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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 난투사] (20) 부산관중, 박동희 청문회→난동…끝내 유혈사태

---[韓國프로野球 亂鬪史]

by econo0706 2022. 9. 26.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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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5. 21.

 

1980년대 후반에 기승을 부렸던 관중 난동은 1990년 들어서는 더욱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관중 난동은 마치 전염병처럼 번졌다. 프로야구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라 할 것 없이 심심치 않게 난동이 일어났다. 

사회적 병리현상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관중 난동은 특이한 현상마저 보였다. ‘노상 청문회’가 바로 그것이다. 홈팀의 성적이 나쁠 때마다 흥분한 관중들이 구장 본부석 출입문 앞에서 경기장을 나가는 감독을 붙잡아 놓고 닦달을 하거나 따지고 대드는 것이다.

몇 사례를 보자.

그해 5월 22일 LG 트윈스가 잠실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에 5-8로 지자 LG를 응원하는 80여명의 극성팬들이 정문 출입구를 막고 백인천 감독의 공개 청문회를 요구하며 격렬한 항의 소동을 벌였다. 관중들은 “백인천 감독은 홈경기 3연패의 원인을 명확히 밝혀라.”, “선수들의 투지와 승리에 대한 집념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따졌다. 일부 술에 취한 관중들은 정문셔터를 파손하고 구장 경비요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정문 앞에서 농성을 했다.

 

▲ 부산 사직 구장 난투극 모습 / 조선일보


7월 12일, 이번에는 롯데 응원관중들이 잠실구장에서 열렸던 LG전 대패에 흥분, 김진영 감독을 성토하며 청문회를 요구했다. 경기가 끝난 밤 9시30분께 관중들은 롯데 선수단과 맞서 1시간 동안이나 대치하는 사태를 빚었다. 당시 목격자들은 일부 롯데 선수들이 관중을 버스로 끌고 올라가 구타했다고 주장했다. 관중들끼리 치고받는 바람에 한 관중이 맥주병에 옆구리와 팔꿈치를 찔려 병원에 입원하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거물 신인투수 박동희, 청문회에 끌려 나가다 

 1990년 7월 24일, 그날 롯데가 오랜만에 가진 부산 홈경기에서 빙그레 이글스(연속경기)에 1무1패로 부진하자 300여명의 부산 관중들이 경기 후 1루 쪽 롯데 덕 아웃에 오물을 집어던지고 스탠드에 불을 지르는 등 난동을 부렸다. 그 소란 통에 집으로 돌아가려던 박동희가 흥분한 관중들에게 붙잡혔다.

김진영 감독을 비롯해 코칭스태프, 선수들은 구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덕 아웃에 갇혀 있었으나 그날 등판하지 않았던 박동희가 신인인 탓에 멋모르고 차를 타러 나가다가 관중들에게 에워싸여 영문도 모르고 ‘노상 청문회’에 나가게 됐던 것이다.

관중들은 박동희를 붙잡아놓고 “너는 뭐 하느냐.”, “술을 얼마나 먹느냐.”는 따위로 다그치면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20여분 동안 심문을 당했던 박동희는 친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험악한 자리를 벗어났다.

소동은 밤 10시 40분께 전투경찰이 출동, 관중들을 해산시킨 뒤에야 겨우 진정 됐다. 소란의 와중에 롯데 투수 장태수의 승용차가 관중들에 의해 찌그러졌고, 장태수는 실랑이 통에 오른팔에 찰과상을 입었다. 그날 관중들이 소동을 피우는 가운데 여러 건의 소매치기 사건이 발생,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기획한 소란이 아니냐는 의심을 자아냈다. 난동 관중들의 대부분은 술에 취해 있었고, 10대들이 주류를 이뤘다.

박동희는 1990년에 롯데에 입단, 1992년에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최우수선수(MVP)로도 뽑혔으나 1997시즌 도중 삼성으로 이적한 뒤 빠르게 내리막길을 걸은 끝에 2001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한 때 한국프로야구 판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박동희는 재능을 활짝 꽃피우지도 못한 채 2007년 3월 22일 새벽 교통사고로 서른아홉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유혈 난동, 관중 7명 구속 

1990년 7월에 접어들자 롯데는 삼성 라이온즈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7월 13일(대구구장)부터 7월 27일(마산구장)까지 삼성에 4연패를 당한 뒤 7월 28일에 부산 사직구장에서 삼성을 다시 만났다.

관중들의 분위기가 자못 흉흉했다. 롯데가 7월 28일 경기마저 2-8로 크게 지자 관중들의 분노가 터졌다.  

롯데의 패배가 굳어지자 관중들은 그라운드에 오물을 집어던지며 난동을 예고했다. 흥분한 관중들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경기장 본부석 출입문 유리창을 부수고 기물을 파손하면서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격렬한 대치전 속에 전투경찰 한 명이 이가 부러지는 부상도 입었다. 술에 취한 한 관중이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구장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 관중 난동의 와중에 사직구장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한 관중의 모습 / 일간스포츠 제공


당시 <일간스포츠> 기사는 ‘쇠파이프로 무장한 일부 관중들과 전투경찰이 대치, 백골단 출동, 최루탄까지 쏴 진압’이라고 관중 난동을 압축해서 표현했다. 사직구장에는 폭력이 난무했고, 소매치기가 활개를 쳤다. 선량한 시민 보호는 뒷전이었다.

소란의 와중에 몇 관중들이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그 때문에 특정인이 관중들을 의도적으로 선동하고 소란을 부추긴다는 의혹을 샀던 것이다. 당시 사직구장에서 관중 난동은 상습적으로 일어났지만 관할 동래경찰서가 ‘강 건너 불구경’ 식으로 소극적 대처하고 출동도 뒤늦게 해 관중 해산에만 급급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롯데 구단 측도 난동의 주모자들을 대충 파악하고 있어 경찰과 적극 공조하면 난동 관중 소탕이 가능한데도 이를 외면, 선량한 관중만 애꿎은 피해를 본다는 소리가 높았다. 

 

홍윤표 선임기자

 

자료출처 :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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