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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우] 운명을 맞이하는 날- 여자부 드래프트 현장

--윤봉우 배구

by econo0706 2022. 9. 24.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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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9. 13

 

내가 현대캐피탈에 입단했을 때는 실업배구 시절로, 계약 방식 역시 드래프트가 아닌 자유계약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 드래프트 현장의 생동감을 잘 모른다. 그래서 드래프트 현장을 찾아가 어떤 분위기고, 어떻게 선수들이 선발이 되는지를 글로 써보고 싶었다. 미래의 V리그 스타를 만나는 자리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을 찾았다.

 

태풍 힌남노가 북상 중이던 지난 5일 서울 리베라 호텔에서 2022-2023 한국배구연맹 여자 신인 선수 드래프트가 열렸다. 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비대면으로 진행됐던 신인 드래프트가 3년 만에 대면으로 열렸다. 드래프트장은 장내를 가득 채운 여자부 7개 팀 관계자와 선수, 학부모 등으로 인산인해였다. 선수들은 대회 코트장에서만 보던 친구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밝은 얼굴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호근 KBS N 아나운서의 행사 시작을 알리는 멘트와 함께 여자 신인 선수 드래프트가 시작됐다. 이번 드래프트는 총 16개 학교에서 49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올해 여러 중고 대회를 꾸준히 관전을 하면서 만난 배구 관계자들은 드래프트 전망이 썩 밝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드래프트장에서 만나 여러 관계자들도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드래프트! 전체 1순위는 예상대로 체웬랍당 어르헝(페퍼저축은행) 선수였다. 배구를 시작한 지 5년밖에 안된 선수지만, 195cm의 신장과 높이에서 발전 가능성이 너무나도 많은 선수이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 후 임혜림(흥국생명), 이민서(페퍼저축은행), 박은지(KGC 인삼 공사), 김윤우(IBK기업은행), 윤결(GS칼텍스), 임주은(한국도로공사) 선수가 차례로 1라운드에 지명됐다. 1라운드에 선발된 선수들은 많은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각 팀의 트레이닝복, 유니폼을 입으며 축복을 받았다. 곧이어 2라운드. 남아 있는 선수들과 부모님, 고교 지도자들 표정에선 1라운드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

 

1라운드에 지명된 선수들은 각 팀이 지난 일 년간 예의 주시를 했다고 해도 과언아 아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지명이 예상됐던 선수들이다. 고등부 대회 때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은 예상대로 모두 1라운드에 선발됐다.

 

하지만 내 시선은 각 팀 감독에게 이름이 불려 단상으로 올라가는 선수들이 아닌 대기석에 있는 선수들을 향했다. 두 손을 모으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도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드래프트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선수도 있었다. 프로팀의 지명을 받은 선수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날 때도 대기석을 지켜야 했던 선수들을 보며 내 마음이 더 아팠다.

신인 선수 드래프트장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내를 하며 준비했을까,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다린 약 1시간의 시간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걱정이 앞섰다. 프로팀의 지명을 받은 선수를 바라보는 지도자와 학부모의 기쁨도 잠시였다. 프로팀의 지명을 기다리는 더 많은 선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켜봤다. 자연스레 드래프트 현장의 분위기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각 팀 관계자는 고심 끝에 선수 선발을 이어 갔고, 2라운드엔 5명, 3라운드는 2명, 4라운드도 1명이 지명됐다. 수련선수도 6명이 지명돼 총 49명의 신청 선수 중 21명이 프로팀에 선발됐다. 많은 선수가 프로무대에서 배구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남은 선수들을 보는 내 마음은 불편함을 씻을 수 없었다.

 

그래도 프로팀의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들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드래프트장을 떠났다. 반대로 프로 지명을 받은 선수들은 밝은 표정으로 새로운 소속팀 지도자, 관계자와 일정을 조율했고, 일부 상위 지명 선수는 언론 인터뷰도 진행했다. 오늘 하루만큼은 어려서부터 해온 배구에 대한 기쁜 보상이라고 느낄 만한 하루였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한양대 3학년 재학시절 현대캐피탈에 입단했다. 그때만 해도 흔치 않았던 실업무대 조기 입단인 만큼 앞으로 한국 배구계에 한 획을 그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었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당시 최강팀이던 삼성화재의 아성을 깨겠다는 자신감이 컸다. 어린 나이에 프로팀의 일원이 됐다는 생각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자신감은 프로팀의 막내가 된 첫날 보기 좋게 깨져버렸다. 내가 지금까지 한 배구는 수박 겉핥기였다는 걸 알았다. 여태 수박의 껍질만 신나게 핥고 있었으니 달콤한 수박의 맛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배구라는 종목이 창의성만큼 기본기가 바탕이 된 반복 훈련이 중요하다는 것을.

 

프로에 와서 난 배구를 다시 배워야 했다. 기본적인 자세부터 체력까지…프로에서 왜 이런 걸 해야 하나 싶은 의구심도 들었지만 모든 과정이 코트에 나서기 위해 중요하고 필요했다는 것을 현역 은퇴한 최근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선수들이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범실과 점수 때문에 종종 패하는 경우도 있다. 내 작은 실수에서 시작된 패배로 인해 우리 팀의 순위가 바뀌고, 내 동료와 지도자가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프로선수가 되면 코트 위에서 더 신중해야 한다. 신중해야 승리할 수 있다. 팬에게 사랑받을 자격도 신중한 선수만이 얻을 수 있다. 경기 결과는 선수 한 명 한 명의 경기력이 바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많은 지도자분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다들 열심히 한다. 프로는 잘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기적이지 말아라! 배구는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내가 한발 더 뛸 때 내 동료가 편하고, 내가 한 번 더 소리칠 때 경기를 이길 수 있다’고 말이다. 나 역시 프로 무대에 처음 합류하는 신인 선수들에게 이 말을 강조하고 싶다.


신인 선수 드래프트장을 다녀온 뒤 글을 쓰다 보니 글이 다소 무거워져 간다. 꼭 지금의 내 감정과 닮았다. 프로에 선발되지 못한 선수들에 대한 짠한 마음, 그리고 프로에 입단했다고 들떠 있을 선수들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지금의 이 감정은 오롯이 우리 배구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의 아쉬움, 그리고 프로 무대의 막내로 합류할 이들의 기쁨. 이 모두가 다가올 2022~2023 시즌에 함축되어 멋진 경기로 나타나길 기대한다.

 

윤봉우 / 전 프로배구 선수, 현 이츠발리 대표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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