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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탁구 (1)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2. 11. 1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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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2. 06

 

탁구는 역사나 기원이 다른 종목에 견줘 정확성이 떨어진다. 농구는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가 1891년 12월 21일 미국 매서추세츠주에 있는 스프링필드 YMCA 트레이닝 스쿨에서 사상 첫 경기(당시 9인제)를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물론 야구와 축구, 필드하키 등 다른 구기 종목들도 탁구처럼 기원이 분명하지는 않다. 탁구는 상대적으로 더 불분명할 뿐이다.

 

중세 이탈리아의 ‘루식 필라리스’라는 놀이에서 변화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역시 중세 프랑스 궁전에서 하던 ‘라파움’이란 놀이가 진화된 것이라고도 한다. 이름도 일정하지 않아서 고시마, 프림프림, 와프와프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이런 가운데 남아프리카 지역과 인도 등 영국 식민지에 살던 영국인들이 테니스에서 힌트를 얻어 더위를 피해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놀이로 만들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탁구의 영문 표기인 ‘table tennis’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하이어트 형제를 비롯한 여러 발명가들에 의해 태어난 합성수지 셀룰로이드를 탁구공에 적용한 이는 영국의 제임스 깁이다. 이에 앞서 미국에서는 셀룰로이드가 당구공을 만드는 데 이용됐다.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기원하고 용구는 영국에서 개발된 종목답게 1900년 무렵에는 전 유럽에 탁구가 널리 보급됐다.

 

1902년 영국에서 탁구협회가 창설됐고 1926년에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잉글랜드, 독일, 헝가리, 스웨덴, 웨일즈 등 9개 나라 또는 협회가 참가한 가운데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탁구연맹(ITTF)이 발족했다. 이어 그해 제 1회 세계선수권대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 1928년 2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탁구대회 경기 장면. 90여년 전 사진이지만 오늘날의 탁구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고 사진 앞쪽 탁구대에 붙어 있는 ‘B 卓’이라는 종이가 눈길을 끈다. 이날 경기에는 A B C 3개의 탁구대(卓球臺)가 사용된 듯하다. / ⓒ 대한체육회

 

우리나라에 언제 탁구가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924년 1월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일일신문 주최로 제1회 핑퐁경기대회를 개최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열린 첫 번째 탁구 대회로 알려져 있다. 1926년 제2회 대회에는 300여 명의 남녀 선수가 출전해 성황을 이뤘다고 하니 보급 속도가 매우 빨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어 제 1회 전조선탁구대회가 1928년 개최됐고 이 대회는 1937년 제10회 대회까지 이어졌고 뒷날 한국이 탁구 강국으로 뻗어 나가는 발판이 된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과 남승용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해 한반도가 기쁨의 도가니가 된 가운데 1936년 8월 5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제17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오늘날의 전국체육대회)가 열렸을 때 탁구는 수상(수영), 권투(복싱)와 함께 신설 종목으로 추가됐다. 전조선종합경기대회에서 처음으로 열린 이 대회 탁구 결승에서는 중등부의 황치옥이 한홍순을 3-0으로 완파하고 우승했으며 일반부의 주택홍은 변용환을 3-0으로 누르고 패권을 차지했다.

 

1930년대 한반도에는 여러 탁구 단체가 주관하는 여러 대회가 있었다. 전조선학생탁구연맹의 전조선학생탁구대회, 조선탁구협회의 전조선남자탁구선수권대회와 전조선여자탁구선수권대회, 조선여자체육장려협회의 전조선여자탁구대회 등이다. 이로 미뤄 볼 때 탁구는 축구와 야구, 농구 등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은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2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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