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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비화] ‘갑갑이에서 돌주먹으로’ 문성길의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

--조영섭 복싱

by econo0706 2022. 11. 14.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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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2. 12.

 

지난 1월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 대강당에서 열린 제2회 대한민국 나눔 봉사복지대상 시상식에서 문성길 챔프가 수상자로 결정되어 필자도 참석했다. 문성길은 평소 장정구, 황영조, 유인탁 등 체육인들과 함께 양로원, 고아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한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문성길을 적극 추천했던 선배 체육인 임동술 동보ENC 전무는 이리농고와 전북체고에서 레슬링선수로 활약하며 전국체전, KBS 양정모배, 종별선수권을 석권하며 고교생 헤라클레스라 불렸던 전도유망한 레슬러였다. 하지만 한국체대 진학 후 목표감을 상실하고 레슬링을 접었다. 이에 반해 문성길은 고교 때 6개의 동메달을 획득 한국체대행이 불발되면서 지방대로 진학했고 그후 심기일전해 복싱역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같은 투기종목을 했던 임동술은 이런 후배 문성길을 높이 평가했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갈파한 성경구절이 생각난다. 문성길은 1961년 전남 영암출신이다. 영암은 야구의 최희섭, 유도의 조민선를 비롯해 거슬러 올라가면 왕인박사와 도선국사가 나고 자란 곳이다. 1979년 목포 덕인고에 입학하면서 복싱을 수련한 문성길은 넘치는 체력과 파워에 비해 소프트웨어가 부족해 얻어 터지는 일이 반복되는 평범한 복서였다.

당시 문성길의 별명이 권투를 갑갑하게 한다고 해서 이름대신 ‘갑갑아’라고 동료 선후배들이 놀리곤 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을 보내고 198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밴텀급으로 첫 출전한 그는 제12회 전국학생신인대회 준결승에서 동래공전 모보현에게 판정패를, 이어진 전국대회에서 RSC패를 당하고 주저 않았다.

 

▲ 1986년 아시안 게임 후 문성길(앞줄 오른쪽)과 권현규(뒷줄 가운데) / 조영섭 관장

 

밴텀급에서는 가능성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플라이급으로 체급을 내려 제30회 학생션수권대회에 출전하지만 이번엔 제11회 전국학생신인대회 최우수복서인 경주상고 정창구의 빠른 발을 잡지 못하고 준결승에서 판정패를 당했다. 이어진 전국체전 전남선발전 등에서 조대부고 김용호와 전남체고 김창렬에게 내리 4연패를 당했다. 그 후 한차례 더 전국선수권에 출전했지만 이번엔 대구공고 김상수에게 한차례 다운을 당하는 등 완패했다.

그러던 어느날 권현규와 스파링을 한 문성길은 인간 샌드백이 되어 일방적으로 맞아 얼굴은 퉁퉁 붓고 코피가 터져 만신창이가 됐다. 일찍 복싱을 수련한 권현규는 빼어난 동체시력과 유연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전성기 때는 한국체대 진행범과 목포대 이현주에게 단 2패만 기록할 정도로 공·수·주 3박자를 갖춘 완벽한 복서였다. 권현규에게 맞고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영암 시골집에 내려가자 문성길의 몰골을 본 부친은 “아따 너는 매일 겁나게 두들겨 맞고 패하니, 이제 제발 복싱 그만둬라. 얼굴도 못생긴 너가 권투까지도 못하니 차라리 깡패나 해라 이놈아”라며 문성길의 속을 박박 긁었다.

졸업반인 1981년에도 문성길은 31회 학생선수권대회에서 한영고 1학년 이방헌에게 패했다. 이어진 전국 우승권대회와 전국체전에선 이리 남성고의 최주영의 스피드와 테크닉에 밀려 연패를 당하고 이어진 전남·북 교류전에서 전북대표 김남기에게 또 판정패를 당했다. 김남기는 전년도 대통령배에 밴텀급으로 출전 전남의 김동길에게 완패했던 복서였지만 문성길에는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판정승을 거뒀다. 1982년 등록금을 내고 겨우 목포대에 진학한 문성길은 대표선발전 등에서 신창석에게 또다시 두차례나 덜미를 잡혔다.

 

▲ 문성길 챔프(오른쪽)과 김남기 선수(현 말글종합광고 대표) / 조영섭 관장

 

그러나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선발전은 문성길이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패배를 딛고 일어선 계기가 됐다. 문성길은 마치 숙성된 위스키처럼 고혹함을 풍기면서 성숙한 복서로 거듭 태어났다. 닭장 속에 닭들과 함게 어우러져 지내던 독수리가 드디어 언덕에서 창공을 바라보며 도약한 것이다. 그의 눈빛은 섬광처럼 강렬하게 빛났다.

대표선발전에서 월드컵 은메달 리스트인 장임석에 RSC승을 거두며 생애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 때부터 ‘갑갑이’라는 닉네임을 털어내며 돌주먹에 시동을 건 것이다. 아시안게임 본선에서 킹스컵에서 패했던 태국의 완차이 퐁수리를 다시 만나 역전 KO승을 거두며 자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자 각계 각층에서 격려금이 쏟아졌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300만원,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 200만원, 김승연 대한복싱연맹 회장이 150만원 등을 비롯해 전남도지사, 목포시장, 영암군수, 목포대 이사장 등 놀랍게도 1000만원을 상회했다. 그 돈을 부친께 드리자 입이 귀에 걸린 아버지는 “워메, 이렇게 잘생긴 우리 성길이가 5남매 중 최고 효자랑께”라며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부친은 당시 빚 800만원을 전부 탕감하고 나머지 돈으로 황소 2마리를 샀다. 이후 문성길은 1983년 로마 월드컵, 1984년 LA올림픽을 거쳐 1985년 월드컵대회에선 우승과 함께 베스트 복서로 선정됐다. 198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한국 복싱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고, 그 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2연패 달성에 성공하며 아마복싱 밴텀급 세계랭킹 1위에 등극했다.

 

▲ 홍기호 서원대 학생과장, 최주영 건강보험 동래지사 팀장, 문성길 챔프(왼쪽부터) / 조영섭 관장

 

그는 전성기 때 난적 허영모에 3전 전승을 포함 세계 최강 쿠바를 비롯 미국, 소련, 동독, 불가리아, 루마니아, 영국, 이태리, 유고, 푸에르 토리코 등 각 국을 대표하는 철권들을 돌주먹을 앞세워 쓰러뜨렸다. 특히 미국 국가대표인 프라이스와 폴벵키, 로버트 샤논 등 3명이 차례로 RSC패를 당하자 미국의 프로모터는 100만 달러에 스카웃하겠다고 언론에 공표하기도 했다. 문성길은 전형적인 슬러거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밴텀급에서 변정일에 판정승을 거둔 은메달리스트 불가리아의 흐리스토브도 2년 전 세계선수권에서 문성길에 2회 RSC 패로 무너진 복서였고 1990년 4월 다니엘 사라고사를 9회 KO승을 거두고 WBC 슈퍼 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한 폴벵키도 1985년 한·미국가대항전에서 문성길에게 난타당한 끝에 3회에 RSC로 패한 복서였다.

문성길은 1984년 8월부터 1989년 7월까지 5년동안 국내외에서 단 한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누가 갑갑이라고 불렀단 말인가. 비가 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새는 하늘을 날아가고 눈이 쌓여도 가야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오르듯이 신인시절부터 문성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신 키만한 가방을 메고 체육관에 가는 일상을 멈추지않았던 성실함으로 무장한 복서였다. 그런 그는 숱한 패배 속에서도 좌절을 딛고 일어나 결국 국내 유일하게 아마와 프로에서 각각 2차례씩 세계정상에 오른 복서가 됐다. ‘최고에 도달하려면 최저에서 시작하라’라는 명언이 있다. 이를 문성길이 직접 실증(實證)했다.

 

조명섭 /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아시아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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