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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월드컵은 과거, 다시 앞으로 나아갈 때

--이재성 축구

by econo0706 2022. 12. 2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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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26

 

한 해가 지나간다. 연말이 되면 늘 평소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올해처럼 월드컵이라는, 축구선수 삶에서 가장 특별한 이벤트가 열린 해에는 더 그렇다. 꿈의 무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어 보람차고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뿌듯하지만, 한 편으로는 2022년을 돌아볼 때 월드컵으로 시작해 월드컵으로 끝나는 내 생각의 연결고리가 조금 아쉽기도 하다. 내가 올 한해 실천한 모든 결정과 선택이 월드컵을 위한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번 칼럼을 통해 마음을 새롭게 다잡기로 했다. 과거의 영광에서 배울 것을 배우고, 현재 나의 상태에 집중하고, 2023년의 계획을 세우려 한다.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대하는 태도가 매년 성숙해지길 바라며.

과거를 통해 배우기

# 결단

올해 가장 아픈 손가락은 바로 나의 부상이다. 지난 시즌 막판에 두 차례 다치고, 그 이후에 또 발목 부상을 입었다. 9월 대표팀에 소집되었을 때 45분만 소화했다. 독일로 돌아오고 나서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고 월드컵에 갈 수 있을까? 내가 월드컵에 가는 게 도움이 될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준비는 해보자고 다짐했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전문적인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중요한 대회를 앞둔 선수로써 누군가 내 옆에서 오전히 나를 치료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 알고는 있었지만 늘 망설였다. 그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과 돈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고민했다. 이번엔 정말 필요하다 느꼈고, 한국에 계시는 선생님을 모셔 왔다. 나의 발목과 컨디션이 월드컵에 가기 전까지 더 안 좋아지지 않도록 매일 마사지와 치료를 받았다. 선생님의 도움 덕분에 월드컵에 조금 더 나은 컨디션으로 나설 수 있었다. 내가 그런 결단을 하지 못하고 이번에도 망설이다 끝났다면 이 멋진 무대의 마무리는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인범이와 의조도 도움을 받았다. 내가 필요해서 모셔 온 선생님이지만, 다른 동료들도 도움을 받았으면 했다. 같이 월드컵을 준비하는 친구들이고 나만큼 월드컵이 간절하다는 걸 알기에 외면할 수 없었다. 이 역시 작은 결단이기도 하다. 선생님이 없을 때 부상을 입거나 컨디션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데도 흔쾌히 동료들을 위해 양보했다. 선생님은 나의 결정에 놀라워했다.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월드컵에서 잘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친구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이런 결단을 통해 나에게 투자하는 게 향후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았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얻는 게 많았다.

#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벤투 감독님은 한국 축구 대표팀을 향한 팬들과 언론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고 계셨다. 그 기대로 선수들이 압박감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도 느끼셨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대는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다. 감독님은 우리에게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자’라는 걸 강조했다. 그 말씀이 내게 크게 와닿았다. 모든 사람의 기대를 충족해줄 수 없는 건데 그렇게 하고 싶어 전전긍긍하던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압박감에서 점점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해야 할 것에 좀 더 집중하고, 편안하게 경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경기장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내가 준비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은 과감히 내려놓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감독님에게서 배운 교훈이다.

# 리더란 무엇인가

다시 벤투 감독님 이야기다. 믿음, 신뢰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팀을 이끌어주셨다. 때로는 흔들릴 수 있는데 그런 모습을 선수단 앞에서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 한 팀을 이끌어야 하는 리더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 배웠다.

그라운드 위의 리더는 우영이 형이었다. 우영이 형과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같은 울산 출신이기도 하고, 학성중-학성고 선, 후배 사이다. 2015년 대표팀에서 처음 호흡을 맞췄다. 내게는 마냥 친한 형이었는데 이번 월드컵에서 고참으로서 후배들을 이끄는 모습을 보고 내심 반했다. 그라운드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적인 면에서도 선수단 의견을 스태프에게 잘 전달해주고, 선수들의 편의를 위해 앞장서서 나서고 챙겨줬다. 한 팀의 고참이자 리더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본보기가 되는 형이다.

# 축구는 나의 삶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하고 아파할 때 정말 괴로웠다. 많이 힘들었다. 통증을 참으며 축구를 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건강한 몸으로 축구를 하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즐거운 일인지 깨달았다. 통증만 없으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며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았다. 발목을 다쳤을 때는 한국에서 온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고, 그 전에 무릎 부상을 입었을 때도 전주에서 지우반 코치가 도움을 많이 줬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주변에 많아 괴로워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나는 축구 없이 살 수 없구나를 느꼈다. 축구를 못해서 괴롭고, 축구를 해서 기쁜 나를 보며 축구는 정말 나의 삶이란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경기장에서 숨 쉬고 있을 때의 그 느낌은 정말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현재 내 생각

지금 나는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월드컵에 다녀와서 2주 정도는 운동을 한 번도 안 하고 쭉 쉬었다. 월드컵 기간 열심히 준비했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최근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후반기를 맞이하기 전에 몸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준비하지 않았을 때와 준비했을 때의 차이를 알고 있다. 지금 근육이 많이 빠져서 다시 생성해야 하는 시기라서 온 몸에 알이 배기고 아프다. 힘들지 않다. 오히려 살아있다는 걸 느껴서 기쁘다.

사실 이번 칼럼을 위해 정한 주제는 2022년이었다. 한 해를 돌아보는 글을 쓰려고 했는데 자꾸 내년을 다짐하는 글이 길어졌다. 나도 모르게 빨리 재정비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던 것 같다. 앞서 말했듯, 돌이켜보면 월드컵을 목표로 뛴 장면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좋은 일, 안 좋은 일, 뿌듯한 일, 아쉬운 일 모두 월드컵과 관련되어 있다. 계속 그 과거로 고개를 뒤로 돌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월드컵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문득 들었다. 성격이 원래 그런 편이기도 하다. 시선을 늘 앞으로 둔다. 미리 준비해놓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정신적, 신체적으로 준비하는 것 같다.

2023년에 기대하는 것

# 책 많이 읽기

4년 동안 바라보고 달렸던 커다란 목표가 끝났다.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가야 하는 시점이다. 나 자신에게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 묻고 찾는 중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문장을 봤다. 며칠 뒤 한 선배가 인생에서 최고의 책이라 생각하는 책을 선물해줬다. 평소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도 책 선물을 받았다. 그 이후로 틈 나는 대로 책을 읽기 위해 늘 손에 책을 들고 다녔다. 서점에 발걸음을 옮기는 시간도 많아졌다. 다양한 책을 읽으며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문장이 더 와닿았다. 책에는 보물이 많이 숨겨져 있다. 무엇보다 시시때때로 울리는 휴대폰 알림 소리에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쉬운 요즘, 책 한 권을 읽는 행위는 그 자체로도 가치 있다.

최근에는 주로 스포츠 선수들의 자서전을 많이 읽었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데, 다른 스포츠 선수들은 어떤 지혜를 갖고 그 분야에 몰입했는지 궁금했다. 올해에는 책을 읽는 시간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인해 나의 시선이 흐트러지기 십상이었다. 내년에는 방해 요소들을 잘 차단해서 책에 더 집중하는 태도를 갖고, 책 속에 담긴 교훈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

 

# 언어 공부 하기

매년 가장 부족한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타인을 더 알아가기 위해서는 대화해야한다. 그래야 상대방에 대해 더 알게 되는데 외국인 친구들과는 확실히 벽이 많이 느껴진다. 의사소통이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교육 시스템 속에서 자란 사람들에게선 배울 점이 많다. 같은 상황을 마주치더라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기에, 내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지금 나는 너무나 좋은 환경에 있다. 이 환경에 머무는 동안 나의 생각과 시선의 폭을 최대한 넓히고 싶다.

#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하기

가끔 중요한 선택을 앞둔 분들이 내게 SNS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 조언을 구한다. 그럴 때마다 어떤 말을 해드려야 할지 조심스럽다. 그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선배가 선물했던 책, 독일 경제 문학가 보도 섀퍼의 <멘탈의 연금술> 중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 공유한다.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의 기준은 ‘책임’이다. ‘이 결정을 내가 책임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예스’라는 답이 나오면 그것이 곧 당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다. 더 나은, 더 완벽한 결정은 환상이다. 도전은 도박이 아니다. 한계를 뛰어 넘는다는 것은 무모한 것에 도전하라는 뜻이 아니다. 한계를 뛰어넘으라는 것은 더 큰 책임을 떠맡는 일에 도전하라는 것이다.

나 또한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적이 많다. 대표적인 두 가지가 고려대학교에서 전북현대로 이적할 때, 그리고 전북현대에서 홀슈타인 킬로 이적할 당시다. 신입의 무덤이라는 전북에 이적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고민이 많이 됐다. 나는 ‘벤치에만 앉아도 후회는 없다’는 결론을 내려 이적을 선택했다. 킬로 이적을 할 때도 과연 내가 독일 2부 리그로 가는 게 맞는지 혼란스러웠지만 과감히 선택했다. 선택의 결과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도 받아들일 마음, 즉 책임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두 선택은 옳았음을 증명했다.

# 변화의 타이밍

러시아 월드컵 이후 내 인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 이후에도 변화의 시기가 찾아올 것 같다. 6월이 될 수도 있고,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계약이 1년 반 남은 상태다. 후반기를 잘 마무리하고, 여름에 변화를 기대하는 시기가 된 것 같다. 당연히 유럽에 더 남고 싶고, 유럽 다른 나라이든 독일이든 다른 환경에서 한 번 더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나는 늘 변화를 추구했던 사람이다. 다시 적절한 타이밍이 된 것 같다. 어쩌면 변화를 줄 수 있는 마지막 시기이기도 하다. 후반기에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더 많은 기회가 생길 수 있도록, 그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나는 늘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선수가 되고자 한다. 어제의 나를 판단하는 건 내가 아닌 나를 봐온 사람들의 몫이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다. 월드컵의 영광을 더 느끼고 싶어 머무를 여유가 내게는 없다. 그 영광의 빛이 계속 빛날 수 있도록 내일 더 나은 선수가 되겠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목격하고 응원한 팬분들이 우리를 계속 자랑스러워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2023년에도 많이 뛰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2022카타르월드컵 국가대표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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