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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쉰 두 번째] 서용빈, '신바람 열풍'에서 눈물의 은퇴식까지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3. 2. 17.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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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6. 18

 

어떤 선수가 팬들의 마음 속에 특별하게 자리잡는 것은 꼭 좋은 성적과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심지어 좋은 기억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정말 깊이 새겨지고 기억되는 것은 미움과 안타까움까지 버무려진 애증의 세월들이다. 그저 공부 잘 하고 말 잘 듣던 자식보다도, 먼 길 돌아와 질질 짜면서 고개 숙이는 자식이 더 깊이 부모의 가슴에 사무치는 법이듯 말이다. 한국 야구가 최대의 성황을 누렸던 90년대 중반 LG 트윈스를 응원했던 야구팬들이라면, '서용빈'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가슴 깊숙이 새겨져있을 법하다. 심지어 이제는 야구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었다고 생각하다가도, 문득 인터넷 포털 화면에 서용빈이라는 이름이 붙은 기사가 보이면 자신도 몰래 클릭을 하게 되곤 하듯이 말이다. 

 

1994년, 야구판의 새물결 

 

▲  서용빈의 타격자세 / ⓒ LG 트윈스 홈페이지

 

1994년은 우리 프로야구판에 한바탕 태풍이 불어 닥친 해였다. 80년대를 이끌어온 선수들이 조금씩 노쇠해가는 반면 아직 '90년대산'으로 불릴 만한 대형 스타플레이어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던 그 해. LG 트윈스에 나타난 네 명의 신인은 야구판에 '물갈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이상훈·정삼흠·김태원으로 구축된 최강선발진에 한 자리를 꿰차고 전반기 내내 무패가도를 달렸던 투수 인현배, 그리고 트윈스 타선의 1·2·3번을 차례로 차지하고 저마다 3할대 타율에 공수양면에서 기기묘묘한 장기들을 자랑했던 유지현·김재현·서용빈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중 김재현은 신인 최초의 '20홈런-20도루'를 성공시켰고, 서용빈은 신인 최초의 사이클링히트(한 게임에서 1·2·3루타 홈런을 모두 친 경우)를 기록했으며, 유지현은 신인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들 중 나머지 셋이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던' 경우였던 데 반해, 서용빈만큼은 '상상을 초월하는' 활약으로 주변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독특함이 있었다. 물론 서용빈은 비록 한 철 지나기는 했어도 야구명문인 선린상고와 단국대에서 4번을 치기도 했던 선수였다. 그렇지만, 그 해 드래프트에서 2차 지명 전체 42명중 41번으로 지명되어 고졸신인 김재현의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1800만원의 헐값에 계약을 맺어야 했던 무명신인이기도 했다.

 

그랬던 서용빈이 개막 초반부터 줄곧 '팀 최강타자의 자리'인 1루수에 붙박이로 기용될 수 있었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이변으로 꼽힐 만했다. 신인 최초의 사이클링히트 94년 4월 16일, 주말 사직구장에서 롯데를 상대로 했던 원정경기. 겨우내 몸이 근질거렸던 부산의 열혈 팬들이 홍수처럼 몰려들어 정신이 어질어질할 정도의 일방적인 응원을 롯데 선수들에게 내리쏟고 있던 날이었다.

 

그 날, 서용빈은 개막 직후 대타로 등장했던 몇 경기에서 맹타를 휘두른 덕분에, 데뷔 후 두 번째로 1루수에 선발출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지간한 고참 선수들도 지레 얼어버리던 사직구장 원정팀의 신인선수 서용빈은, 그 날 여섯 번 타석에 나와 다섯 개의 안타를 때려냈고, 그 중에는 1·2·3루타와 홈런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프로야구 사상 여섯 번째로 기록된 사이클링히트였다. 개막 1주일이 채 지나기 전이었고, 같은 팀의 유지현을 비롯해 날고 긴다 하던 아마추어 시절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아직 몸도 풀지 못하던 시점이었다.

 

그 다음 날 스포츠신문에 대서특필된 '서용빈'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야구팬들에게 새로이 입력되며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고, 반대로 동갑내기 신인들은 생각지 못한 충격으로 흔들리기도 했다. 대학 무대에서 같은 왼손잡이 1루수로서 몇 수 위로 꼽혔던 경희대 출신의 이숭용이 깊은 부진에 빠져들었고, 더구나 같은 팀에서 주전 1루수감으로 꼽혔던 경성대 출신의 허문회는 출장기회마저 빼앗기며 예상치 못한 선수생활의 침침한 길로 들어서야 했다.

 

간혹 시즌 초반에 미친 듯이 질주하다가도 조만간 제 풀에 지쳐 쓰러지던 '깜짝신인'이 없지 않았기에, 그의 이름 앞에도 '돌풍'이라는 수식어가 흔히 붙여지곤 했다. 더구나 선수생활 속에서 한 번도 그렇게 이목을 집중시켜본 적이 없었던 그의 돌출을 많은 이들은 '이변'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용빈이 일으킨 거센 바람은 그렇게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그 해 0.318의 타율에 72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신인 최초로 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이듬해에는 신인왕 트로피를 빼앗아갔던 팀 동료 유지현마저 피해가지 못했던 '2년차 징크스'마저 비웃듯 다시 전경기에 나서며 3할대를 때려냈다. 96년에 잠시 슬럼프를 겪긴 했지만, 97년에 다시 0.316에 69타점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별 일 없으면 3할은 치는' 일류급 선수임을 증명해보였다. 94년은 서용빈에게 '돌풍'이 아닌 '업그레이드'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업그레이드'의 비결, 행운을 묶어낸 노력 

 

▲  서용빈 선수의 수비모습 / ⓒ LG 트윈스 홈페이지

 

서용빈의 난데없는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시즌 전 오키나와 전지훈련장을 찾았던 일본 프로야구 3천안타의 전설 장훈이,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있던 허문회 대신 서용빈에게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타자'라고 칭찬한 데서 비롯된 '피그말리온 효과'를 빼놓을 수 없고, 애초에 홈런이 나오기 어려운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던 트윈스의 특성상 홈런 생산 능력이 별로 없는 서용빈의 '똑딱이 타법'이 1루수로서도 큰 흠이 되지 않았다는 점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묶어 현실화할 수 있었던 핵심은 '생긴 것과 달리' 무지막지했던 연습량이었다. 드래프트 전체의 끝에서 두 번째로 턱걸이해 간신히 프로유니폼을 입게 되자, 인생의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서용빈은 팀에서 가장 늦은 시간까지 연습장을 지켰고, 손바닥이 다 해지도록 방망이를 휘둘러댔다. 세수를 할 때는 온통 속살을 드러낸 손바닥이 쓰라려 손등으로 비누칠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내야수들의 송구만 잘 받아내면 된다는 식으로 베이스에 꼭 붙어있던 다른 1루수들과는 달리, 2루수 영역까지 활발하게 움직이며 강습타구에 몸을 날리던 수비동작들. 그것은 원년 신경식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수비형 1루수의 출현인 동시에, 수비범위가 획기적으로 확장된 '진화형' 1루수의 탄생이기도 했다.

 

게다가 영화배우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을 준수한 얼굴과 몸매. 그리고 불그스름한 색이 살짝 들어간 안경을 끼고 타석에 서면 꼭 만화영화 '독수리 5형제'의 누군가를 연상시키던 세련된 감각. 이따금 뜬금없이 터져 나오던 익살스런 표정까지. '몸 쓰며 밥 버는' 사람들 특유의 투박한 얼굴과 몸짓 대신 '즐기며 산다'는 듯한 여유로움이 묻어나던 그는 '신세대 열풍'이 거세던 90년대 중반 서울시민들의 얼굴 그 자체이기도 했다.

 

한 점 모자랄 것 없이 위로만 치솟아 오르는 실력에 빼어난 외모, 그리고 미인대회 출신 여배우와의 로맨스까지 그의 앞날에 '구김살'이라곤 없을 것만 같았다.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했다며 새삼 높아진 위상에 들뜨고 있던 바로 그 시절 서울 시민들처럼 말이다.

 

 90년대 서울시민들의 자화상, 서용빈 

 

▲  은퇴사 직후 파이팅을 외치는 서용빈 / ⓒ LG 트윈스 홈페이지

 

공교롭게도, 서용빈의 몰락이 시작된 것 역시 98년 봄부터였다. 온 세상이 'IMF'와 '모라토리움', 혹은 '국가파산'과 '구조조정'이라는 경제용어들을 배워야했던 살 떨리는 계절, 그 무렵 말이다. 그 해 그는 개막 직전 교통사고로 턱뼈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시즌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세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저 한 해 푹 쉬면 이듬해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나리라고 팬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 관해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 이듬해인 99년 봄이었다. 턱뼈 부상을 이유로 병역면제처분을 받으면서 병무청 직원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초췌해보이던 회색 스웨터 차림에 흰 고무신을 신은 채 '팬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며 울먹이는 서용빈의 모습이 TV의 뉴스와 연예정보프로그램을 통해 전해졌다. 결국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는 다시 99년 한 해를 통째로 쉬어야만 했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다시 복귀할 수 있었고, 이후 3년 동안 다시 2할 8푼대의 방망이를 휘두르며 트윈스의 1루를 견실하게 지켜내긴 했다. 그러나 그에게 '유예'된 것은 징역일 뿐, '병역'이 아니었다. 그는 30대 중반에 들어서던 2003년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해야 했고, 다시 이듬해까지 2년간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물론 그 사이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금메달과 함께 병역 면제에 도전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 때는 50홈런의 시대를 연 홈런왕 이승엽과, 5년째 3할 타율을 이어가던 장성호가 굳게 대표팀 1루를 지키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사이 만신창이가 된 서용빈은 제 앞가림에도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물론 동정의 여지가 없는 자업자득이라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어쨌거나 프로선수로서 한 번도 쉽지 않은 공백을 그는 무려 2년씩 두 번이나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훈련소 입소를 일주일 앞두고 뛰었던 2002년 8월 14일, 잠실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서용빈은 '꼭 그라운드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팬들은 그날을 '은퇴경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방황과 귀향, 그리고 은퇴

 

▲  서용빈을 떠나보내는 트윈스 팬들 / ⓒ LG 트윈스 홈페이지

 

그렇지만 그는 돌아왔다. 28개월의 공익근무요원 근무를 마치고, 우리 나이로 서른 다섯이 된 그는 2005년 잠실 홈 개막전에 주전 1루수 겸 6번 타자로 나서 담장을 때리는 2루타 하나를 때려내 수많은 홈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복귀전을 치렀다. 물론 4년간의 공백이란 그렇게 쉽게 떨쳐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체력과 훈련량이 모두 급격히 바닥나버리자 방망이는 순식간에 무뎌졌고, 그는 채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2군으로 보내져야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바닥이 무르는 강훈련 속에서 맞이한 2006년, 그는 팀의 주장을 맡고도 2군에서 주로 뛰는 바람에 매일 2군 훈련을 마무리하고 다시 경기장을 찾아 동료들을 독려하는 생활을 거듭해야 했다. 2006년 9월 24일 두산과의 잠실경기. 탤런트 안재욱이 시구자로 나섰고, 김제동을 비롯해 아내 유혜정과 함께 영화에 출연한 동료 배우들까지 수많은 연예인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5회가 끝나자 7번으로 기용된 1루수 서용빈과 8번으로 나선 포수 김정민이 목에 꽃다발을 걸고 그라운드에 섰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서용빈의 은퇴사가 이어졌다. "25년간… 야구가 있어서 행복했고, 또 트윈스 유니폼을 입을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여러분들의 사랑을 간직하고 새로운 도전을 향해 떠나겠다. … 반드시 LG 트윈스가 부활하리라 믿는다."

 

그 해 트윈스는 사상 처음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팀에 가장 크게 뚫려있던 구멍은 마운드와 더불어 1루, 서용빈의 자리였다. 그 날, 마지막 두 시즌을 초라한 1할대의 성적으로 마감해야 했던 서용빈과 함께 흘렸던 팬들의 눈물은,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이기도 했지만 또한 좋은 시절 집 나섰다가 멀고 험한 길 돌아와 초라해진 모습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아픈 자식을 품는 부모의 마음, 그 해원의 흔적이기도 했다.

 

존경받을 만한 노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고, 한때의 실수로 빠져든 너무나도 잔인한 수렁에서 결국 헤어나지 못한 채 초라한 마지막을 맞이해야 했던 선수. 그러나 끝내 포기하지 않고 팬들을 향한 마지막 사랑고백 속에서 스러져갔던 애잔한 이름. 그래서 비록 끝내 마지막 명예회복의 신바람을 불러오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트윈스가 다시 최강의 자리에 오르는 그날까지 팬들의 가슴에 간절한 촛불처럼 살아있을 이름. 그것이 아마도 서용빈일 듯하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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