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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所有] 거리의 스승들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5.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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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오두막 둘레에는 5월 하순인 요즘에야 철쭉이 한창이다.
 
창호에 아련히 비쳐드는 분홍빛이 마치 밖에 꽃등이라도 밝혀 놓은 것 같다. 철쭉이 필 무렵이면 어김없이 검은 등 뻐꾸기가 찾아온다. 네 박자로 우는 그 새소리를 듣고 고랭지의 모란도 살며시 문을 연다. 야지에서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모란이 6월의 문턱에서 피기 시작한다. 그 빛깔이 어찌나 투명하고 여린지 가까이 다가서기가 조심스럽다.
 
어제는 산 너머 장에서 모종을 사다가 심었다. 고추와 가지와 오이와 케일, 방울토마토도 세 그루 심었다. 그리고 호박 모종을 여덟 구덩이 심고 남은 이랑에 고소씨도 뿌렸다. 며칠 동안 개울물을 길어다 목을 축여주면 모종들은 꼿꼿이 일어설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이제는 머리 무겁게 여겨져 자꾸만 뒤로 미루게 된다. 나도 늙어 가는 모양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장에 가면 한 번 들렀던 가게를 다시 찾는다. 모종은 몇 해째 같은 집에서 사온다. 가게 주인의 말에 신뢰감이 가기 때문이다. 한 번은 꽃시장 한쪽에서 맵지 않은 고추라고 해서 그 말을 믿고 사다 심었는데 열린 고추가 너무 매워서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케일도 말만 믿고 사다 심었다가 두 번 다 실패했다. 케일은 줄기가 초록이어야 잎이 연하고 생육 상태도 좋다. 자색을 띠면 잎에 거세고 맛이 없다.
 
결과적으로 허드레 가게에서 파는 모종은 신용할 수 없지만, 간판을 내건 종묘상의 모종은 비교적 믿을 수 있다. 자기집 물건을 팔면서 그 물건에 대한 긍지도 함께 지녔으면 좋으련만 대개의 경우 팔고 보자로 끝을 낸다. 그렇게 되면 남을 속이기에 앞서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그 끝이 좋을 수 없다. 채소의 모종만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인격의 모종도 함께 판다는 사실에 착안해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데,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가지로 배우게 된다. 한두 가지 현상을 통해서 그 배후의 세계까지도 넘어다볼 수 있다. 사실 종교적인 이론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일상에서 만나고 부딪히는 인간관계에서, 경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보다 진솔한 삶의 뜰을 거닐 수 있다.
 
얼마 전 길상사 문화강좌에 참여했던 한 회원의 편지를 받아보고 흐뭇한 감동을 받았다. 3개월 동안(한 주일에 두 번) 전철을 타고 문화강좌를 듣기 위해 먼길을 오고 가면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은 생동하는 또 다른 문화강좌이기도 했다. 전철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에게는 이름 모를 스승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3월에 만난 스승은 시각장애자 걸인이었어요. 복잡한 전철 안인데 멀리서 가냘픈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풀옷을 입으셨네...... .' 웬 꾀꼬리 소리지? 카세트가 아닌 생음악 소리가 점점 커지며 다가온 그녀는 시각장애자였습니다."
 
성가를 틀고 다니는 다른 장애인의 상업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에는 신선함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그 회원은 천 원짜리 한 장을 바구니에 넣어주며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아줌마!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의 봄기운보다 아줌마 목소리에 더 아름다운 봄기운이 담겨 있네요. 비록 볼 수는 없지만 개나리, 진달래 만발한 동산에 지금 계신다고 생각하세요. 아줌마가 바로 봄처녀일 거예요.'
 
이런 사연을 전해 듣는 내 마음도 봄기운에 쬐듯 따뜻해진다. 우리는 눈을 가지고 뭘 보는가? 우리 둘레의 이웃이 나와는 무연한 타인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어째서 그때 그 자리에서 나와 마주치게 되었을까?
 
중생은 부처를 제도하고 부처는 다시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이 있다. 모든 부처와 보살은 오로지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불도를 성취한다. 따라서 중생이 없다면 부처와 보살은 할 일이 없어져 끝내 불도를 이룰 수 없다.
 
마주치는 이웃을 통해 내 마음이 활짝 열려야 한다. 그때 마주친 대상은 나를 일깨우기 위한 스승이요, 선지식이라고 생각하라.
 
"......5월에 만난 스승은 평촌 범계 전철역 앞의 노점상 아저씨입니다."
 
그의 편지는 이어진다. 참외를 사고 있는데 그 옆에는 상품 가치도 없는 앵두만한 방울토마토를 한 바구니에 천 원에 팔고 있는 노점상 아저씨가 있었다. 팔아주었으면 하는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습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 한 바구니를 산다.
 
어려운 노점상 처지를 생각해서 비닐 봉지라도 아끼라고 "참외 봉지에 그냥 쏟으세요." 했더니 노점상 아저씨는 "아니예요. 볼품 없는 거라도 내가 파는 물건인데 으깨지면 안 되죠. 맛있게 잡수셔야죠." 이렇게 말하면서 새 봉지에 조심조심 넣어주더라는 것이다.
 
비록 영세한 노점상이지만 자기 상품에 대한 사랑과 고객에 대한 마음 씀씀이에 숙연해지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먼길을 오가면서 많은 공부를 했노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어떤 종교에 귀의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웃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자신의 행위를 안으로 살피면서 보다 성숙한 삶으로 한층한층 쌓아 올리는 일에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스승은 아무 때나 마주치는 것이 아니다. 진지하게 찾을 때 그를 만난다. 그리고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앞에 스승은 나타난다.   
 

1999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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