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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마흔 네 번째] '무적 LG시대'의 강철허리, 차명석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3. 4. 2.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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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4. 25 

 

90년대 후반 메이저리그에서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거두며 선발투수로 등판하는 5일 간격으로 한국인들을 들뜨고 가라앉게 만들었던 박찬호가 주춤하기 시작했던 2002년. 사람들 마음 속 박찬호의 공백은 그 해 36세이브를 올리며 최정상급 마무리투수로 등장한 김병현이 채워주었지만, 한 경기를 내내 지켜봐도 나올는지 알기 어려운 마무리투수였던지라 시청률도 그랬고, 한국에서의 메이저리그 열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 해, 메이저리그를 중계하던 케이블 방송국의 특이한 야구해설가 한 사람이 조용히 화제를 모으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야구팬이 아니라면 알지 못할 수도 있는, 차명석이라는 이름의 선수출신 해설가였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하일성이나 허구연 같은 '에이스' 해설가가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중계석에 등장한 '중간계투 해설가'였는지도 모른다.

조용히 화제 모은 '중간계투' 해설가

"차명석 해설위원님, 혹시 올스타전에 관한 추억이 있으십니까?"


"예, 저는 올스타전에 관한 추억이 아주 많습니다. 올스타로 뽑힌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올스타전 기간에는 항상 가족들과 여행을 다녔거든요."

화면에 등장한 선수를 놓고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는 캐스터의 호들갑에 자신은 선수 시절 '10분에 한 명씩 나오는 선수'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대꾸하고, 야구선수 부인들이 하나같이 미인이라는 여담에 '내가 그 전통을 무참히 깨버렸다'고 무심히 말하는 해설가.

현역시절 '한국의 그렉 매덕스'라는 말이 있었다는 칭찬에 '어쨌거나 공 느린 것은 똑같다'고 대꾸하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시청자들은 배를 잡고 굴렀다. 그리고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한 열렬 지지자들은 그의 말을 엮어 인터넷을 통해 '퍼 나르기' 시작했고, 그것은 '차명석 어록'이라는 이름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제가 선수생활 할 때만 해도…'로 시작하는 완곡한 이야기든, 혹은 '제 자랑 같습니다만…'으로 시작되는 노골적인 이야기든 자신을 가운데 놓고 꾸미는 이야기에 익숙해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을 변두리에 세워놓고 그것과 대조해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을 조명하는, 그래서 '자학해설'이라고까지 불렸던 차명석의 이야기는 매력이 있었다.

전성기 직구 최고구속이 시속 140km에 미치지 못했던 그의 경험에 비추어 사람들은 선동열과 케리 우드가 던지던 140을 넘는 슬라이더의 위력을 실감했고, 선수생활 10년간 견제구로 잡은 주자가 세 명 밖에 안 된다는 그의 경험과 대조해 8년간 67명의 주자를 잡아낸 앤디 페티트의 센스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도 최고의 위치에 서지 못했을망정 10년간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달린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이었을지 처음으로 떠올려볼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입을 통해 선동열의 대척점에 서버린 것이 차명석이었지만, 사실 그는 그렇게 만만한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선동열 만큼이나 팀을 지탱하는 투수였고, 그 치열한 활약을 통해 '중간계투'라는 존재의 의미를 널리 알린 선구적인 선수기도 했다.

90년대에만 두 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90년대 최고의 인기구단'으로 불렸던 엘지 트윈스가 다시 한 번 우승에 근접했던 해는 97년이었다. 그 해 트윈스는 6할에 육박하는 승률로 페넌트레이스를 2위로 통과한 뒤 삼성 라이온즈와 플레이오프에서 5차전 혈투 끝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그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우승컵을 넘기고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선동열의 대척점에 선 투수, 차명석

ⓒ LG 트윈스 홈페이지그런데 마지막으로 우승했던 94년 트윈스의 전력이 이상훈(18승), 김태원(16승), 정삼흠(15승)으로 이어지는 막강 선발진이 이끈 것인 반면 97년에는 12승의 김용수와 11승의 임선동을 제외하면 10승대 선발투수 한 명 없이 준우승에 오른 것이었다는 점은 짚어볼 만 하다.

비록 타선에 신인 이병규가 등장한 해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비중을 지닌 김재현의 공백이 있었고, 또 아무리 타선이 막강하다 해도 마운드의 뒷받침 없이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는 것이기에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97년 트윈스 마운드를 지탱한 것은 선발투수가 아닌 한 명의 중간계투요원, 차명석이었다. 그 해 차명석은 계투로서 119.1이닝을 던지며 2.79의 평균자책점으로 상대 타선을 틀어막고 11승 7세이브를 기록했다. 일본 진출 전 한국무대에서 마지막 절정기를 누리던 철벽마무리 이상훈이 그보다 34이닝이나 적은 85.1이닝을 던지면서 기록했던 10승 37세이브, 2.11의 평균자책점과 비교해도 그 빛은 퇴색하지 않는다.

차명석은 자신의 말대로 시속 140km를 넘지 못하는 최고구속의 '그저 그런' 투수였지만, 캐스터의 말대로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제구력 투수 그렉 매덕스에서 따온 '차덕스'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제구력이 정확한 투수기도 했다. 물론 빠른 공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었지만, 최대한 대비시킨 빠름과 느림 그리고 스트라이크존 이 끝과 저 끝의 대조는 충분히 위력적일 수 있었다.

오른손 타자의 몸 쪽, 그리고 왼손 타자의 바깥쪽 홈플레이트를 반쯤 걸치며 찌르거나 흐르는 직구와 슬라이더가 그의 결정구였는데, 그것은 마무리 이상훈이 등장하기 전에 전세를 뒤집어야 한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힌 타자들에게 특히 까다로운 무기였다.

물론, 정교하지만 느렸던 그의 공은 한 번 경험한 뒤에 만나는 이상훈의 왼손에서 뻗어 나오는 150km 직구의 위력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앞뒤에서 서로를 빛내는 환상의 조합이기도 했다.

프로리그가 출범하면서 뒤늦게 마무리투수의 중요성을 인식한 한국야구였지만, 90년대 중반까지도 중간계투의 중요성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안정적인 계투의 운용이 없이는 마무리체제가 안정되기 어려웠다.

초창기에 무리한 완투와 연투를 강요해 전설적인 선발투수들을 소진시켰던 각 팀들은 중간계투의 몫인 6회와 7회를, 이번에는 선발투수에서 떼어 마무리투수에게 전가시키기 시작했고, 덕분에 김용수와 권영호는 선발투수와 달리 매일 준비하고 몸을 풀어야 하는 피곤함 속에서도 한 시즌에 무려 170이닝 이상을 던지는 혹사를 감내해야 했다.

그 때문에 90년대 중반 이전까지 6, 7회는 아무리 강한 선발투수와 마무리투수를 보유한 팀이더라도 피해갈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었다. 선발투수가 한계투구수를 넘어서 지쳐가던 시점, 그러나 동시에 마무리 투수는 아직 채 몸을 풀지 못한 그 순간에 투입될 수 있는 선수는 안정된 보직을 받지 못한 채 대기하고 있던 후보급 투수들이었고, 그들이 등판한 동안이 감독들에게는 가장 진땀나는 순간이 되곤 했다.

멍석이 깔리지 않은 곳에서 기꺼이 달리고 구른 삶

▲ 차명석 코치, "찬규야, 마음편히 던져라" / 조이뉴스 23


ⓒ LG 트윈스 홈페이지물론, 그나마 안타 한두 개라도 터지는 순간마다 별 수 없이 한숨을 쉬며 터벅터벅 마운드로 올라야 했던 마무리투수들은 시즌 후반이면 체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방화범'으로 몰려야 했다.

그러나 걸출한 마무리 김용수와 이상훈이 버티고 있던 탓에 데뷔 첫 해부터 중간계투라는 한직으로 내몰린 차명석이 90년대 내내 한 해 100이닝 가까이 소화해내며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그 아킬레스건을 메워낸 트윈스는, 강팀인 동시에 투수들이 쉽게 소모되지 않는 건강한 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성공은 조웅천과 김현욱이라는 '필승공식'들을 탄생시켰고, 오늘날 권오준, 최영필, 신철인 같은 국가대표급 계투들의 활약으로 이어지는 첫 매듭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기여로 차명석은 99년, 한국 프로야구에 존재했던 단 19명의 억대연봉선수 가운데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바로 그 시점이 한국야구가 중간계투의 가치를 깨닫고 인정한 순간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어디서든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열심히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조건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도 하고, 멍석을 깔아야 굿을 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빛나지 않는 자리를 빛내고 멍석도 깔리지 않은 마당에 신명을 불러온 이의 공은 더 크고 귀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관성과 편견, 그리고 그것이 낳는 열등감과 걱정과 자포자기하고 싶은 마음과 맞서 싸워 빚어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틈만 보이면 나를 무시하고 깔아뭉개려 드는 못된 세상을 앞에 두고 고민하다가, 문득 생각한다. 굳이 빛나는 선발이나 마무리 자리를 요구하기보다는 냉정한 자기평가 위에서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해 맡은 자리를 빛냈던 차명석에게서, 혹시 지금 배워야 할 것은 없는가 하고 말이다.

차명석의 말과 말


"94년도에 우승을 했을 때는, 2년에 한 번 꼴로 우승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길어지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현역 선수 시절을 떠올리며)

"해설을 계속 해보라는 분들도 있었는데, 나에게는 현장에서 뛰는 게 더 맞다고 생각했다." (방송해설을 그만두고 코치일을 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렇지만, 앞으로 기회가 오면 행정가의 길을 가고 싶다. 내 최종목표는 KBO의 첫 번째 선수출신 사무총장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

"홈런을 안 맞았다기보다는…, 이승엽 선수는 도루를 하는 선수도 아니고, 워낙 강한 타자니까 내가 슬슬 도망을 다니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선수시절, 이승엽 선수에게 한 개의 홈런도 맞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봉중근을 주목해 달라. 실력뿐만 아니라 스타로서의 성격과 품성을 두루 갖춘 후배다." (올 해 주목할 만한 트윈스의 투수를 묻는 질문에) -cbs 라디오 "파워스포츠"에서 한 전화인터뷰에서-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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