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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드 파크] LG 천적이 된 두산… '잠실 라이벌' 질긴 인연

---Outside Park

by econo0706 2022. 9. 2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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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7. 27

 

후반기에 접어든 올해 KBO 리그 화두 가운데 하나는 ‘천적’이다. 만날 때마다 이상하게 경기가 잘 안 풀리고, 결국에는 끝내 패하고 마는 상대. 객관적인 전력이나 팀 순위와도 무관하기에 더 설명하기가 어려운 단어다. 하지만 올 시즌의 천적 관계가 유독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 먹이 사슬이 다름 아닌 ‘잠실 라이벌’ 두 팀 사이에 형성됐기 때문이다. 

LG와 두산은 한국 야구의 메카로 불리는 잠실구장 양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적 라이벌이다. 하지만 LG는 올해 그런 두산에 아직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8번 맞붙어 8전 전패. 특히 후반기 첫 대결이었던 7월 20~22일 주말 3연전에서 싹쓸이 패배를 당해 깊은 내상을 입었다. 

내용이 좋지 않았다. 세 경기 모두 역전패였다. 심지어 21일 경기에선 5회까지 8-1로 앞서다 6회 2점-7회 8점-8회 5점을 연이어 내주면서 10-17로 졌다. 연승 가도를 달리던 LG의 흐름은 다시 연패 쪽으로 꺾였고, 2위 싸움에서도 후퇴했다. 하필이면 상대가 두산이기에 ‘전패’는 더 뼈아픈 결과다. 두 팀 사이엔 남다르게 질긴 인연이 있어서다. 
 

▲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장면 / 사진 출처 = LG트윈스 홈페이지


# 잠실을 나눠쓰게 된 LG와 두산 

LG와 두산의 숙적 관계는 ‘서울’이라는 커다란 시장을 양분하기 시작한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한국야구위원회는 서울, 인천, 대전, 광주, 대구, 부산을 중심으로 한 6개 구단 체제를 구상했다.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을 선정한 뒤 총수의 출신 지역에 따라 각 구단을 맡긴다는 복안이었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서울은 프로야구 출범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MBC(LG의 전신)가 선점한 상태였다. 반면 대전을 연고로 야구단을 창단할 기업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때 서울 팀 2순위 후보였던 두산이 OB라는 이름으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두산 그룹의 모태인 ‘박승직 상점’이 1896년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문을 열었던 터라 대전이나 충청도와는 연결고리가 없던 상황. 하지만 이용일 KBO 사무총장은 서울 연고를 원하는 두산에 “대전을 맡아달라”고 읍소했다. 결국 정부까지 나서 ‘3년 후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해주고, 서울의 선수 자원을 MBC와 배분하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다른 5개 구단 구단주들도 모두 동의하면서 OB는 서울이 아닌 대전에서 프로 첫 3년을 보냈다. 

약속대로 OB는 1985년 서울로 올라왔다. 첫 1년은 잠실이 아닌 동대문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했던 터라 두 팀이 크게 부딪힐 일은 없었다. ‘강북은 OB, 강남은 MBC’라는 이분법도 생겼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6년 OB가 잠실로 들어오면서 두 팀의 동거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일을 놓고 여전히 LG 팬들은 “LG의 집에 두산이 셋방살이를 시작했다”고 표현하고, 두산 팬들은 “방송사 텃세에 밀려 빼앗겼던 안방을 베어스가 다시 찾았다”고 맞서고 있다. 
 

▲ 3년 뒤 서울 이전을 조건으로 대전에서 창단한 OB베어스. / 사진 출처 = 두산 베어스 홈페이지


#주사위 던지기로 갈라진 두 팀의 역사

발톱을 감추고 있던 두 팀의 신경전은 서울 지역 신인 1차지명 우선권을 놓고 불이 붙었다. 처음에는 동전(앞면은 LG, 뒷면은 OB)을 던져 결정했고, 그 다음에는 주사위 두 개를 던져 더 많은 합계 숫자가 나온 팀이 이기는 방식으로 정했다. 대학과 고교에서 즉시 전력감 거물 유망주가 한창 쏟아지던 시기라 신인 지명이 더 중요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번번이 LG의 손을 들어줬다. 많은 야구 관계자들이 “1990년대 LG의 전성기와 두산의 침체기는 주사위가 갈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1986년 OB가 동전 던지기에서 승리해 ‘하이틴 스타’ 박노준을 데려갔지만 이후 2년 연속 LG의 행운이 이어졌다. OB는 1989년 LG를 이겼지만, 통산 4시즌 동안 10승만 남기고 은퇴한 투수 이진을 뽑는 ‘악수’를 뒀다. 1990년대 들어서는 더 확연하게 승부가 갈렸다. LG는 주사위의 도움 속에 1991년 송구홍, 1992년 임선동, 1993년 이상훈, 1995년 심재학, 1996년 이정길을 싹쓸이했다. 1994년에만 양 팀의 우선 지명 선수(LG 유지현, 두산 류택현)가 달라 주사위를 던지지 않았을 뿐이다. 당시 OB 스카우트들은 포스트시즌을 앞둔 선수들처럼 합숙 훈련까지 하면서 컨디션 조절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여전히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 카지노에서 딜러를 모셔와 주사위를 던지게 하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을 정도다. 

그 가운데서도 1992년 서울권 초고교급 투수 삼총사인 임선동-조성민-손경수를 둘러싼 눈치작전은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다. 당시 OB는 먼저 손경수를 만나 계약금 1억 원에 구두 합의를 끝냈다. 손경수를 미리 포섭해놓으면, 주사위 던지기에서 져도 조성민이나 임선동 중 한 명은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손경수의 아버지가 사인을 거부했다. 

이후 OB는 LG가 5000만 원을 더 주고 손경수와 계약했다는 첩보를 들었다. OB는 다시 임선동을 만나 현금 3억 원이 든 가방을 건넸지만, 임선동의 어머니가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싶다”며 돈을 돌려보냈다. 그 소식을 들은 LG는 발 빠르게 1억 원을 더 얹은 4억 원을 임선동에게 제시했고,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긴 후에도 곧바로 임선동을 지목했다. 그러자 OB는 결국 LG와 몰래 계약했다는 손경수를 지명하는 맞불을 놨다. 
 

▲ 89년 두산 베어스가 잠실 야구장에 처음으로 라커룸을 만들었던 당시 모습. / 사진 출처 = 두산 베어스 홈페이지


전쟁은 치열했지만 모두가 패자였다. 임선동은 연세대로 진학했고, 졸업 후 우여곡절 끝에 LG 유니폼을 입었지만 정작 전성기는 현대에서 보냈다. OB로 간 손경수 역시 계약 문제로 속을 썩이다 기대 이하의 성적을 올리고 쓸쓸히 야구계를 떠났다. 

어쨌든 이렇게 백전백패를 거듭하던 두산은 1997년엔 아예 주사위 던지기를 포기하고 지명권을 LG에 양보했다. 1998년 신인 김동주를 뽑기 위해 1년을 포기했다. LG는 두산이 넘긴 지명권으로 1997년 신인왕 이병규를 뽑았다. 두 팀에겐 결과적으로 ‘윈윈’이 됐다. 

# 치열한 신경전이 낳은 숱한 에피소드

양 팀의 희비는 1998년을 기점으로 크게 엇갈렸다. 이전까지는 LG의 전성시대였다. LG는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과 ‘신바람 야구’ 신드롬을 포함해 인기와 성적 모두 두산과 비교할 수 없이 승승장구했다. 맞대결 성적도 그랬다. MBC에서 이름이 바뀐 1990년부터 1997년까지 8시즌 동안 86승 5무 55패로 두산에 일방적으로 승리했다. 1993년에만 9승 9패로 동률을 이뤘을 뿐, 나머지 시즌은 모두 상대 전적에서 우세했다. 

하지만 그 후 LG가 급격히 하락세를 타고 암흑기에 접어드는 동안, 두산은 밥 먹듯 가을야구 티켓을 따내며 강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OB에서 두산이 된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1시즌 동안 LG 상대 전적 127승 3무 73패로 복수혈전을 펼쳤다. 2000년에만 LG가 10승 9패로 앞섰을 뿐, 나머지 10시즌은 두산이 모두 이겼다. 

자존심이 상한 LG는 급기야 2005년 5월 두산과의 주말 3연전을 앞두고 “두산을 이길 때까지 ‘두산전 패전 경기 티켓’을 갖고 있는 관중을 무료로 입장시킨다”는 이벤트를 내걸었다. 2004년 8월부터 계속된 연패를 끊고자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다. 실제로 이벤트가 개시 직후 첫 맞대결에서 LG가 두산에 역전패하자 다음 날 경기에 무료 관중이 대거 몰려들었다. 기세등등한 두산 팬들과 약이 오른 LG 팬들의 신경전이 야구장을 뜨겁게 달궜다. 

결국 바로 이날 LG가 승리해 두산전 8연패를 끊었고, LG의 무료입장 이벤트도 한 경기 만에 종료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너무 불쌍해서 져줬다”는 두산 팬들과 “팬들의 간절한 염원이 통한 것”이라는 LG 팬들이 팽팽히 맞섰다. 

이렇게 경쟁의식이 치열하니 경기 중 충돌도 잦았다. 2007년 5월 4일에 일어난 ‘격투’ 사건은 양 팀의 라이벌 역사에서도 여전히 ‘역대급’으로 회자된다. 두산 안경현과 LG 봉중근 사이에 빈볼시비가 불거졌고, 흥분한 안경현이 마운드에 있던 봉중근에게 달려가면서 유도를 연상케 하는 몸싸움이 벌어졌다. 
 

▲ LG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가 열리는 잠실야구장. / 사진 = LG트윈스 홈페이지


2011년 10월 2일에는 LG 유원상의 투구가 오재원의 머리 뒤쪽으로 날아가자 오재원이 발끈하며 유원상에게 다가가는 신경전도 벌어졌다. 당시 LG 소속이던 이택근이 달려와 오재원의 멱살을 잡았고, 양팀 베테랑 타자인 두산 김동주와 LG 이병규가 서로 말다툼을 벌였다. 7분이나 경기가 지연될 정도로 격렬한 충돌이었다. 

2014년에는 두 차례나 격돌이 일어났다. 7월 9일 경기에서 2-2로 맞선 9회초 타석으로 다가가던 오재원에게 LG 포수 최경철이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 것이 발단이었다. 두 선수가 서로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이자 더그아웃의 선수들이 모두 달려 나왔다. 그러나 더 파장이 큰 벤치 클리어링은 10월 11일 경기에서 나왔다. LG가 한꺼번에 4점을 뽑아 4-2로 역전한 4회초 1사 1·3루서 두산 외국인 투수 유네스키 마야가 LG 더그아웃을 향해 ‘어떤 말’을 내뱉었다. 양상문 LG 감독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야를 향해 걸어 나왔고, 분위기를 감지한 양 팀 선수들도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왔다. 양 감독은 “마야가 우리 벤치에 스페인어로 욕을 해서 흥분했다”고 했다. 마야는 다음 날 양 감독을 찾아가 직접 사과했다. 한 야구 관계자는 “양 팀은 과거부터 워낙 인상적인 벤치 클리어링이 많아서 웬만한 ‘설전’ 정도는 그냥 해프닝으로 여겨질 정도”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라운드 밖에서도 신경전은 자존심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잠실구장 이동 경로를 놓고도 한때 갈등했다. LG와 두산의 선수단 라커룸이 각각 3루와 1루 뒤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다. 두산이 홈팀일 때는 큰 문제가 없지만, LG가 홈팀이라 1루 쪽 더그아웃을 쓰는 날이면 양 팀 선수들이 경기 후 서로의 라커룸으로 돌아가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좁은 복도에서 선수들이 종종 부딪히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신경전도 벌어졌다. 이 때문에 결국 양 팀 고참 선수들이 “그날 이긴 팀은 당당하게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라커룸으로 가고, 진 팀은 복도 뒤로 돌아가자”는 ‘솔로몬의 지혜’로 합의를 봤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쭉 그렇게 하고 있다. 

 

배영은 / 일간스포츠 기자 

 

자료출처 : 일요신문 [제13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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