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복싱비화]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염동균

--조영섭 복싱

by econo0706 2022. 11. 17. 14:57

본문

2019. 01. 15.

 

며칠 전 경기도 모처에서 서부권투회 모임에 참석했다가 반가운 분을 뵐 수 있었다. 오늘 복싱 비화의 주인공인 전 WBC 슈퍼 밴텀급 챔피언 염동균이었다. 서부회모임의 회장인 원동희, 총무인 채예석과 오랜 인연으로 염동균이 참석했던 것이다. 그들의 인연은 염동균의 롤모델인 전 동양 페더급 챔피언 김현이 은퇴 후 구로공단 체육관에서 원동희와 채예석을 지도했던 대표사범이었던 관계로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 현역시절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염동균 / 제공=조영섭 관장


구로공단 체육관은 이승훈, 원동희, 채예석, 정영수 등이 주축 대표선수였다. 안면을 마치 철갑을 두른 듯 두텁게 수비했던 독특한 폼은 김현의 폼에서 벤치마킹했을 정도로 김현의 파이팅에 매료됐던 염동균이었다.

프로복싱 사상 최다 전적 보유자로 131전 75승 26KO승 40패 16무를 기록하며 1960년대를 풍미한 김현은 뛰어난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톱 연예인 못지않은 명성과 인기를 누렸는데, 말년에 둔촌동 일대에서 어렵게 지내시다가 타계했다. 올곧은 성품을 지닌 선배복서였기에 원동희, 채예석 두 후배를 보면 그들의 스승인 김현 선배가 떠오른다고 그는 회고했다.

 

염동균을 마주하자 1970년대 초 그가 소속된 동신체육관에서 프로생활 때 숨어있는 비화가 생각났다. 당시 동신체육관에는 염동균을 비롯해서 홍수환, 고생근, 박인규 등 역대급 대표선수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 이들을 상대로 스파링을 경험했던 현 KPBF 심판부장인 고기봉은 후에 세계정상에 오른 김태식을 3회 KO로 잡은 중견복서였다.

 

▲ 원동희 회장, 염동균 챔프, 신정훈 관장, 채예석 사장(왼쪽부터)  / 제공=조영섭 관장

 

필자가 당시 홍수환, 염동균과 맞대결한 소감을 묻자 홍수환은 테크닉은 출중했지만 터프함이 부족해 별 어려움없이 스파링을 치뤘지만, 염동균은 차원이 달랐다했다. 터프함과 함께 묵직한 파워를 겸비해서 위협적인 존재였다며 염동균의 손을 들어줬다. 고기봉과 동문수학했던 WBC 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희도 필자의 질문에 고기봉과 동일한 답을 했다. 아마추어에서 최고선수권 우승, 전국체전 은메달 등 60전53승7패(29KO승)를 기록한 염동균이 아마추어 2전 전패를 기록한 홍수환에 비해 초창기 그들의 프로복싱 역사에서 한발 앞섰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1970년 3월 데뷔한 염동균은 1971년 12월부터 4년 6개월 동안 35전을 치러 33승2무를 기록했고 그중 17KO승을 올리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 중 동양타이틀 매치 2차례를 적지 일본에서 치러 연승을 기록할 정도로 그의 기량은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1975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치러진 동양타이틀 5차전에서 오른손이 골절되는 치명상을 입었다. 이후 염동균은 파이터에서 발레리나처럼 경쾌한 스텝을 밟는 복서로 변신했다. 아웃복서가 파이터로 변신은 쉽지만 키 작은 파이터가 아웃복싱을 한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 WBC슈퍼밴텀급 타이틀전에서 고바야시와 대결하는 염동균(오른쪽) / 제공=조영섭 관장

 

53전 46승 6무 1패 21KO승을 기록한 염동균은 1976년 8월 WBC 슈퍼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36전 23승 12KO승 4무9패를 기록한 챔피언 파나마의 리야스코에게 도전해서 3회, 7회, 8회에 KO직전까지 몰고가는 등 전라운드에 걸쳐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주심 로자딜라의 횡포에 의해 패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역대 세계타이틀전 사상 최악의 오심 중 하나였다. 비가 내리는 구덕경기장을 빠져나오는 염동균의 심정은 참담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잡힐 듯 말듯 다가왔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챔피언 벨트를 놓쳤지만 염동균은 붕괴된 멘탈을 추스르며 리야스코를 KO로 잡은 로얄 고바야시를 꺽고 115일만에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에 이어 제4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어둠의 터널 속에서 멀리보이는 가느다란 빛을 보면서 인내하며 얻어낸 타이틀이었기에 기쁨은 배가 됐다.

그는 1977년 5월 세기의 복서 고메즈와의 2차 방어전에서 타이틀을 상실했다. 그때 파이트머니 3000만원을 수령했는데 당시 방배동 땅값이 평당 몇만원에 불과했다고 말하며 재테크에 부실했던 것을 소회했다. 반면 장인이 부동산업을 했던 김기수는 명동에 1967년 평당 10만원에 구입한 130평 땅이 후에 평당 수천만원으로 치솟으면서 재벌급 자산가로 급부상했다고 말했다. 김기수가 1997년 세상을 등질 때 재산이 천억대였다고 전하면서 리야스코전 때 자신의 트레이너로 활약했던 김기수는 무척 건실하고 배울 점이 많은 선배로 기억했다.

필자가 볼땐 김기수는 복싱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체 복싱인들과는 거의 접촉을 하지않고 살았던 분으로 생각한다. 생전에 재산의 일부를 복싱에 투자해 본인의 타이틀을 건 ‘김기수 복싱배’ 등을 만들어 복싱 인프라구축에 일익을 담당했으면 국내 최초의 세계챔피언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후대에서도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분들이 많았으리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 IFBA스토르급 챔피언 박지현과 프로모터 염동균(오른쪽) / 제공=조영섭 관장

 

문득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1995년 천억원대의 대원각부지를 법정스님에게 기증한 자야라는 예명의 김영한이란 분이 생각난다. 그는 한때 연인이었던 천재시인 백석을 기념하기 위해 백석 문학상을 제정해 지속적으로 후원했고 큰돈을 기부했다. 이에 대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 돈은 그 사람의 시 한 줄 보다도 못하다고 답했던 적이 있었다. 가장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은 살아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이름이 빛나는 사람이다.

 

올해 칠순인 염동균과 담화를 나누면서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한국복싱의 역사이자 전설이기에 더없이 소중한 만남이었다고 생각했다. 현재 프로모터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앞으로도 한국복싱의 부활을 위해 힘써주길 바란다.

 

조영섭 /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아시아투데이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