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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축제의 주인공이 될 우리들을 위하여

--이재성 축구

by econo0706 2022. 11. 1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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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14

 

월드컵 시즌이 시작됐다. 나는 카타르에 갈 채비를 마치고 이 칼럼을 쓰고 있다. 최종 명단이 발표된 후 얼마나 많은 연락을 받았는지. 이 자리를 빌려 내게 행운을 빌어준 모든 사람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다른 나라의 국가대표팀 명단도 발표되고 있다. 독일에 있다 보니 독일 대표팀 분위기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영상이 있다. 베르더 브레멘 선수들이 다 함께 TV를 통해 명단 발표를 지켜봤다. 팀 동료 니클라스 퓔크룩의 사진이 화면에 등장하자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축하했다. 이 영상은 분데스리가 공식 SNS나 독일 언론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기쁨과 환희가 고스란히 전달돼 영상을 보는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월드컵에 가는 건 이렇게나 기쁜 일인데, 나는 왜 더 조심스러워지는 걸까?

 

이번 칼럼을 통해 내 마음속에 오래 간직했던 월드컵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전하려 한다.

 

평소 토마스 뮐러를 좋아한다. 경기장 안팎에서 뿜어내는 밝은 에너지가 좋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다. 그도 월드컵에 간다. 소집 명단이 발표되고 뮐러는 독일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셀카를 찍어 올렸다. 환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신기했다. 어쩜 이렇게 나와 다를까? 나는 명단 발표가 난 후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기쁨은 잠시, 얼른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어릴 적부터 꿈꿨던 무대에 또 한번 갈 수 있어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마음만 품었다. 주변의 축하 메시지에 고맙다고 답했다. 그게 다였다.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에 가는 건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이다. 행복하고 기쁘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마음껏 분출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삭혔다. 그게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뮐러처럼 셀카를 찍어 올리거나, 퓔크룩처럼 환호하는 영상을 올리는 건 우리 대표팀에서 상상하기 힘들다. 정서적으로 어쩔 수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난 2018 러시아 월드컵이 끝나고 우리 선수들은 지난 4년 동안 각자 위치에서 엄청난 노력을 했다. 월드컵만 바라보고 뛰었다. 더 즐기고 싶었을 텐데 꾹 참고 노력했다. 남들이 모르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고,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뛰었다. 월드컵은 그런 우리의 지난 4년을 보상받는 자리다. 우리 모두 어릴 적부터 꿈꿔온 순간이다. 뛰어도 또 뛰고 싶은 무대가 바로 월드컵이다. 그 목표에 도달했는데 마음껏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즐길 수 없어 아쉽다. 나라를 대표해 가는 자리이니만큼 부담감과 압박감을 가져야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동안 우리들의 노력이 보상을 받는 자리인데 충분히 즐겨도 되지 않을까. 박수를 받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자리에서 우리는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고 꾹 참는다. 넘치는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기보다는 조절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게 미덕이라고, 당연히 생각한다.

신나는 마음으로 세계인들의 축제를 준비해야 하는데 우리는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월드컵 시즌이 다가오며 나는 ‘SNS와 포털사이트에서 멀어져야겠다’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된다. 지난날의 좋지 않은 경험이 쌓여 어느새 본능이 됐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선수가 그렇다. 어떤 선수들은 대표팀 소집 기간에 개인 SNS를 비공개로 전환하거나, 댓글 창을 닫는다. 발탁됐는데 축하보다 비난을 받는 선수도 있고, 경기장에서 나온 실수로 역적이 되는 선수도 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모든 걸 차단할 수는 없으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자신을 방어하는 거다. 결과가 어찌 됐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기 몫을 다하기 위해 뛰어 박수받아야 마땅한 선수들이고, 발탁된 것만으로도 축하받아야 할 선수들인데 참 아쉬운 현실이다. 우리의 ‘방어 기질’은 그런 시간을 통해 체득됐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 곽윤기 선수가 쇼트트랙 선수들을 유튜브로 찍어 올리는 걸 보며 정말 놀랐다. 월드컵에서 우리 선수들이 유튜브 영상을 찍어 올린다고 상상해봤는데,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네이버’에서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을 카타르에서 할 수 있을까? 잠깐 고민도 했지만 역시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으로 아쉬웠다. 우리 선수들이 훈련지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숙소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쉴 때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지 팬들과 직접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월드컵은 왜 유난히 큰 기대를 받을까. 왜 우리에게는 축제보다 전쟁터처럼 느껴지는 걸까. 우리나라 문화적 특징이 축구에 투영된 것 같다. 독일과 비교를 해보자면, 독일은 지역에 대한 애정이 나라만큼 크다. 분데스리가가 성행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훨씬 크다. 애국심. 그게 우리의 강점이기도 하다. 한국이라는 작은 팀이 세계적인 대회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2002 월드컵 4강, 2010 월드컵 원정 16강, 2018 월드컵 독일전 2-0 승리 등 우리는 한 번씩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왔으니 매번 기대가 더 커지는 게 아닐까. 그 기대를 받는 우리 역시 압박감과 부담감이 커져 더욱더 비장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 든다.

 

팬들의 입장을 생각해봤다. 누군가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 자연스레 그에게 관심이 더 많이 생긴다. 선수의 모든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모두 집중한다. 선수의 말을 이해하고, 행동을 관찰하는데 나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기준과 판단에 맞춰 누군가를 지켜보니 때로는 응원하기도, 때로는 비난하게 된다. 월드컵에 나서는 선수라면 그 강도가 더 세질 테고. 그렇다고 팬들에게 ‘그러지 마세요’라고 할 수는 없다. 방식은 제각각일지라도 이 모든 게 팬들이 축구를 즐기는 방식이니까. 꾸며진 것들이 아닌 온전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것이니 어느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되고, 그렇게 우리 축구선수들이 한 번이라도 더 관심을 받는다면 그걸로 됐다. 우리 선수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하나하나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여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파울루 벤투 감독님이 부임하신 후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카타르 월드컵을 묵묵히, 흔들림 없이 준비했다. 키워드는 4년 동안 똑같다. 빌드업 통한 축구. 이번 월드컵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4년 동안 연습한 축구를 얼마만큼 보여줄 수 있는지에 더 집중해주셨으면 좋겠다. 당연히 이기고 싶다. 화려한 개인기로 상대를 제치고 골을 넣고, 멀리서 뻥 차서 전방까지 공을 보내고… 이런 번뜩이는 장면을 팬분들이 원하실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최종 예선에서 보여준 모습을 세계 무대에서도 얼마나 선보일 수 있는지 봐주시길 바란다. 수비지역에서부터 미드진을 거쳐 풀어나가는 축구. 그걸 못하면 질책받아 마땅하다. 무려 4년 동안 준비했는데 우리가 준비한 걸 보여주지 못하면 그건 우리조차 스스로 비판해야 할 일이다. 꼭 이겨야 하는 경기, 꼭 잡아야 하는 상대, 최소 비겨야 하는 경기… 이렇게 관전 포인트를 잡기보다는 우리 한국 대표팀이 누굴 만나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겁내지 않고, 빌드업 축구를 잘 선보일 수 있는지에 중점을 뒀으면 좋겠다.

나도 궁금하다. 우루과이를 만났을 때 후방에서부터 풀어나가는 빌드업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최근 아이슬란드전에서, 물론 우루과이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위험 지역에서도 차분히 풀어나가려 하는 모습, 공격까지 이끌어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긍정적인 모습을 봤다. 이런 것들을 성공할 때마다 자신감이 솟는다. 그래서 기대가 된다. 지레 겁먹고 뻥 차버리지 않고 우리 편을 보고 차분하게 연결해내는 것. 그런 게 중요하다.

 

월드컵은 우리가 세계 무대에 증명하는 자리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바꾸고 싶다. 누군가를 위해 증명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증명하는 자리라고. 우리가 지난 4년 동안 해온 걸 버리고 포기한다면 그 모든 시간이 헛수고가 된다.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고, 안 되더라도 한 번이라도 좋은 장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하고, 그런 게 내가 바라는 모습이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 4년 동안 준비한 방법이다. 이기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우리가 택한 방법이 바로 빌드업 축구다. 그걸 통해 이기고 싶다. 우리 선수들 모두 다 같은 마음이다. 감독님도 그렇게 바라고 있다. 벤투 감독님과 선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준비해온 우리 대표팀의 축구다.

즐기는 월드컵에 대한 궁금증을 품다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면 즐기는 월드컵이 가능할까. 쉽지 않겠지만 즐기고 싶다. 내 이번 월드컵의 목표이기도 하다. 마냥 웃고 신나게 지낸다는 뜻이 아니다. 주어진 상황, 압박을 받는 이 상황을 다 받아들이고 우리가 해야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며 책임감을 갖고 쫄지 않고 당당하게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16강, 8강… 어느 누가 마다할 목표인가. 다 이기고 싶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다. 당연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세계적인 팀을 상대로, 세계적인 무대에서 우리의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성적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고 우리 모두 즐겼으면 좋겠다.

축구. 좋아서 시작했다. 월드컵이라는 꿈을 갖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훈련을 하고, 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비로소 월드컵이라는 세계인의 축제에 도달했다. 언제 또 이런 무대에 설 수 있겠나. 언제 또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아 보겠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최선을 다할 때 다하고, 쉴 때 쉬며 이 축제를 즐기고 싶다. 솔직히 말해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전혀 즐기지 못했다. 압박감 속에서, 너무 큰 책임감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매일 긴장하고 불안에 떨며 지냈다.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다. 월드컵이라는 목표를 이룬 우리에게 박수를 쳐주고 자랑스러워하며 축제의 장으로 향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축제의 주인공이다.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연극에서도 주인공은 누구보다 큰 관심을 받고, 응원도 받고, 질타도 받는다. 그런 걸 모두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어야 진짜 주인공이다. 우리 한국 대표팀도 그런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한 번, 즐겁게 해보자.

 

이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현 2022 월드컵 대한민국 국가대표축구팀 선수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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