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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피의 에이스, 배영수의 부활 스토리

---KBO Legends

by econo0706 2007. 2. 2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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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배영수 일러스트 / 출처=KBO

 

"이 팔로는 야구 못한다더라고요”

 

2006년 12월, 삼성이 자랑하는 푸른피의 에이스 배영수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토미존서저리(팔꿈치 인대접합수술) 권위자 제임스 앤드류 박사는 단호했다. "아픈 걸 참고 던지느라 진통제 등 약을 많이 먹어 간 수치가 높은 상태였어요. 이 팔로는 절대 야구 못한다는 말만 듣고 왔죠." 그만큼 당시 배영수의 팔꿈치 상태는 심각했다. 인대 수술이 필요한 환자의 심각성을 1부터 10까지 분류하면 10이었다. 그야말로 너덜너덜 할 지경이었다.

 

2~3년을 예측했던 재활

해를 바꿔 2007년 1월,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로스앤젤레스 조브 클리닉을 찾았다. "수술을 받고 나오는데 집도의가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은 (다른 환자보다) 더 오래 걸릴 겁니다. 100% 회복되지 않을 거에요. 2~3년은 봐야할 겁니다.'"

 

2005년, 2006년 한국시리즈 2년 연속 우승을 이끈 배영수의 팔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2006년 시즌 초부터 통증이 심각했다. 미국으로 MRI 자료가 건너갔다. 수술 소견이 돌아왔다.

 

하지만 수술을 미뤘다. 투지와 패기로 버텼다. "어깨가 아프면 공을 아예 던질 수 없는데 팔꿈치는 근육으로 버틸 수 있거든요. 진통제 먹어가면서 미련하게 버텼죠."

 

시즌 내내 아슬아슬하게 버텨주던 인대에 카운터블로를 날린 건 그 해 가을 유독 치열했던 한화와의 한국시리즈였다.

 

에이스 배영수는 1차전 선발로 등판, 한화 신인 류현진과 맞대결을 펼쳤다. 6이닝 무실점 투혼 속에 4대0 승리로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1승1패로 맞선 3차전. 12회 연장 승부 끝에 삼성이 4대3으로 승리했다. 배영수는 12회말 등판, 1점 차 승리를 지키며 세이브를 기록했다. 시리즈 향방의 분수령이었다.

 

곧바로 4차전에도 2-2로 맞선 8회에 등판, 2이닝 무실점으로 막았다. 연장 10회 김재걸의 2타점 적시타로 4대2 승리를 거두면서 배영수는 구원승을 거뒀다.

 

배영수는 3승1무1패로 진행되던 6차전에 구원등판해 홀드를 기록하며 3대2 승리에 징검다리를 놓았다. 한국시리즈 2승 1세이브, 1홀드. 4승에 모두 기여를 한 셈이다.

 

진통제를 먹어가며 버틴 인대는 이미 손 쓰기 힘들만큼 악화돼 있었다. 코나미컵 출전을 포기하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수술이 시급했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인대를 바쳐 2년 연속 우승을 이끈 에이스.

 

"마른 걸레를 짜듯 최대한 짜내서 150㎞를 던졌어요. 그 해 한국시리즈가 제 기억 속의 마지막 구위였죠. 지금 다시 영상을 봐도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경기였어요."

 

가장 밝은 순간은 어둠의 전조가 되기도 한다. 그 해 한국시리즈는 배영수가 걸어야 할 가시밭길의 출발점이었다.

 

잃어버린 10㎞/h 방황의 시작

 

2007년 1월,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

 

"2~3년 걸릴 것"이란 충격적인 소견에도 크게 위축되지 않고 씩씩했다. 열심히 재활에 매진했고, 1년 공백을 딛고 2008년 다시 마운드에 섰다.

 

이른 복귀 탓이었을까. 평균구속은 130㎞/h 후반으로 떨어졌다. 구속을 끌어올리기 위한 사투가 시작됐다.

 

경기를 하려면 변화구 위주의 피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저하된 구속 탓에 마음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시즌 막판 두 번의 선발등판에서 140㎞ 초반까지 구속을 끌어올렸다. 두산과의 플레이오프도 출전했다.

 

"그래도 복귀 첫해였던 2008년에는 9승(8패)을 했어요. 플레이오프까지 나갔죠."

 

일정을 앞당긴 1년 만의 복귀. 27경기에 나가 114⅔이닝을 소화했다. 여기에 가을야구까지…. 조금씩 스피드도 올라오고 있었다. 회복되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절망의 나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인 2009년. 마운드에 오른 배영수는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해야 했다.

 

"SK전 첫날 선발이었을거에요. 12㎞/h가 사라졌더라고요. 직구를 아무리 세게 던져도 128~130㎞/h에 그쳤어요. 엄청 당황스러웠죠. 강하게 던져도 공이 안가니까….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적으로 사라진 부분이 있었어요. 절망스러웠고, 화도 엄청 많이 났죠."

 

23경기 75⅔이닝 1승12패, 7.26의 평균자책점. 데뷔 후 최악의 시즌이었다.

 

2008년까지 77승을 달성하며 100승을 향해 순항하던 에이스의 추락. 믿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저는 사실 20대 후반이면 100승을 할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1군에서 일찍 시즌을 접고 2군으로 내려갔어요. 야구를 계속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였습니다."

 

레슬링에서 답을 찾다

 

승승장구 하던 배영수 야구인생의 가장 큰 시련. 익숙하지 않은 고통이었다. 극복보다 포기에 더 가까운 마음이었다.

 

"캄캄했어요. 야구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당시 시카고 컵스에 있던 성민규 단장에게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테니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이건 아닌 것 같다'며 만류하더라고요. 결국 구단과 상의 끝에 STC(삼성트레이닝센터)에 들어갔어요. 처음에 들어가니까 안병철 센터장께서 '한달 동안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운동 더 이상 안 할 생각으로 방황했는데 한달 후에 '마음잡았냐'고 넌지시 물어보시더라고요."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우연과 함께 찾아왔다. 몰래 밖에서 지인을 만나 술을 한잔 걸치고 들어오던 날 새벽이었다.

 

"당시 STC에는 다양한 종목 선수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어요. 배드민턴 이용대, 탁구 유승민 선수 모두 거기서 만났죠. 새벽에 술 취해서 몰래 들어오는데 레슬링 안한봉 감독님, 김인섭 코치님, 박장순 감독님이 계시고 선수들이 야간훈련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 새벽에 상상할 수 없는 체력훈련을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사실 구기 스포츠 외에는 잘 몰랐거든요.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저도 나름 코치들이 노터치 할 정도로 운동량이 많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착각이었어요. 노력이 부족했다는 걸 느꼈죠.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깨달음이 있었고, 노력이 시작됐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팔을 땀방울 만으로 다시 들어올리는 지난한 작업의 출발이었다.

 

▲ 벼랑 끝에 선 배영수, 그 당시 절실한 마음이 그를 새롭게 만들었다. / 사진 출처=KBO

 

변화가 필요했다. 정통파 투수라는 자부심을 버리는 용기가 필요했다. 체인지업과 투심을 장착해 몸쪽 공략에 나섰다.

 

"그 해 오키나와 마무리 훈련에 참가했어요. 안 해본 훈련을 하는데 노력 만으로는 잘 안되더라고요. 선동열 감독님, 오치아이 코치님, 양일환 코치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오치아이 코치님께서는 '다시 야구를 하려면 몸쪽을 던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일본 투수들 보니까 그게 맞더라고요."

 

155㎞의 강속구와 144㎞의 슬라이더를 거침 없이 가운데 던지던 패기 넘치던 전성기 배영수로선 불필요했던 과정.

 

고난과 역경이 지평을 넓혔다. 투수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것이 중요한 지 시야가 넓어지는 순간. 지금의 지도자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된다. 그 때부터 과감한 몸쪽 승부는 배영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지금까지와는 상상할 수 없었던 노력. 땀은 배신하지 않았다. 투구 패턴을 바꿨지만 잃어버린 구속도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2010년 두산과의 플레이오프는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어요. 4차전에 구원 등판해 세이브를 올렸는데 전력피칭에 긴장까지 하니까 스피드가 147㎞가 찍혔더라고요."

 

잃어버린 10㎞/h. 야구 인생의 기로에서 구속과의 사투를 벌여온 그로서는 그야말로 눈물나는 결실의 순간이었다. 양 팀 합계 16명의 투수가 총 동원된 사투. 배영수의 세이브로 4차전을 8대7로 잡고 2승2패 균형을 맞춘 삼성은 5차전에서 6대5로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자신감을 되찾으며 부활한 배영수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힘으로 윽박지르던 2000년 대 정통파 배영수와 달라진 2010년대 기교파 배영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거침 없는 청년 우승청부사, 선동열 감독과의 만남

 

'야구 명가' 삼성 라이온즈에는 프랜차이즈 우완 토종 에이스 계보가 있다.

 

김시진→김상엽→김진웅을 이을 샛별이 새로운 세기를 열고 등장했다. 경북고를 졸업하고 2000년 삼성 유니폼을 입은 우완 신인 배영수였다. 21세기를 프로에서 시작한 사나이. 삼성행은 운명이었다.

 

푸른 피의 에이스의 출발점. 배영수 입단과 함께 삼성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태동하고 있었다. 2년 차인 2001년 13승을 달성하며 청년 에이스의 탄생을 알린 그는 거침 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최고 155㎞ 강력한 볼 끝의 패스트볼과 140㎞가 넘는 구종가치 최상급의 슬라이더 만으로도 리그 최고 투수 구위가 되기에 충분했다. 오랜 동안 배터리로 호흡을 맞추며 2000년대 왕조시절을 함께 열었던 포수 진갑용은 "영수 공은 처음부터 좋았다"며 완성형이었을 암시했다. 다소 거칠었던 피칭스타일은 레전드 선동열 감독을 만나면서 세련되게 변했다.

 

"많이 배웠죠. 워낙 기본을 이야기 하시니까요. 하체 쓰는 방법과 중심 이동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니까 원래 빠른 공이 안정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배영수가 역대 프랜차이즈 에이스와의 차이점은 바로 우승 청부사 기질에 있었다. 그는 큰 경기에 강한 확실한 에이스 역할을 해냈다. 실제 입단 후 삼성은 목 말랐던 한국시리즈 우승 가뭄을 해소할 수 있었다. 선수 생활 마지막 해 두산 시절을 포함, 한국시리즈 최다인 8회 우승을 차지할 만큼 단골 우승자였다. 수술 전인 2002년, 2005년, 2006년은 정통파 배영수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던 시절.

 

2011년~2014년은 노련하게 확장된 기교파 배영수가 우승을 이끈 시절이었다. 다승왕도 MVP 시즌인 2004년과, 노련해진 2013년 두 차례 각각 다른 의미로 경험했다.

 

"야구, 처음부터 다시 해라" 김성근 감독과의 만남

 

2014년 11월26일. 삼성과의 FA 우선협상이 마감됐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서울로 향하던 차 안에서 한화 김성근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영수야, 야구 오래해야지." 한화와 3년 21억원에 FA계약을 체결한 배영수는 웃지 못했다. 15년간 몸 담았던 삼성. 푸른 피의 에이스를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광고까지 실어주며 응원해준 대구 삼성팬들에게 그는 거듭 "죄송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자신을 인정해준 새 구단, 새 사령탑. 프로 15년 차 베테랑 에이스에게 김성근 감독은 다시 신인이 될 것을 요구했다.

 

"김성근 감독님께는 다른 야구를 배웠죠. 처음부터 다시 배웠어요. 눈 닫고 귀 닫고 야구만 하라고,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최고령으로 미야자키 구춘리그에 갔죠. 감독님이 제게 어떤걸 느끼라고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야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경기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많은 걸 깨닫고 느꼈습니다."

 

▲ ‘야신’ 김성근 감독에게 다시 야구를 배운 배영수 / 사진 출처=KBO

 

프로입단 20년을 앞둔 2018년 겨울. 시즌 후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그는 진짜 은퇴의 기로에 섰다. 하지만 또 한번 귀한 인연과 연결됐다. 포스트시즌 단골 상대였던 두산 베어스였다.

 

"풍부한 경험과 다양한 구종을 갖고 있어 선발과 불펜에서 쓰임새가 클 것으로 본다." 당시 두산이 밝힌 현역 최다승(137승) 투수 배영수 영입 이유. 이 판단은 너무나도 정확했다.

 

2019년 10월26일 고척스카이돔. 배영수는 키움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연장 10회초 오재일과 김재환의 적시타로 2점을 앞서가자 10회말 1사 후 9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박병호와 샌즈, 키움이 자랑하는 중심 타자 둘을 범타 처리하며 감격의 우승 세리머니를 펼쳤다.

 

▲ 비록 주역은 아니었지만 그의 우승 세레모니에서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 사진 출처=KBO

 

배영수의 8번째이자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 이 순간은 두 차례의 팔꿈치 수술을 버텨내고 138승을 거둔 영원한 에이스의 은퇴 순간이 됐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속은 영원한 화두였다.

 

"은퇴할 때 그래도 142㎞가 나왔어요. 슬라이더도 괜찮았죠. 저답게 박병호를 슬라이더, 샌즈를 직구로 잡아냈어요."

 

불굴의 투지로 역경을 극복해 온 우승 청부사 다운 아름다운 마지막이었다.

 

정현석 기자 / 스포츠조선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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