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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⑪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12.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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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9. 06. 

 

올림픽이 여러 번 중단된 적이 있었다. 모두 전쟁 때문이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1948년 런던에서 올림픽이 재개됐다. 이후 어김없이 4년마다 열렸다. 우리나라도 런던대회부터 출전했다. 올림픽 유치도 치열해졌다. 1988년 서울로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치러내기도 하였다. 

 

베일에 쌓인 중국, 북한의 등장

철의 장막 속에 있던 중국과 북한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처음 등장했다. 그 이전에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아시아 최초로 열린 1964년 도쿄올림픽도 불참했다. 당시 우리는 중국과 북한을 중공, 북괴라고 호칭했다.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1974년 9월 1일부터 16일까지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아시아 25개국, 3000명이 참가했다. 우리나라는 231명의 선수단(임원 54명· 선수 177명)이 참가했고 금메달 16개로 4위를 했다. 1위는 일본 금 75개, 2위 이란 금 36개, 3위 중국 금 33개 순이었다. 수영 조오련과 육상 백옥자가 70년 대회에 이어 2연패를 했다. 역도 원신희가 3관왕을 차지했다. 행운이었다. 역도가 강한 이란이 메달 욕심에 체급별 1개였던 금메달을 3개로 늘린 것이다. 인상, 용상, 합계에서 1위를 하여 3관왕이 되었다. 졸지에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원신희는 연금 등 많은 혜택을 누렸다. 역도 헤비급 황호동은 국회의원 신분으로 참가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1974년 8월 15일에 육영수 여사가 국립극장에서 피살됐다. 북한소행으로 밝혀져 민심이 좋지 않았다. 한국 선수단 입촌한 날에 육 여사 국민장 영결식이 있었다. 임원, 선수 모두 대한민국을 향해 묵념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북한 선수단 때문에 선수촌 내 행동 규범도 엄했다. 저녁 식사 후 숙소에서만 지내야 했다. 오락 시설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방에 콕 박혀 있어야 했다. 

국제무대에 처음 등장한 북한 선수들의 행동은 남달랐다. 저질스러웠다. 모든 선수가 열을 맞춰 걷는다. 식당을 오가다 가끔 마주치기도 하는데, 특히 여자농구선수들이 유별났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점잖게 걸어가는 우리 선수들에게 쌍욕을 해대는 것이다. 어떤 선수는 주먹 욕을 하며 ‘요거나 먹으라우“ 외친다. 윗선에서 시키진 않았을 텐데, 측은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북한과 경기가 없었다.

 

여자는 북한과 경기가 있었고, 일방적으로 리드 당하자 심판에게 시비를 걸고 욕을 하며 퇴장, 기권했다. 패배 사유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남자농구 임원은 김영기, 이인표였다. 여자농구가 북한과 경기할 때, 코트 가까운 곳에서 수비상황을 말해주다 혼이 났다. 라인 밖에서 드로우 인 하려던 북한 선수가 뒤를 돌아보며 욕을 한 것이다. “에미나이 같은 XX들, 조용히 하라우!” 머쓱해진 두 분은 응원석으로 올라왔다. 그들에겐 어른에 대한 예의도 없었다. 

강하고 무서웠던 중국

남자농구는 A, B조로 나누어 풀리그를 한 뒤 1위끼리 결승, 2위끼리 3·4위전 방식이었다. 우리가 속한 A조에는 중국과 일본이 있었고, B조에는 이스라엘, 필리핀, 북한 등이 있었다. 일본을 많은 점수 차이로 이기고 전승으로 중국과 맞붙었다. 승리할 경우 이스라엘과 결승, 패하면 B조 2위인 북한과 3·4위 전을 해야 했다.

중국은 국가 스포츠가 탁구와 농구다. 선수 자원이 풍부하고 기량도 뛰어났다. 2m 넘는 선수가 즐비하고 외곽 슈터도 많았다. 우리나라 남자농구는 세대교체가 된 상태였다. 나와 곽현채, 이자영이 고참이었다. 전성기 주전선수 중 70년 아시안게임 후 김영일, 71년 김인건, 이인표, 73년 신동파가 유니폼을 벗었다. 새로 구성된 선수로 김동광, 강호석, 이광준, 황재환, 김인진, 차성환, 최경덕, 김경태, 이보선, 등이 있었다. 

국제무대에 첫 등장 한 중국은 강했고 무서웠다. 후반 7분을 남기고 15점을 리드 당했다. 패색이 짙었고 누가 봐도 진 경기였다. 작전타임 때 감독의 지시가 끝나고 내가 선수들에게 말했다. “이 경기에 패하면 내일 북한과 맥 빠진 3·4위 전을 해야 한다. 질 때 지더라도 본때를 보여주자, 와일드하게 하자!” 선수들이 돌변했다. 나부터 중국 선수가 가까이 오면 가격을 했다. 5명 전원이 갑자기 변하니까 심판도 파울 지적을 주저했다. 중국 장신 선수들이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링에서 멀어지면 수비가 성공한 것이다. 한점, 한점 따라갔다.

 

기적이 일어날 것인가? 9초를 남기고 중국이 1점을 앞선 상태에서 공격권을 가지고 있었다. 9초만 보내면 우리는 패배다. 5초 전, 내가 몸을 날렸다. 볼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가로채기를 한 것이다. 노 마크로 슛을 하는데 뒤에서 밀었다. 농구대에 부딪치며 넘어졌는데 참을 만했다. 아픈척하며 시계를 보니 3초가 남아 있었다. 자유투 2개를 다 넣으면 이기는 것이다. 인상을 쓰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중국 선수의 방해 동작에 움찔하고 던진 첫 번째 슛이 튀어나왔다. 벤치를 보니 모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있었다. 두 번째를 여유 있게 넣고 연장전에 들어갔다. 결국 119대114로 중국을 물리쳤다. 연장전 득점 13점 중 8점을 내가 넣었다. 끝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작용한 것이다. 그 후로는 중국을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결승에서 맞붙었지만 역부족이었다. 85-92로 패하며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만약 이겼다면 체육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아시안게임 금 2개면 연금 40만 원을 평생 받는다. 금하나 은 하나도 대견한 것 아닌가? 아쉬움이 남는다. 이스라엘은 그 후 아시아에서 축출되었다. 중동 아시아권의 입김이 작용 한 것이다. 진작 내보냈으면 연금 혜택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45년 전 테헤란 아시안게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중국전과 북한 여자선수들의 욕하는 장면이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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