. 그것은 투수들의 집중적인 견제 속에서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한 방을 때려내는 집중력과 타격기술이 그보다 나은 기록을 남긴 다른 어느 타자들보다도 오히려 한 수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산 2위에 올라있는 9개의 만루홈런 기록 역시 그의 그런 면모를 보여준다.

'포'나 '라인'이라 불릴만한 짝 없이 고군분투

▲ 2000년 8월 3일 한 경기 6타수 6안타를 달성한 김기태 /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물론 선수생활에 이어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에게 '팀'이 어쨌거나 불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누구나 기대했을 좀더 빛나는 전성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사그라지기 시작한 것 역시 어느 만큼은 그런 불운 탓이기도 하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비극적인 트레이드는 98년에 일어났다. IMF 와중에 부도를 맞은 쌍방울은 자회사 레이더스의 운영비용을 댈 수 없었고, 유일한 해결책은 선수를 팔아 자급자족하는 것이었다.

그 때 레이더스가 팔아치워야 했던 것이 조규제(현대)와 김현욱(삼성), 그리고 박경완(현대)과 김기태(삼성)였다. 삼성과 현대라는 초대기업으로 총 35억에 팔려나간 이들 네 선수가 팀의 전력과 상품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 이상이었다. 따라서 그 트레이드는 레이더스가 인수를 통한 계승이 아닌 해체와 재창단의 길로 내몰려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 트레이드를 통해 김기태는 99년 시즌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유니폼을 입고 뛰어야 했다. 양준혁을 해태로 보낸 라이온즈 타선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이 김기태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적 첫 두 해 동안 김기태는 3할대를 유지하며 30개 가까운 홈런을 쳐내며 제몫을 다했다. 그러나 라이온즈에서의 마지막 해인 2001년 김응룡 감독과의 불화로 불과 44경기에만 출전해 1할대의 부진에 빠진 김기태는 이듬해 FA신분으로 쌍방울 시절 옛 동료들이 뛰고 있는 SK와이번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러나 30대 중반으로 들어서던 김기태에게 2001년은 '불화'로만 탓을 돌릴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시작된 해였다. 홈런과 장타가 좀체 터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3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모든 타자에게 치명적인 한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크지 않은 체구에 특유의 손목 힘으로 끌어당기는 타격을 하던 슬러거 김기태에게는 달랐다. 이미 프로에서만도 십수 년간 몸에 익었던 타격폼 대로 휘두른 방망이는 공보다 한 순간 늦게 돌면서 허공에서 허우적댔고, 제대로 타이밍을 맞춘 공도 펜스 한 발 앞에서 멈추기 일쑤였다.

그런 삐걱거림 속에서 2001년 0.176의 극심한 슬럼프. '먹튀'라는 야유마저 들으며 들어서야 했던 타석은 그에게 점점 고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김기태는 타격폼을 바꾸었다. 이제 굳이 끌어당겨 담장을 넘기는 타격이 아니라, 짧게 휘둘러 정확히 때리는 궤적을 연습했다. 이제 무조건 멀리 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정확한 타격으로 야수 사이를 가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되뇌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받쳐줄 이 없이 장판교에 홀로 버티고 서서 사생결단의 승부를 내야 했던 레이더스 시절이 아니라, 홈런왕 박경완과 타점왕 이호준 같은 든든한 후배들 앞으로 기회를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는 점을 되새겼다.

2003년, 홈런은 3개에 불과했지만 타율은 0.292로 올라섰다. 그리고 2004년, 10개의 홈런은 역시 성에 못 미쳤지만 0.320의 타율로 타격왕 경쟁에까지 끼어들어 후배들과 각축하며 완전히 재기했다.

그 해 연말 시상식장에서 그는 10년 만에 황금장갑을 손에 넣었고, 다시 '페어플레이상' 트로피를 받아 들었다. 프로선수 14년차, 이제는 전성기에 비해 장타율은 2할이나 떨어지고 홈런 수도 3분의 1로 줄어들었지만, 그는 또 다른 승부수를 통해 여전히 한국야구의 가장 빛나는 별로 존재함을 증명한 것이다.

극심한 침체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

▲ 김기태의 은퇴식 / ⓒ SK 와이번스 홈페이지


물론 굳이 입 밖으로 내어 확인해봐야 별 이로울 것 없는 구차한 삶의 진리이긴 하겠다만, 사람들이 쉽게 말하듯 저 한 몸 열심히 한다고 환경과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경우는 사실 흔치 않다. 오히려 노력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거친 환경은, 곧장 인간의 의지마저 갉아먹곤 한다. 부딪혀도 부딪혀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절망하는 인간을, 그래서 우리는 가벼이 탓하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힘겨운 절망의 유혹마저 이겨내고 끝내 달려들어 진저리쳐지는 격전의 감동을 주는 이들에게서 우리는 두 배의 감동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김기태, 그가 결국 그토록 원했던 우승컵을 안아보지 못하고 사라져가야 했던 것처럼, 그리 승률 높지 않은 인생의 불공평한 승부처에서 한 번 더 단단한 힘을 다지게 하는 그들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힘과 정확성 그리고 기회에서 얻은 집중력 그리고 어느 팀에서나 주장을 맡을 수 있는 포용력과 리더십. 김기태를 평가할 때 이론의 여지가 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끝내 보답하지 않는 야속한 환경과 허약한 동료들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오히려 앞장서 달려 나갈 수 있었던 강한 의지력과 정신력. 바로 '돌격대 정신' 말이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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