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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육상 (16)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2. 11. 2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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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8.

 

2014년 11월 8일 타계한 이동찬 코오롱 그룹 명예 회장은 마라톤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고인은 1980년대 초에 2시간15분의 벽을 깨는 선수에게는 5,000만 원, 2시간 10분 내에 결승선을 통과하는 선수에게는 1억 원의 포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958년 제3회 도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이창훈이 우승한 이후 한국 마라톤은 1980년대에 접어들 때까지 길고 긴 암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인이 이 같은 약속을 했을 무렵 마라톤 한국 최고 기록은 1983년 이홍열이 뉴질랜드 해밀턴국제대회에서 세운 2시간17분41초였다. 세계 최고 기록은 2시간8분대에 진입해 있었다. 고인이 내건 15분 벽 돌파 포상금은 당시 엄청난 거액이었다.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했을 때 박철순, 김봉연 등 특 A급 선수들의 계약금인 2,500만 원의 두 배였다. 당시 고급 아파트의 대표 격이었던 서울 한남동 H 아파트의 30평형대 두 채를 살 수 있었다. 세계 수준과 격차가 워낙 컸기에 글쓴이를 비롯한 많은 체육 기자들은 '그저 해 본 약속'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이홍열은 1984년 마라톤 기록의 산실이던 동아대회에서 2시간14분59초로 골인해 1초 차이로 5,000만 원을 받았다.

 

1992년 7월 25일부터 8월 9일까지 벌어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한 344명(임원 97 선수 274)의 한국 선수단은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5개, 동메달 12개로 종합 순위 7위에 올라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거둔 성적이 결코 홈 이점을 살린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경기력이 스포츠 선진국 수준에 올랐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줬다.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한국은 여자 공기소총 10m의 여갑순이 대회 1호 금메달, 남자 마라톤의 황영조가 대회 마지막 260호 금메달을 차지하는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 ⓒ대한체육회

 

한국은 출발이 좋았다. 개막식 다음 날인 7월 26일, 260개 세부 종목 가운데 가장 먼저 벌어진 여자 10m 공기소총에서 서울체고 2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18살 소녀 여갑순이 금메달 과녁을 명중했다. 대회 1호 금메달이었다.

 

폐막 전날인 8월 8일까지 한국 선수단은 11개의 금메달을 따며 서울 올림픽에 못지않은 성과를 올리며 마지막 금메달에 대한 기대를 마라톤에 걸고 있었다. 황영조는 2시간8분47초의 당시 기준 한국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고 1991년 셰필드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유력한 우승 후보는 아니었다. 이 무렵 세계 수준의 선수들은 2시간6분대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스가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황영조는 선두 그룹에 끼어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한여름 뜨거운 날씨는 레이스 전부터 기록 경쟁이 아닌 치열한 순위 경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올림픽 주 경기장이 있는 몬주익 언덕을 넘어설 때 황영조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망의 마라톤 금메달이었다. 김재룡은 2시간15분01초로 15위, 김완기는 2시간18분32초로 18위를 기록했다. 마라톤 외 종목에서는 이진일이 남자 800m 예선 1조 3위로, 남자 높이뛰기 이진택이 예선 10위로 탈락하는 등 전반적으로 부진했다.

 

한국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여갑순이 명중한 ‘1호 금메달’에 이어 폐막식 직전에 황영조가 딴 ‘260호 마지막 금메달’까지 ‘첫 금메달과 마지막 금메달을 획득한 나라’라는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17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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