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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패의 신화' 구대성, 한국 야구의 '마지막 초인'

---KBO Legends

by econo0706 2007. 2. 2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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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구대성 일러스트 / 출처=KBO

 

‘초인들의 시대’의 마지막 에이스

 

프로야구 초창기 역사에는 지금의 눈으로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넘친다. 에이스들은 완투와 연투를 시도 때도 없이 하고도 타자들을 가지고 놀았다. 한 시즌 30승(장명부), 0점대 평균자책점(선동열), 혼자서 한국시리즈 4승 1패(최동원) 같은 ‘불멸의 신화’들이 창조됐다. 그 주인공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처럼 보였다. 리그의 수준이 올라가며 ‘선수 보호’라는 개념이 생기고 혹사가 근절되면서, ‘초인’들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이제 보직을 가리지 않는 에이스의 팔을 바쳐 승리와 우승을 만드는 일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이자 반인권적인 사례로 인식된다.

그렇기에, 구대성은 이제는 끊긴 ‘초인 계보’의 마지막 이름처럼 보인다. 20년 넘게 소속팀과 대표팀의 ‘절대 에이스’로 활약하며, 누구보다 찬란한 업적을 일궈냈다. 한화의 마지막 우승, 한국 야구 첫 올림픽 메달, 2006년 WBC 4강 신화가 모두 혹사에 가까운 부담을 견딘 구대성의 왼팔에서 만들어졌다. ‘불패’라는 어마어마한 별명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구대성의 야구 인생에는, 믿기 힘든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 넘친다.

 

1. 사고 때문에 왼손 투수가 된 ‘오른손잡이 개구쟁이’

 

구대성이 어린 시절을 보낸 대전 신흥동에는 주택 건설을 위해 산을 깎은 곳이 많았다. 소년들은 그 절벽에서 밑으로 뛰어내리며 스릴을 만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터졌다.

 

“뛰어내릴 준비가 안 됐는데, 뒤에서 친구가 밀어버린 거예요. 거꾸로 떨어졌던 것 같아요. 오른팔이 부러져서 꽤 오랫동안 깁스를 했어요. 오른손잡이였으니까, 많이 불편했죠.”

 

팔이 부러진 꼬마 구대성의 해법은 간단(?)했다. 왼손잡이로의 변신이었다.

 

“오른손으로 하던 걸 다 왼손으로 하기 시작했어요. 익숙해지니까 할 만 하더라고요. 나중에 오른팔 깁스를 풀고 나서도 양손으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게 됐어요.”

 

왼손으로 할 수 있게 된 일 중에는, 공 던지기도 있었다.

 

구대성은 두 살 많은 형이 먼저 가입해 있던 신흥초등학교 야구부에 입단했다. 투타 모두 탁월한 재능을 뽐냈지만, 넉넉치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야구를 계속해야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고 결국 5학년 때 야구부를 나왔다. 평범한 어린이로 살던 어느 여름날, 시골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다 왔는데 집이 비어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수소문해보니 아버지가 형의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는 것. 할 일도 없어서 아버지를 찾아 야구장 관중석으로 갔는데, 경기 중이던 감독님이 어서 덕아웃으로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다. 아버지도 가보라고 등을 떠미는 통에 할 수 없이 덕아웃으로 가 다른 친구의 유니폼을 빌려 입었다. 야구 양말도 없어서 맨발에 빌린 스파이크를 신고 경기에 나섰다. 몇 달을 쉬다 왔지만, 실력은 여전했다. 얼떨결에 자신의 재능을 재확인한 구대성은, 그 뒤로는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35년 동안 다시는 마운드를 떠나지 않았다.

 

2. 가는 곳마다 절대 에이스

 

야구 선수로 진로를 결정한 구대성은 누구보다 독하게 운동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말이 안 되는 폭압적인 훈련을 군말 없이 소화했다. 포수 자리에 놓인 작은 의자의 양쪽 다리를 번갈아 맞추는 연습으로 제구력을 단련했고, 포수와 1분에 30개씩 캐치볼을 주고받는 무지막지한 훈련으로 스피드와 제구를 향상시켰다. 윗몸일으키기는 하루에 3천개씩. 모두 ‘실패하면 몽둥이질’이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자발적인 운동을 추가했다.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에 올라 하체를 강화했다. 학교에서 유성 온천까지 8km가 넘는 거리를 30분 만에 뛰어서 갔다. 실력은 쑥쑥 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최고의 유망주로 각광받았고 고교 시절에는 전국 최고 투수로 성장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두둑한 배짱도 소문나기 시작했다. 대전고 2학년 때 서울 신일고가 연습경기를 위해 대전에 왔다. 전국 최강팀을 만난 구대성은 흔들리는 듯했다. 1,2,3번 타자를 모두 볼넷으로 내보냈다. 당황한 감독이 마운드를 찾았다. “어디 아파?” 구대성은 놀라운 답을 내놓았다. 아픈 데는 전혀 없다고. 위기 대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만루 상황을 만들어 보았다고.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려갔다. 구대성은 4,5,6번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워 불을 껐다.

 

1989년 한양대에 입학하자마자 아마야구 최고의 왼손 투수가 된 구대성은 국제대회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89년 8월,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대륙간컵 조별리그 3차전 일본 전에서 구대성은 연장 12회까지 홀로 마운드를 책임지며 14탈삼진 3실점 역투를 펼친다. 빗맞은 끝내기 안타 때문에 패전투수가 됐지만, 구대성에게는 국제무대, 특히 일본 야구에 대한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 “콘택트만큼은 세계 최고인 일본 타자들이 제 공을 잘 못 치더라고요. 국제대회에서도 할 수 있겠구나 싶었죠.” 이 경기에서 구대성은 또 하나의 소득을 얻는다. 몸을 2루 베이스 쪽으로 틀어서 꼰 뒤 공을 던지는 독특한 투구폼의 소유자, 노모 히데오를 만난 것이다. 이날 5회에 등판해 연장 12회까지 8이닝 동안 삼진을 17개나 뽑아내며 2피안타 무실점 호투를 펼친 노모의 동작은 구대성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됐다. 그리고 훗날 구대성이 오랜 세월 동안 타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투구폼의 모티브가 된다.

 

구대성은 석 달 뒤, 대만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장배 한일전에서 10이닝 4안타 1실점의 눈부신 호투로 한국의 3대 1 승리를 이끌고 완투승을 기록한다. 한국 아마야구가 일본 전 9연패의 수렁을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일본 킬러 구대성’의 신화가 시작된 경기이기도 했다.

 

국내외 무대를 평정하던 구대성의 유일한 적은 부상이었다. 1990년 대학야구 춘계 리그 경남대 전. 구대성은 관중석을 찾은 여자 친구(이후 부인이 되는 권현정 씨) 앞에서 더욱 힘을 냈다. 경기 도중 확인한 직구 최고시속이 156km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구위를 뽐냈다. 그러다 5회 도중, 팔꿈치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서울의 유명 병원들을 찾아갔지만 원인을 찾지 못하다가, 모교인 대전고 앞의 조그만 정형외과에서 뼛조각 3개를 발견했다. 지금이야 비교적 간단한 시술로 제거가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낮은 의료수준 때문에 해결을 확신하는 의사가 드물었다. 구대성은 수술을 포기하고 재활과 기다림을 택했다. 5개월 뒤 다시 공을 던질 수 있게 됐지만, 팔꿈치에 부담을 덜 주려다 이번에는 어깨에 통증이 시작됐다. 정상이 아닌 구위로도 국내외 대회에서 최고의 활약을 이어갔지만, 결국 프로에 입단한 1993년 탈이 났다. 프로 데뷔 2경기 만에 어깨 통증으로 1군에서 사라졌다. 어깨 관절의 막이 닳아 얇아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결국 구대성은 프로 첫 해의 대부분을 재활로 보냈다. 재생이 불가능한 어깨 관절의 막을, 근육을 키워 보완해보자는 계획이었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6개월의 재활을 이겨낸 뒤 처음 공을 던졌다. 기적적으로 통증이 사라졌다. 그렇게 조금 늦게, ‘구대성의 시대’가 시작됐다.

 

3. 위대했던 1996년과 1999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1990년대 초반은 ‘투수 분업’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다. 선발투수는 선발로만 등장하기 시작했고, 김용수, 정명원, 조규제처럼 선발로는 나오지 않고 세이브 상황에서만 등판해 승리를 시키는 ‘전문 마무리투수’들이 등장했다. 프로야구 초창기의 막무가내식 ‘전천후 기용’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대성은 점점 특이한 존재가 됐다. 부상에서 돌아오자마자 팀 상황에 따라 선발과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맡는 ‘전천후 투수’가 됐다. 1995년, 12번만 선발 등판하고도 규정 이닝을 넘길 정도로 연투와 멀티 이닝 소화를 밥 먹듯 했다.

 

“원정을 가서 경기가 시작되면 버스에서 쉬어요. TV도 보고 기사님과 얘기도 하고 잠도 자요. 그러다 누가 뛰어와서 ‘형 준비하시라고 합니다’ 하면 일어나서 스파이크를 신어요. 롱토스 할 여유가 있으면 조금 하고, 아니면 훈련용 쇠공으로 팔만 풀고 바로 올라갔어요. 그러고는 내려오라고 할 때까지 던지는 거죠.”

 

몸 푸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눈에는 희한해 보이는 루틴도 만들었다.

 

“한여름에도 잠바를 입고 몸을 풀었어요. 빨리 땀을 내려는 거죠. 원래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 겨울에는 반팔 차림으로 운동할 때도 많았어요. 남이 뭐라고 하든, 저한테 맞는 방법이면 되는 거죠.”

 

구대성의 ‘마이 웨이’가 가장 경이로웠던 때는 1996년이다. 이닝을 가리지 않고 결정적 승부처 위주로 등판해 규정 이닝을 채웠다. 9월 18일 OB전에는 선발로 등장해 14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1실점 완투승을 올려 시즌 18승째를 기록했다. 최종 성적은 18승 24세이브에 평균자책점 1.88. 마무리투수가 다승왕과 평균자책점까지 1위에 오르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WHIP 0.76과 탈삼진 비율 35.1%는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로는 1993년 선동열에 이어 역대 2위였다. 조정 FIP(FIP+) 250.4도 선동열을 제외한 투수 중에는 역대 최고 기록. 즉 구대성의 1996년은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의 시즌 중 하나다. 당연히 MVP도 구대성의 차지였다.

 

더욱 경이로운 점은, 이 시기 구대성이 본인의 기용 방식을 혹사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는 거다.

 

“힘든 줄 몰랐어요. 그저 마운드에 올라가는 게 좋았고, 팀이 부를 때 올라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선배들은 더 막무가내 식으로 던지기도 했잖아요. 몸이 잘 견디고 있었으니까, 혹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 1996년 MVP를 수상한 구대성. 옆은 신인왕을 차지한 박재홍 / 사진 출처=KBO

 

서른 살이 된 1999년, 구대성은 또 역사를 쓴다. 예전보다 릴리스 포인트를 조금 올려 구위를 끌어올리며 8승 26세이브를 기록해 팀을 가을 잔치로 이끌었다.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 3.2이닝 역투로 승리투수, 2차전과 3차전 연속 세이브로 한국시리즈 행을 만들어냈다. 한국시리즈 상대는 삼성과 플레이오프에서 극적인 명승부를 펼친 롯데. 7년 전 한국시리즈의 아픈 기억 때문에 더욱 부담스러운 상대였지만, 한화에는 1992년에는 없던 ‘초인적 존재’가 있었다. 구대성은 1차전 6회 원아웃, 2차전 8회 원아웃에 등장해 연속 세이브를 올리며 원정 2연승에 쐐기를 박았다. 3차전 연장 10회 박현승에게 결승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됐지만, 4차전 한 점차로 앞선 9회를 삼자범퇴로 막고 세 번째 세이브를 올렸다. 10월 29일 열린 최후의 5차전. 한화가 9회초 로마이어의 동점 3루타와 장종훈의 결승 희생 플라이로 역전에 성공하자 다시 구대성이 등장했다. 9회말 선두타자 임재철에게 볼넷을 내줬지만, 다음 타자 강성우가 희생번트를 대는 순간 구대성은 승리를 확신했다.

 

“짧은 스윙으로 콘택트에 주력하고 왼손 투수에게 엄청 강한 타자였거든요. 그래서 저도 (강성우에게) 많이 약했어요. 정면승부 했으면 안타를 맞을 확률이 많았을 거예요. 그래서 번트가 너무 고마웠어요.”

 

▲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포수 조경택과 얼싸안는 구대성 / 사진 출처=KBO

 

한숨 돌린 구대성은 임수혁을 1루수 뜬공으로 처리했다. 마지막 타자는 박현승. 3차전에서 결승타를 맞은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3차전에서 변화구가 가운데 몰려 안타를 맞은 기억을 떠올린 구대성은 바깥쪽 직구 승부를 택했다. 원볼 2스트라이크에서 다시 바깥쪽 직구. 갖다 대기에 급급했던 박현승의 타구가 2루수 정면을 향했다. 한화 이글스가 창단 14년 만에, 다섯 번째 도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의 한을 푼 순간이었다. 5경기에 모두 등판해 1승 3세이브를 올린 구대성은 지금까지 구단 역사상 유일한 한국시리즈 MVP로 남아 있다.

 

4. 155구 완투승의 신화로 만든 첫 올림픽 메달

 

2000년 9월 27일 새벽. 구대성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조금 전 끝난 시드니 올림픽 준결승에서 우리 대표팀은 여러 차례 비 때문에 경기가 중단되는 ‘빗속의 혈전’ 끝에 미국에 무릎을 꿇었다. 편파적인 판정에 선수단 모두가 분노하고 있었지만, 구대성은 제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이틀 전 일본과 예선 마지막 경기에 선발 정민태가 타구에 발목을 맞는 바람에 1회에 갑자기 등판해 7회까지 책임진 구대성은 이후 문자 그대로 숨 막히는 통증에 시달렸다. 등과 가슴에 담이 오는 바람에 호흡조차 힘들었고, 왼팔은 아예 올라가지를 않았다. 그래서 미국과 준결승에 등판하지도 못하고 패배를 지켜봤다. 하필 도핑테스트 대상자로 선정돼 물을 3리터나 마시고 겨우 샘플을 제출한 뒤 선수촌에 돌아온 시간이 새벽 4시. 김인식 투수코치와 김용일 트레이너가 구대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오늘 낮 3-4위전에 등판할 수 있게 몸을 만들어라.” 새벽 6시까지 팔에 피를 뽑고 마사지를 하고 있으니 동이 텄다. 구대성은 두 시간만 자고 다시 야구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도착해서 김용일 트레이너가 선발투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팔이 안 올라가는 자신이 선발투수라는 걸 안 구대성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 경기를 앞두고 거르지 않는 루틴이었다. 아내는 일단 최선을 다해 보자고 남편을 격려했다.

 

경기 초반, 팔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던 구대성의 직구 시속은 140km대 초반에 머물렀다. 구위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구대성은 제구력과 자신감으로 버텼다. 4회를 넘어가면서부터는 기적처럼 통증도 줄어들었다. 팔 스윙이 정상적으로 가능해지자 속도도 빨라졌다. 일본의 괴물투수 마쓰자카와 함께 7회까지 팽팽한 0의 균형을 이어갔다. ‘약속의 8회’. 이승엽의 2타점 결승 2루타와 김동주의 쐐기 적시타가 터졌다. 9회초,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다시 구대성이었다. 투구수 130개가 훌쩍 넘은 상태였지만, 태극마크를 달고 있는 모두가 신뢰하는 투수는 구대성뿐이었다.

 

“불펜에서 송진우, 정민태 선배가 후배들이 몸을 풀려고 하면 공을 빼앗았대요. 이 경기를 책임질 수 있는 투수는 구대성 밖에 없다고 하면서요.”

 

▲ 올림픽 동메달을 확정한 후 기뻐하던 구대성 / 사진 출처=KBO

 

석 점차 리드가 주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구대성은 원아웃 이후 연속 안타를 맞고 한 점을 내줬다. 투구수는 144개. 김응용 감독의 교체 지시를 받은 김인식 코치가 마운드를 찾았다. 구대성은 거부했다. 안타 하나 더 맞으면 내려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더 맞으면 동점이야. 늦어.” “그럼 안 맞겠습니다.” 옆에서 포수 홍성흔도 구대성의 공이 좋으니 교체하지 말자고 거들었다. 결국 김인식 코치는 포기하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구대성은 다음 타자 히로세를 몸쪽 꽉찬 직구로 루킹 삼진 처리했다. 투구수 150개. 마지막 타자는 이후 요미우리의 전설적 포수가 되는 아베 신노스케였다. 스리볼 원스트라이크에서, 바깥쪽 직구에 아베가 가까스로 방망이를 갖다 댔다. 힘없는 2루 땅볼. 구대성이 ‘155구 완투승’으로 한국 야구의 첫 올림픽 메달을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투가 이 경기라는 데는 이견이 별로 없다. 구대성은 경기를 마친 뒤 왼쪽 발에 통증을 느꼈다. 무슨 일인지 살펴 보려했지만 양말이 벗겨지지 않았다. 찢어진 엄지발가락에서 피가 흘러 양말에 들러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5. 국제무대에서 이어진 ‘불패의 신화’

 

2000년 시즌이 끝난 뒤, 구대성은 해외 진출 기회를 잡았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로 구대성의 마음이 기울었지만, 한화 그룹 고위층까지 개입하며 결정된 첫 행선지는 일본 오릭스. 4년의 일본 생활 뒤에야, 35살의 나이에 뉴욕 메츠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다. 1년의 짧은 빅리거 생활은 마운드 위가 아닌 방망이를 든 모습으로 팬들의 머리에 남아 있다. 2005년 5월 22일, 당대 최고의 왼손투수 랜디 존슨을 상대로 2루타를 뽑아낸 뒤, 호세 레예스의 희생번트 때 2루에서 홈까지 달려 득점을 올린 순간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당시 혼신의 슬라이딩 탓에 왼팔과 갈비뼈를 다친 구대성은 결국 빅리그에 설 자리를 잃었다. 그래서 2006년 첫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표팀 명단이 발표됐을 때 구대성은 소속팀이 없는 ‘무적 신분’이었다. 1라운드를 위해 도쿄에 입성한 뒤에야 친정팀 한화 복귀가 발표됐다. 구대성은 자신의 마지막 국제 대회가 된 WBC에서 눈부신 역투로 다시 한 번 강렬한 존재감을 뽐낸다.

 

2006년 WBC에서 구대성은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도쿄돔 한일전에서 배영수에게 이치로를 맞출 것을 지시한 선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7회말 배영수가 선두타자 이치로의 엉덩이를 맞춘 뒤 등판한 투수가 구대성이라는 사실이다. 구대성은 세 타자를 깔끔하게 돌려 세워, 이승엽의 역전 스리런 홈런이 터지는 ‘8회의 기적’에 발판을 놓는다. 2라운드 첫 경기 멕시코전에서도 홀드를 올린 구대성은, ‘야구 종주국’ 미국과 2차전 승리에도 결정적 기여를 한다. 5회 원아웃 1-2루 위기에서 등장해 애틀랜타의 전설 치퍼 존스를 유격수 앞 병살타로 유도해 불을 껐다. 7회 마지막 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2루수 뜬공으로 유도할 때까지 3이닝을 무실점으로 버텨 한국 야구사상 최대 이변을 사실상 확정했다. 일본과 두 번째 맞대결에서도 8회초 이종범의 2타점 결승타 뒤 8회말에 등장해 세 번째 홀드. 구대성은 제1회 WBC 홀드왕에 오르며, 어떤 한국인 투수보다 위대했던 국제 대회 경력을 마무리했다.

 

6. 끝을 모르는 구대성의 ‘야구 사랑’

 

2007년 말, 베이징 올림픽 예선을 앞두고 구대성은 무릎 통증 때문에 대표팀에서 자진 하차했다. 무릎 인대 수술을 받고 돌아온 구대성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발목 아킬레스건을 떼내 무릎에 집어넣는 시술이 역효과를 낸 것. 탄력을 잃은 무릎 때문에 공에 힘을 실을 수가 없었다. 망가진 무릎으로도 3년을 더 버틴 구대성은 2010년 9월 3일 은퇴경기를 마지막으로 KBO 무대를 떠났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 끝을 모르는 야구 사랑, 이글스의 레전드이자 한국프로야구의 전설 구대성 / 사진 출처=KBO

 

구대성은 그해 말 재창설된 호주 프로 리그에 시드니 블루삭스의 유니폼 소속으로 리그 첫 세이브의 주인공이 된다. 2015년까지 시드니에서 마무리 생활을 이어갔고, 질롱 코리아의 감독을 맡은 2019년 또 한 번 마운드에 올라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53세가 된 2022년 , 다시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쉬다가 다시 던져 보니까 팔이 싱싱하더라고요. 시속 130km 정도는 나오는 것 같아요. 사회인 야구부터 다시 던져볼 생각입니다. 지금도 야구를 사랑하니까요.”

 

이성훈 기자 / SBS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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