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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히터] 한국 야구는 극일(克日)의 역사다

--성일만 야구

by econo0706 2022. 9. 2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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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8. 05.

 

조선인의 축구 솜씨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이 두려워했던 것은. 그래서 일제는 한반도의 일본인들에게 조선인과의 축구 금지령을 내렸다. 축구를 하면 번번이 조선인들에게 패했다. 내지(일본)인의 우월성을 주장해온 일본으로선 곤혹스러웠다.

야구는 그들의 우위였다. 도입부터 한국보다 30년 이상 빨랐다. 야구는 축구와 달리 제대로 된 장비가 있어야 경기를 할 수 있다. 가난한 조선 사람들에겐 고가의 장비가 부담이었다. 널리 보급되기 어려웠다.

일본은 1915년 제 1회 고시엔대회를 개최했다. 대회를 주최한 아사히신문은 “야구야 말로 일본인 정서에 딱 맞는 운동이다”며 추켜세웠다. 한국은 광복 이후에야 첫 고교야구대회(1946년 청룡기)를 열었다. 일본은 1934년 프로야구팀을 창설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 도쿄 야구클럽이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은 1982년.

첫 한·일 국가대표 경기가 열린 것은 1954년 제 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였다. 장태영, 김양중, 김영조 등이 출전한 이 대회서 한국은 일본에 0-6으로 패했다. 한국과 일본 야구의 실력 차는 엄연했다.

 

▲ 1958년 전서울군 명단 '한국야구사상 초유의 최강팀 국내 4강호의 우수선수 선발' ,  / 조이뉴스24

 

▲ 이날의 '히로' 김양중 투수, 세기의 타자 튜질도 삼진 / 조이뉴스 24


한국 야구는 9년 후 국내서 열린 제 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서 처음으로 일본을 꺾었다. 김응룡이 홈런을 때렸고, 신용균이 완투했다. 3-0으로 승리. 1976년 콜롬비아에서 벌어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서 일본에 6-4로 이겼다. 해외에서 거둔 첫 한일전 승리였다.

이듬해 한국은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서 미국과 일본을 연파하고 세계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 미국과의 결승전서 최동원-김시진의 계투가 빛을 발했다. 1982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서 한국은 또 한 번 일본을 눌렀다.

2-2 동점이던 8회 한대화가 역전 결승 3점 홈런을 터트렸다. 선동열이 일본을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었다. 아마 야구에선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올라섰으나 프로에선 여전히 수준차를 보였다.

일본 야구에서 한물간 재일동포선수들이 국내에 와선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 장병부는 1980년 히로시마 카프서 15승을 올렸으나 1982년 3승으로 주저앉았다. 이듬해 한국으로 건너온 장명부는 30승을 기록했다.

일본 프로야구의 우위는 1991년 제 1회 한일 슈퍼게임서 확인됐다. 한국은 2승4패로 열세였다. 현장에서 이 대회를 취재했다. 2승조차 일본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4년 후 2회 대회 땐 2승2무2패로 균형을 이루었다.

 

▲ 한국 야구대표팀의 김경문 감독과 일본 야구대표팀 이나바 아쓰노리 감독. / 사진=뉴스1


2006년 제 1회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 예선서 한국은 일본을 3-2로 눌렀다. 서로 전력을 다한 경기였다. 4강전서는 0-6으로 패했다.

 

한국 야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었다. 두 차례 맞붙어 모두 이겼다. 한국은 예선서 일본에 5-3으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8월 22일 준결승전. 2년 전 WBC 대회가 떠올랐다. 예선에서 이기고 4강에서 패한. 그 대회서 일본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초반은 0-2의 열세였다. 2-2 동점이던 8회. 이승엽이 결승 투런포를 터트렸다. 2015 프리미어리그 준결승서 한국은 다시 한 번 사무라이 저팬에 4-3 역전승을 거두었다. 내년 도쿄 올림픽에서 12년 만에 야구 경기가 벌어진다. 일본에겐 이겼으면 한다.

 

성일만 기자 texan509@fnnews.com 

 

자료출처 : 파이낸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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