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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⑬ 1977년 쿠알라룸프루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1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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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05

 

마지막 국제대회, 혼신을 다하다!


제9회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가 1977년 11월 28일부터 12월 10일까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렸다. 아시아 12개국이 참가했다. 나에게는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마지막 대회였다. 연장자인 내가 주장을 맡았다. 8회(1975년) 대회까지 팀을 지휘했던 김영기, 이인표 씨가 물러나고, 이경재, 김인건 씨 체재로 바뀌었다. 이경재 씨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 이후 9년 만에 돌아왔고, 김인건 선배가 처음으로 대표팀 코치를 맡았다. 선수는 나를 비롯해 강호석, 이광준, 김동광, 박형철, 정영수, 박상웅, 박수교, 김인진, 박인규, 진효준, 김형년이었다.

 

주장의 책임감

태릉선수촌에서 강화훈련을 시작했다. 순탄치가 않았다. 음주 관련 잡음이 자주 일어났다. 당시 선수촌 규정은 일요일만 외출할 수 있었다. 외박이 없었다. 가정이 있는 선수들은 당연히 집에 가서 가족들과 지내다 귀촌하지만 대학생들은 집에 가질 않고 대낮부터 고팠던 술을 마셔댔다. 적당히 마셔야 하는데 도를 넘었다. 대학교 선수 2명이 만취해서 들어온 것이다. 똑바로 서있지를 못했다. 화가 나서 주먹으로 배를 두 차례씩 가격했다. 선수 생활 중 처음으로 후배를 때려봤다. 당사자에게 미안했지만, 선수촌에는 여러 종목이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선배들의 노력으로 농구가 가장 모범적이라는 찬사를 받아왔기에 그 전통을 지키고 싶었다.

대회가 임박해서 연습경기를 여러 차례 했다. 흡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학팀에 패할 때도 있었다. 매번 이경재 총감독으로부터 혼이 났다. 주장인 나를 혹독하게 꾸짖었다. 심지어 주먹으로 어깨와 가슴을 쥐어박기도 했다. 나이 많은 주장인 나의 얼굴은 차마 때리지 못했다. 화가 나지만 참고 이를 악물었다. 새로 도입한 수비를 익히느라 공격에 대한 훈련이 부족해서인지 공격이 삐걱거렸다.

240cm 만리장성 같았던 무태추

경기에 돌입했다. 예선 전승을 거둔 후, 6개 팀이 겨루는 결승리그에 진출했다. 필리핀, 이란 등을 여유 있게 물리쳤지만, 일본과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치렀다. 90-86으로 힘겹게 이기고 전승으로 중국과 맞붙었다. 중국에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중국팀에 엄청난 괴물이 등장했다. 이름은 ‘무테추’ 신장이 무려 240cm에 이른다. 150kg의 육중한 몸으로 동작은 둔하지만 신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막아낼 수가 없었다. 림 높이가 3m 5cm인데 점프를 하지 않아도 손이 닿을 정도다. 바구니에 담듯이 득점을 해댔다. 저지하려고 하면 얼굴에 손이 닿았다. 팔꿈치로 가격해도 꿈적하지 않았다.

우리는 2년 전 대패했던 수모를 만회하기 위해 초반부터 강력한 수비로 맞섰다. 새롭게 준비한 런 앤드 점프(run and jump)였다. 하프라인부터 압박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딘 스미스 감독이 고안한 수비 방법이었다. 하프웨이(half way) 수비라고도 하는데, 체력소모가 많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고난도 수비였다. 볼을 소지한 공격자를 한쪽으로 몰아서 더블팀(두 명이 에워싸는 것) 하는 수비다. 먼 거리부터 밀착하여 무테추에게 볼 투입 되는 것을 저지하며 가로채기를 노렸다. 효과를 톡톡히 봤지만 패했다. 최종점수는 61-58. 중국의 공격을 61점으로 묶는 데 성공했지만 우리 팀의 득점이 따라주질 못했다. 끝까지 추격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2위로 만족해야만 했다. 장신군단 중국과 대등하게 맞선 것은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아시아선수권 우승은 요원(遼遠)한 것인가?  

▲ 중국의 무태추와 함께선 대표팀 선수단의 사진. 240cm의 거인 무태추의 위력은 한국에게 엄청난 공포 그 자체였다.


강행군의 후유증이 부른 은퇴

대표단은 귀국했지만, 나는 태국 방콕으로 날아갔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전매청팀에 합류하기 위해서다. 태국농구협회가 말레이시아 대회를 마친 국가대표팀을 초청해 국제대회를 만든 것이다. 우리 대표팀은 불참했다. 대신 전매청농구단이 방콕으로 날아왔다. 참가국은 중국,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태국, 전매청 등 5개국이었다.

추운 겨울왕국에서 따뜻한 남쪽 나라인 태국에 도착한 전매청선수들은 모두 얼이 빠져 있었다. 발이 붙어 있어 쉬운 골밑슛도 넣질 못했다. 최약체인 파키스탄에 첫 경기에서 패했다.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소진된 체력을 추스르며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중국에는 패했지만, 말레이시아, 태국을 이기고 3위를 한 후 귀국했다. 무리한 일정이었고, 피로가 쌓여 있었다.

귀국해서 휴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방콕아시안게임(1978년)에 대비한 강화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곧바로 태릉선수촌에 합류했다. 하루도 쉬지 못하고 입촌해 훈련에 매진했다. 주장이어서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었다. 내가 앞장서야 했다. 선수촌의 훈련 규정은 혹독하다. 겨울철은 무척 춥다. 아무리 추워도 새벽 6시 전에 일어나 조기 훈련에 참여해야 한다. 오전 10시, 오후 3시 세 차례 정규 훈련을 소화해야 하고 야간연습도 해야 했다. 하루 네 차례 훈련은 당시 나이(29세)로 무리였다. 괴로운 것이 또 있다. 토요일에 불암산을 뛰어 올라가는 것이다. 전 종목이 함께 출발하여 순위를 정한다. 정상에 먼저 올라와 있던 타 종목 지도자의 확인 도장을 받고 내려온다. 산을 뛴 경험이 많아서 일등을 몇 번 했지만 나는 철인이 아니었다.

 

▲ 쿠알라룸프루에서 한 컷. 국가대표 주장을 맡았던 나는 혼신의 힘을 쿠알라룸프루 대회에서 다했다. 이는 나의 마지막 국제대회가 됐다.


몸을 아끼지 않는 무리한 행태가 나중에 큰 화를 미칠 줄 몰랐다. 입촌 2개월 만에 사달이 났다. 급성간염에 걸린 것이다. 현역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한 후 농구 코트를 떠났다. 돌이켜보면 현역 생활 17년은 보람도 많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노력도 많이 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 마음껏 플레이도 해 보았다. 국가대표로 10년간 생활하면서 슈팅 가드로 대표팀에 공헌도 했다. 아시아 왕자로 두 번 군림할 때,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어깨를 함께하며 주전으로 활약했던 추억은 영원한 나의 자부심이었다. 그 후 뛰어난 후배들이 나타나 한국 최고의 농구 전성시대를 누릴 때, TV 해설위원으로 농구 팬들과 교분을 나눈 것도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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