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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육상 (15)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2. 11. 21.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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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1. 21

 

1991년 7월 14일부터 25일까지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제16회 유니버시아드대회는 이전 대회와 마찬가지로 육상경기와는 별 관계가 없을 듯했다. 유니버시아드대회는 전통적으로 테니스가 메달박스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1년여 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월계관의 영광을 안게 되는 황영조가 7월 21일 셰필드 시내에서 벌어진 마라톤에서 역주행 해프닝이 있었지만 대회 최고 기록인 2시간12분40초(종전 2시간14분33초)로 2위인 일본의 겐지루 지쓰이(2시간14분29초)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4개월 전인 3월에 열린 제62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처음으로 풀코스를 뛰어 2시간12분35초의 기록으로 3위에 올랐던 황영조는 2번째 풀코스 도전에서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황영조의 국제 대회 첫 금메달은 대회조직위원회의 엉성한 대회 진행으로 하마터면 날아갈 뻔했다. 섭씨 38도의 무더위 속에 펼쳐진 레이스는 시작부터 엉망이었고 조직위가 출전 선수와 일반 선수를 구분하지 않아 황영조는 일반 선수들과 스타트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조직위의 무성의는 스타트 지점이 아닌 골인 지점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조직위는 스타디움에 들어서는 출전 선수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일반 선수는 왼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레인을 만들어 놓았다.

 

진행 요원은 선두로 스타디움에 들어온 황영조를 오른쪽 레인으로 인도했어야 하는데 먼 산만 바라보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황영조는 무심코 일반 선수들의 코스인 왼쪽 레인으로 접어들었다. 황영조가 그 레인을 따라 70m 가량 달려갔을 때 그나마 다행히 한 진행 요원이 부랴부랴 황영조를 오른쪽 레인으로 이끌어 정상적으로 골인할 수 있었다.

 

70m를 역주행했으니 황영조로서는 140m를 손해 본 셈이 됐다. 2위인 겐지루 지쓰이가 워낙 뒤처져 있었기에 천만다행으로 우승할 수 있었다.

 

▲ 1991년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여름철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한 황영조 / ⓒ대한체육회

 

이 대회까지 황영조의 개인 최고 기록은 2시간 10분 밖이었다. 그때 마라톤 세계 최고 기록은 2시간6분대에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92년 2월 2일, 한국 마라톤에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당시 상황을 복기해 본다.

 

"신 형, (황)영조가 일본 신기록을 세웠어."

 

황영조는 이날 벳푸~오이타 대회에서 2시간8분47초로 한국 최고 기록을 작성했다. 종전 기록은 3개월여 전인 1991년 11월 김완기가 춘천 코스에서 열린 제45회 조선일보대회에서 세운 2시간11분2초였다. 한국 마라톤으로서는 처음으로 2시간 10분대 안쪽으로 들어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급한 마음에 골인 지점이 있는 운동장 공중전화로 국제전화를 건 고 정봉수 감독은 얼마나 흥분했던지 황영조의 한국 최고 기록을 일본 최고 기록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때로부터 6개월여 뒤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 경기장 프레스 센터. 불과 몇 십분 전 몬주익 언덕에서 심장이 터질 듯한 레이스를 펼친 황영조와 모리시타 고이치가 나란히 앉아 수백 명의 취재진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기자회견장 한쪽에 있는 정봉수 감독의 얼굴에는 "이제는 내 할 일(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다했다"는 듯한 표정이 가득했다. 정봉수 감독은 그때 지병으로 많이 힘들어 하고 있었다. 황영조를 앞세운 한국 마라톤은 이후 김완기와 이봉주, 김이용이 잇따라 2시간10분대 안쪽 기록을 세우면서 '고속화시대'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2000년 이봉주의 한국 최고 기록 2시간7분20초를 기점으로 뒷걸음질만 하고 있다. 글쓴이가 고 정봉수 감독을 종종 떠올리는 까닭이다. <16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스포티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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