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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所有]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山中書信

by econo0706 2007. 2. 1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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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한 달 가까이 감기를 앓다가 쿨룩거리면서 이삿짐을 챙겼다.
 
7년 남짓 기대고 살던 오두막이지만 겨울철 지내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영하 20도의 그 팽팽한 긴장감을 앓던 끝이라 몸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

 

눈에 덮인 빙판길을 오르내리려면 목이 긴 털신에 아이젠을 걸고 다녀야 하는데, 이런 일도 이제는 번거롭게 여겨진다. 장작 패서 나르고 개울에서 얼음을 깨고 물 긷는 일로 인해 내 왼쪽 엄지가 자꾸만 시큰거린다.

 

언젠가 아랫마을 김씨로부터 무슨 이야기 끝에 어디 바다 가까운 곳에 자기 친구가 살던 집이 있는데, 그 집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심히 흘려 듣고 말았는데 얼마 전 뒤늦게 그 말이 문득 떠올라 내 귀가 번쩍 뜨였다. 그 집에 한번 가볼 수 없느냐고 했더니 그러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북동쪽으로 크고 작은 고개를 넘고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올라간 지점이었다. 뒤쪽은 소나무가 무성한 산자락이고 앞은 바다가 내다보이는 곳에 달랑 오막살이 한 채가 있었다. 그야말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였다. 삼칸 슬레이트집인데 비워둔 지 오래되어 어설프디 어설픈 그런 오두막.

 

김씨는 내가 좋다면 자기 친구한테 말해서 빌려 쓸 수 있다고 했다. 전기가 들어오고 뒷산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이 양은 많지 않지만 식수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회의 같은 걸 거칠 일이 없는 나는 그 자리에서 결정을 짓는다. 우선 올 겨울 한철을 살아보기로 했다. 다시 또 새롭게 시작해 보는 것이다. 그 다음날부터 집 고치는 일에 들어갔다.

 

슬레이트 몇 장을 갈고 기름보일러도 부품을 사다가 고쳤다. 그 집에 어울릴 도배지를 그 근처 지물상에서 구해다 벽과 천장을 발랐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비닐장판을 걷어내고 종이장판으로 갈았다. 문짝도 하나 새로 해 달고 앞툇마루에 떨어져 나간 널빤지도 새로 끼웠다. 툇마루가 너무 거칠고 때가 끼여 그라인더로 갈아내고 기름칠을 했다. 전기 배선도 안전하게 다시 했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더니 이렇게 해서 새 오두막이 마련된 것이다.

 

혼자서 주섬주섬 이삿짐을 챙기고 있노라면,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옮겨갈 때의 기분을 미리 가불해서 쓰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인생은 나그네길......'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면서 이것저것 새집에 가서 쓰일 것들을 챙겼다.

 

이사가 몸과 생활도구만 옮겨가는 일로 그친다면 별 의미가 없다. 삶의 형태와 그 습관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평소의 내 지론대로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 수 있도록 데리고 가는 것들을 극도로 제한하기로 했다. 이 다음 이 집에 누가 와서 살더라도 크게 불편함이 없이 지내도록 배려하는 것이 먼저 살던 사람의 그 집에 대한 도리다.

 

우선 이부자리와 방석을 챙기고 몇 권의 책자를 상자에 꾸렸다.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지만 등잔과 초를 켤 사발을 챙겨 넣었다. 어디를 가나 차는 마셔야 하므로 다구도 이것저것 가렸다. 또 무엇이 필요한가 둘러보다가 숟가락 젓가락과 그릇들, 그밖에 소용되는 것은 현지에서 새로 구하기로 하고 최소한의 것으로 짐을 꾸렸다.

 

짐을 꾸리면서 돌아보니 서운해하는 것들이 더러 눈에 띈다. 조그만 장 위에서 목을 길게 뽑고 밖에서 돌아올 나를 어둠 속에서 기다리곤 하던 나무 오리, 두런두런 말을 걸면 잠잠히 받아주던 내 유일한 말벗인 그 오리가 내 떠남을 몹시 서운해하는 것 같다.

 

영하의 겨울철이면 마루방에서 내게 더운 체온을 아낌없이 내뿜어주던 무쇠난로도 말은 없지만 서운해한다. 빈집에서 겨울 동안 할 일이 없어 얼마나 무료해할까 생각하니 안되었다.

 

그리고 마루방 들창가에서 선들바람이 불어올 때면 아름답고 청아한 음률로 내 귀를 즐겁게 해주던 막대 풍경도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마냥 시무룩하다. 이와 같은 유정有情들은 함께 지낸 세월만큼 정이 든 것이다.

 

밖에 나가 여기저기 둘러보니 개울물 소리와 장작 벼늘과 헌식돌과 자작나무 돌배나무 산자두나무 등 다 눈에 익은 것들이다. 한동안 내 눈에 밟힐 것이다. 할애출가割愛出家란 말이 있다. 애착을 끊고 출가한다는 뜻, 출가 수행자는 크고 작은 애착을 끊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인정이 많으면 구도의 정신이 해이해진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7년 남짓 그것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보살핀 이 인연 때문에 떠나면서도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나는 골짜기가 쩌렁 울리도록, "겨울철 지내고 돌아올 테니 다들 잘 있거라." 하고 큰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바닷가 새 오두막에 도배를 마치고 나서 사흘을 묵었다. 아직도 쿨룩쿨룩 남은 기침을 하면서 익숙치 않는 주거공간에서 나그네처럼 엉거주춤 지낸다.

 

집의 방향이 동남간이라 바다에서 떠오르는 불덩이 같은 해를 방 안에서 맞이할 수 있다. 해돋이 때마다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이 세상 구석구석 두루 밝아지기를 염원한다.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을 지켜보고 있으면 해에서 뿜어 나오는 빛의 에너지가 내 몸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 나무 일광日光 보살!

 

밤으로는 동해바다 일대에  오징어잡이 배들의 집어등集魚燈이 장관을 이룬다. 어족들은 눈부신 등불을 보고 무슨 잔치인가 싶어 모여들었다가 잡혀 한 생애를 마친다. 등불에 속는 것이 어찌 고기떼 만이랴. 인간의 도시마다 벌어지는 밤의 유흥업소, 번쩍거리는 그 불빛 아래서 들뜬 기분에 흥청거리다가 무참히 한 생애를 마감하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 밤의 수상한 불빛에, 과장된 그 불빛에 속지 말아야 한다.

 

바다는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지 기슭에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내 베갯머리까지 아득히 들린다. 뒷산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마침내 저 바다에 이르러 함께 출렁거릴 것이다. 개인의 삶도 때가 되면 한 생애의 막을 내리고 저 큰 바다에 이르러 하나가 되듯이.

 

나는 올 겨울 넓고 넓은 바닷가에서 살아 움직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내 삶을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 한다.   
 

1999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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