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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마흔 다섯 번째] 돌풍의 '닥터 K', 최창호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3. 4. 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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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5. 02

 

야구를 보다보면, 가끔 그런 선수가 있다. 선동열처럼 엄청난 업적을 이룬 것도, 임수혁처럼 끔찍한 비운을 겪은 것도 아니며, 김홍집이나 박충식이 그랬듯 잊을 수 없는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볼 때마다 삶의 어색한 구석에서 만난 미안한 친구처럼 애틋한 선수. 내게는 최창호가 그렇다.

야구명문 경북고를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은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았고, 역대 최고의 야수들인 유중일과 강기웅을 잡느라 이정훈을 버릴 만큼 자원이 넘쳤던 연고지 프로팀 라이온즈에는 바늘만 한 틈도 없었다. 몇몇 실업팀 입단을 타진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던 최창호가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약체팀 청보 핀토스의 연습생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최창호의 투구 / ⓒ 현대 유니콘스 홈페이지


대구를 떠나, 인천이라는 멀고도 막막한 땅으로 기약 없는 연습생의 길을 떠나는 아들을 온 가족이 따라나섰고, 아버지는 숫제 인천 도원야구장 앞에 구멍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가게 옥상에서 벌을 기르고 꿀을 모아 왜소한 아들의 몸을 돌보았다.

입단 2년차인 87년에 정식 선수지명을 받고 야구장에 설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2년 동안 1군 무대에서 그가 거둔 성적은 23.1이닝동안 두 번의 패전. 그리고 8점에 육박했던 평균자책점 뿐이었다. 그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팀의, 다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연습생 출신 2군 선수일 뿐이었다.

174cm의 작은 키에 눈초리도 밑으로 쳐져있는 순한 얼굴. 도무지 상대를 압도할 힘이나 카리스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박한 시골 소년에게 특별한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88년, 최창호는 운명의 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하나는 박정현이었다. 유신고를 갓 졸업한 그는 최창호와는 반대로 키가 190cm이 넘는 거한이었지만, 바람 불면 날아갈 듯 부실한 몸과 체력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잠수함 스타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나란히 서면 머리 하나 차이가 났던 두 소년은 돌핀스 2군 경기에서 하루 걸러 하루씩 선발을 주고받았고, 쉬는 날에도 죽이 맞아 같이 돌아다니는 기괴한 단짝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그들은 또 한 명, 정명원을 만나 삼총사를 이루게 된다. 군산상고와 원광대를 다니면서 쓸 만한 타자로 알려졌던 정명원은 대학 졸업이 가까워서야 투수로 전향을 했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영 다른 내성적인 성격에 낯선 팀과 보직의 막막함은 자연스레 숙소 한구석에 박혀서 야구에만 미쳐있던 최창호, 박정현과 이어지게 했다.

88년, 운명의 세 사람을 만나다

▲  500경기 출장 기념(2002년 5월 10일) / ⓒ LG 트윈스 홈페이지

 

겉모습은 영 한목에 꿰어지지 않는 구색이었지만, 모두 뭔가 이루어내고 말겠다는 의지로만 가득 찬 빈손들이었고, 또 야구 외에는 별 관심사가 없는 순둥이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가을 부임하자마자 돌풍의 설계를 시작한 김성근 감독의 눈에 곧 그 셋이 들었고, 그들은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선수들 스스로 경비를 모아 쌀이며 고추장을 챙겨 떠나 하루 열 시간 이상의 산악행군에서 흘린 땀을 계곡 얼음물 속에 들어가 식혔던 오대산 극기훈련을 시작으로, 고정시켜놓은 포수 미트를 겨냥해 하루 500개 이상의 공을 던지는 지옥훈련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 언젠가는 정상에 서겠다던 막연한 포부가 거친 호흡 속에서 현실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작은 체격을 만회하느라 키워온 최창호의 단단한 상체근육에 바짝 "실전용" 기운이 들어가자 직구는 시속 150km 언저리를 넘나들었고 커브의 낙차는 예리하게 날이 섰다.

선동열이 21승에 1.17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198개의 탈삼진으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던 89년, 박정현은 19승과 2.15의 평균자책점으로 두 부문 2위를 차지했고 최창호는 191개의 삼진, 2.22의 평균자책점으로 탈삼진 부문 2위와 평균자책점 부문 3위를 차지했다.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등판했던 정명원도 2.45의 기록으로 평균자책점 4위에 오르며 11승과 6세이브를 곁들였다.

프로야구사상 한 팀이 배출한 가장 경악스러운 "신인투수 3총사"의 출현이었다. 물론 신인왕은 그 중에서도 두드러졌던 박정현에게 돌아갔고, 만년 꼴찌의 늪에서 허덕이던 돌핀스는 별다른 전력보강 없이도 그들 삼총사의 힘으로 일약 3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해 삼총사의 활약은 타선과 수비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이루어낸 것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 있었다. 특히 최창호는 89년부터 91년까지 해마다 평균 220이닝 가량을 던졌고, 2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면서 탈삼진 3위 이내를 지키는 빛나는 투구를 했지만 그가 거둔 승수는 간신히 10승, 9승, 그리고 15승이었다.

경악스러운 "신인투수 3총사"

박정현이 등판했을 때는 아쉬운 대로 두세 점을 뽑아주던 타선이 최창호의 차례에서는 무득점으로 침묵하기 일쑤였고, 더구나 수비조차도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90년에 그가 9승과 함께 기록한 9번의 패전 중에서 무려 7번이 1점차 패배였고, 그 해 그가 허용했던 86개의 점수 중에서 수비 실책 등으로 내준 비자책점이 무려 16점이나 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최창호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타선이 받쳐주든 아니든, 수비들이 잡아주든 아니든, 심지어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그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공을 뿌렸다. 그것은 그리 애타고 비장한 표정도 아니었고, 또 무덤덤한 돌부처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제 할 몫 다하면 되는 것이라고 자신에게 되뇌듯, 그저 힘 닿는 대로 뿌리고 이따금 모자를 벗어 땀 한 번 닦아내는, 어쩌면 고단한 벌판에서 누가 보든 말든 묵묵히 혼자만의 깜냥대로 쟁기를 다루는 어느 농부의 표정이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 표정으로 그는 왼 다리로부터 시작된 몸의 대각선을 축으로 웅크렸던 온몸을 빙글 돌리며, 마치 발석차(發石車)에서 돌을 날리듯 공을 쏘아 날렸다. 작은 체구에서 시속 140km대 후반의 강속구를 짜내기 위해 온 몸의 힘을 순간적으로 모으는, 최창호만의 투구동작이었다. 공터의 아이들은 하나 둘 그 동작을 흉내 내기 시작했고, 학교의 야구코치들은 어린 투수들에게 그 동작을 따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느라 바빠졌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그들 삼총사는 정명원, 박정현, 다시 최창호의 순서로 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것은 단순히 많은 이닝동안 그들을 마운드로 내몰았던 코칭스태프의 탓만은 아니었다. 바로 타선도, 수비진도 의지할 수 없었던 그 시기에 온전히 한 몸으로만 경기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혹은 현실인식이 그들의 어깨를 긴장시켰고 확실한 삼진을 위해 매 타자에게 서너 개의 공을 더 던지게끔 했기 때문이다.

최창호는 박정현이나 정명원과 달리, 부상중에도 "화끈하게" 쉬지를 못했다. 때로는 부상도 "확실한" 것이 "애매한" 것보다 나은 경우가 있는 법이다. 91년에 생애 최다승인 15승을 올렸던 그는 그 해를 기점으로 조금씩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92년에도 부상 와중에 100이닝 가까이 던지며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선방했지만 3승에 머물렀고, 그 이듬해는 다시 162.1이닝동안 2.99의 평균자책점으로 호투하고도 7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94년에는 한층 살아난 타선의 덕으로 12승을 올렸지만 평균자책점은 4점대로 치솟고 있었다.

91년 기점으로 조금씩 내리막

아령을 든 최창호 / ⓒ LG 트윈스 홈페이지

 

그 뒤로도 그는 크고 작은 부상을 안은 채로 묵묵히 공을 던졌고,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해마다 100이닝 이상을 던지면서 삼진을 잡고 승수를 올리는 그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주는 이는 없었다. 그저 몇 경기 쉬면 상승세를 탔고, 조금 무리한다 싶으면 내려앉았다. 무심한 이들은, 그저 "원래 작은 선수들이 나이 먹으면 좀 일찍 내리막길을 타는 법"이라고 웅성거릴 뿐이었다.

98년. 프로야구에 뛰어든 지 3년째를 맞던 현대는 그 해 기필코 첫 우승을 이루고 말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97년 겨울, 이미 해체지경에 몰리고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에 9억을 주고 박경완을 데려온 현대는 98년 7월 31일, 또 한 번 회심의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레이더스에서 조규제를 데려와 불펜을 다지고, 트윈스에서 박종호를 데려와 "인간종합병원" 2루수 이명수의 뒤를 받치기 위한 것이었다.

대신 조규제의 대가로 현금 6억원에 얹혀 레이더스로 보내진 것은 "재기불능" 판정을 받은 박정현이었고, 박종호 대신 트윈스로 보내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하락세" 진단을 받은 최창호였다. 삼총사는 그렇게, 쓸쓸히 해체되고 말았다.

현대는 그 해, 선발투수로 부활해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 14승을 올린 주장 정명원과 뒤 세대 에이스 정민태의 힘으로 첫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얄궂게도 한국시리즈 6차전 혈투 끝에 유니콘스에 무릎을 꿇은 것은 트윈스였고, 유지현의 마지막 타구가 중견수 이숭용의 글러브에 빨려들면서 인천 하늘에 축포가 터지던 순간, 무겁게 가라앉은 트윈스 덕아웃에는 최창호가 앉아있었다.

그라운드에서는 정명원과 정민태와 김경기가, 다시 이숭용과 박재홍이 엉켜있었지만, 맞은 편 덕아웃 구석의 최창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또 한 번, 우승반지의 꿈이 사라진 허탈감과 10년 넘게 기다려왔던 인천팀의 우승이 이루어지고 말았다는 흥분이 묘하게 가슴 속에 소용돌이쳤다.

상대팀 덕아웃에서 지켜본 인천팀의 첫 우승

"당황스러웠다. 나는 저 쪽 팀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게 된 걸까 싶었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의지로 만들어진 상황이 너무나도 나를 화나게 하더라." (최창호, 06년 9월 20일자 <스포홀릭>과 한 인터뷰 중에서)

굳게 입을 다문 선수들이 각자 가방을 챙겨 떠나기 시작한 트윈스의 덕아웃에서 최창호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장내 스피커를 통해 울려나왔다. 우승 소감 인터뷰에 응하는 유니콘스의 주장 정명원의 목소리였다. 흥분과 감격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목소리였다.

"아… 예… 감사드리고…"

말을 잇지 못하는 듯했다. 뭔가 애써 뜨거운 것을 씹어 삼키는 듯도 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이어졌다.

"같이 고생했던 창호랑 정현이가 이 자리에 없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선수로나 팀으로나, 다시 연고지로서나 사상 첫 우승을 맞이했던 바로 그 순간, 함께 그 자리에 어우러진 동료선수들 대신 이제는 다른 팀으로 떠나간 두 선수의 이름을 떠올린 주장 정명원. 그러나 그 경솔함을 나무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인천 팀의 어제와 오늘을 보아온 팬들은 그 순간 물기어린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고 있었다. 그 삼총사는 바로 돌핀스의 역사였으며, 90년대 인천 야구팀에 뿌려진 씨앗이자 거름이었다.

셋이 걸으면 190대의 장신 박정현과 정명원 사이에 머리 하나가 쑥 들어간 170대 단신 최창호의 자리가 두드러지곤 했다. 그리고 출발점에서는 신인왕 박정현의, 그리고 뒷날에는 구원왕 정명원의 빛나는 자리 사이에 그보다 빛은 덜했지만 소리 없이 한 시대를 지켜온 당찬 투수, 최창호의 자리가 있었다.

지도자 생활 후 사업가로 변신

▲  최창호가 개발한 투수용 운동기구 / ⓒ 초이볼

 

그 뒤로 다시 네 해, 연습생 시절부터 모두 17년 동안 이어간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잠시 모교에서 지도자생활을 했던 그가 지금은 사업가로 변신해있다는 소식이다. 그렇지만 "변신"한 그가 만들어낸 것이 기껏 투수들의 변화구 그립 연습용 운동기구라니, 또 묘하게 우습다. 아무래도 그가 조만간 다시 지도자로 "변신"해 그 운동기구를 들고 불펜으로 돌아오게 될 것 같아서다.

도원야구장 앞길에서라도 우연히 만난다면 무심코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그래서 "누구신가" 하는 황당한 표정이 돌아오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인을 한 장 부탁하게 될 것 같은 내 마음의 에이스 최창호.

그래서 가끔 오랜만에 메이저리그로 복귀한 박찬호가 다시 된통 얻어맞다 내려갔다거나 하는 씁쓸한 소식 뒤 끝에 이유 없이 종종 떠오르는 그 이름.

뜬금없지만,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팀 돌핀스의 유민 중 한 사람이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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