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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쉰 번째] 부드럽고 강한 잠수함의 전설, 한희민

--김은식 야구

by econo0706 2023. 3. 15.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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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6. 07

 

몇해 전, 산 속에서 혼자 약초를 캐고 난초를 키우며 살고 있다는 한희민의 모습이 어느 매체를 통해 전해졌을 때 느낀 건 당혹감이었다.

길게 묶어 늘어뜨린 머리칼, 거뭇한 수염. 내가 알고 있던 한희민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기사를 다시 한 번 읽고 사진을 다시 한 번 뜯어보아야 했다. 만년 모범생 같기만 했던 한희민이 속세의 시선과 규범을 떠나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이 거듭 놀라웠다.

'쓸데없이' 솟구치는 투구, 동네 야구에선 '패널티'

야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알게 되면서 제일 먼저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바로 '잠수함 투수'의 존재였다. 그들의 투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위에서 아래로 내리 꽂는 것이 가장 강하고 낙차 큰 공을 던질 수 있다'는 나의 물리학적 상식을 여지없이 배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굳이 한 뼘이나 높여놓은 마운드의 높이에 불만이 있다는 듯 한껏 몸을 굽혀 공을 놓았고, 그 공은 또다시 위로 어느 만큼을 '쓸데없이' 솟구쳤다가 다시 가라앉으며 홈플레이트를 통과했다.

머리가 꽤 굵기 전까지는 그것이 비효율적인 동작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또래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 무렵 우리들의 동네야구에서 '잠수함 투구'라는 것은 한두 살 많은 형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패널티'였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형은 한 살이 많아서 공이 너무 빠르니까, 잠수함으로 던져야 공평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83년에 한국 프로야구를 통째로 들었다 놓았던 장명부가 완투에 완투를 이어가던 시절, 피곤이 몰린 어느 순간엔가 갑자기 팔을 옆으로 휘둘러 공을 던지며 타자를 승부하던 순간 몇몇 친구들이 분노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장명부가 일부러 공을 살살 던지면서 타자를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투수가 던지는 공에는 '직구'와 '아리랑볼'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래서 108개의 실밥을 움켜쥔 손가락의 모양과 팔꿈치의 각도, 그것을 통해 전해지는 힘의 배합에 따라 공이 휘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하고 한없이 느려지거나 떨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믿고 나서야, 나와 우리 동네 리그의 선수들은 잠수함 투수의 위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86년에 프로무대에 등장한 한희민은 내게 잠수함의 상징 같은 투수였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누르다

▲  라이온즈 시절의 한희민 /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물론 그 이전까지도 좋은 잠수함투수가 없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역사적인 첫 번째 공을 던졌던 청룡의 이길환이 잠수함이었고, 원년 14승을 올린 자이언츠의 에이스 노상수나 결정적인 순간에 강했던 타이거즈의 재일교포 투수 주동식 등이 모두 잠수함이었다.

그들은 모두 능수능란한 변화구의 달인들이었으며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기술자들이었다. 그리고 돌 같은 공을 던지는 강속구 투수와 방망이를 휘두르는 홈런타자가 격돌하는 거친 그라운드에서 마치 율동 같은 동작으로 출렁이며 그라운드의 시간을 휘저었던 스타일리스트였다.

그러나 무려 190㎝에 가까운 키에다가 바짝 말라붙어 더 길어보이던 허리와 팔을 한껏 웅크렸다가 크게 펼쳐 휘두르던 부드러운 한희민의 투구동작은 그 스케일이 달랐다.

그리고 그렇게 풍차같은 팔 끝을 떠나 오른손 타자의 등 뒤쪽 바닥에서부터 크게 휘어 멀리 바깥쪽 하늘로 치솟는 듯하다가 빨려들 듯 포수 미트로 꺾어져 내리는 변화구에, 속수무책 빈 방망이를 휘두르거나 혹은 젓가락으로 두드린 듯한 앙증맞은 내야땅볼을 굴려대기 일쑤였던 상대 타자들.

사람들은 흔히 한희민의 허리가 한껏 굽히는 순간부터 파도를 타듯 고개를 들썩이며 호흡을 조절했고, 그 부드러운 곡선과 타자의 방망이가 우직스럽게 쪼개내는 직선이 충돌하는 순간을 묘한 쾌감으로 즐기곤 했다. 항상 멀뚱한 표정으로 학춤을 추듯 그라운드의 공기와 시간과 호흡을 휘저었던 한희민.

돌풍, 그러나 약체팀의 영웅

그가 졸업한 세광고는 충청북도의 최강자였지만, 전국무대에서는 참가에 의의를 두는 '올림픽 정신'의 상징으로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래서 전국대회에서 어느 지역고교팀이 우승이라도 하면, 도청 앞에서 도민 환영대회가 열리곤 했던 그 시절, 충청남도의 천안북일고가 경북고·선린상고·군산상고와 광주일고 같은 쟁쟁한 강자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숱한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동안 충북 도민들이 느끼는 것은 묘한 부러움과 상대적 박탈감이기도 했다.

그 충북의 세광고가 처음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컵을 차지한 해가 바로 1980년이었다. 비록 서울에서 개최되는 '메이저 대회'는 아니었지만, 그 해 대구에서 열린 대붕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세광고는 군산상고·대구상고·광주일고 등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결승에 올라 인천고마저 무너뜨리며 우승했다.

그 돌풍의 중심에는 3학년생 민문식, 그리고 그와 함께 준결승에서 만난 광주일고의 선동열에 맞서 10회까지 완봉을 합작했던 2학년생 투수 한희민이 있었다.

젓가락같이 길쭉하기만 했던 몸에 초등학생 시절에는 농구로 시작했다가, 농구부가 없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바람에 야구로 방향을 돌려야 했던 한희민은 약한 체력 때문에 언더핸드 폼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것도 고등학교 들어선 뒤의 일이었고, 투수훈련을 시작하자마자 일구어낸 우승이기도 했다.

그러나 돌풍을 이어가기에는 팀의 전력이 너무 약했다. 그는 민문식이 졸업하고 송진우가 아직 입학하기 전이었던 81년의 고3시절을 동기생들인 박노준·김건우·성준 등의 빛에 가린 채 보내야 했고, 결국 성균관대에 진학한 뒤에서야 비로소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대학에서 만난 단짝이 바로 장채근이었다. 장채근은 깡마른 체구만큼이나 까다로운 구석이 있던 한희민을 푸근하게 리드했고, 한희민은 막 가다듬기 시작한 변화구들을 마음 놓고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3학년이었던 84년, 대학야구 봄철 연맹전에서 한희민은 예선리그 4경기와 결승리그 5경기까지 아홉 경기에 모두 등판해 창단 14년만의 첫 우승을 이끌어냈다. 대회 최우수선수는 물론 한희민이었고, 우수투수 역시 한희민이었다.

빙그레에서 시작한 프로 인생

85년부터 선수를 구성해 86년부터 한국프로야구의 '제7구단'으로 출범한 빙그레 이글스에 대한 대접은, 5년 뒤 '제8구단'으로 창단된 쌍방울 레이더스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야박한 것이었다.

연고지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1차지명이 무제한이었던 85년과 10명이나 되었던 86년 드래프트에서 기존의 팀들이 베푼 것은 '국물'도 없었다. 이글스는 별 수 없이 천안북일을 비롯한 충청지역의 선수들과 선심 쓰듯 양도된 각 팀의 '전력 외' 선수들로만 팀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90년과 91년 2년 동안, 쌍방울 레이더스는 각 팀이 2명씩을 1차로 지명한 뒤 2차 지명에 앞서 10명의 특별지명권을 부여받았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모아놓고 보니, 첫 시즌인 86년 마운드에서 믿을 만한 투수는 셋이었다. 전통의 강자 천안북일의 에이스 출신 이상군, 세광고 돌풍의 주역 한희민, 그리고 84년 30승 신화의 주인공 장명부.

물론 '썩어도 준치'라듯 시즌 초 이글스의 에이스로 주목받은 것은 장명부였다. 비록 계속된 배신과 여론의 뭇매 속에서 의욕상실에 빠졌지만, 이미 지나칠 정도로 확인된 바 있는 그의 저력이 신생팀이라는 백지 위에서 충분히 어느 만큼의 그림을 그려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해 그가 거둔 4.98의 평균자책점과 1승 18패의 성적. 그것은 투수 장명부의 생명이 완전히 끝났음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등판시키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던 빙그레 이글스 원년의 마운드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해, 이글스의 종합순위는 물론 꼴찌였다. 그러나 형편없이 무너졌던 전반기를 지나, 나름대로 리그에 적응하고 전열을 정비했던 후기리그에서는 3.5경기 차로 여유 있게 꼴찌를 벗어나며 잔인할 정도로 냉정했던 무대에서도 짓밟히지만은 않는 당돌함을 과시했다.

100승을 노렸지만 최악의 결단

▲  기아 타이거즈 2군 코치, 한희민 /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87년 겨울부터는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권이 3장으로 줄어들었다. 그 덕에 자원이 넘치던 대구에서 야수로만 셋을 뽑을 수는 없었던 라이온즈에서 강기웅과 유중일에 밀린 이정훈을 데려올 수 있었고, 뒤늦게 급성장하기 시작한 강석천, 원년에 삼성이 입단계약을 포기했던 이강돈을 모아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글스는 88년부터 비로소 강팀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이글스는 88년부터 92년까지 다섯 해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그 사이 네 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그것은 물론 2년차였던 87년에 13승, 이글스의 전성기가 시작된 88년과 89년에 각각 16승, 그리고 90년에도 12승을 올리며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떠올랐던 한희민과 역시 86년부터 89년까지 4년 연속 10승대를 올린 이상군의 '쌍두마차'가 단단한 방패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성적이었다.

그런 한희민이 불과 8년이라는 짧은 선수생활을 끝으로 팬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은 불운 때문이기도 했고, 또 그의 별난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92년에 2승으로 추락한 그는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고, 그 곳에서 '계투'의 임무가 맡겨지자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삼성에서 올린 4승을 포함해 8년간 모두 80승을 기록한 한희민의 최대 관심사는 통산 100승이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디든 선발투수의 보직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에게 허락된 '새 팀'은 엉뚱하게도 새로이 프로야구가 개막된 대만의 '준궈 베어스'였고, 의욕을 잃은 데다가 덥고 습한 기후에도 적응하지 못한 그는 두 시즌동안 불과 6승을 올리며 16패를 당하는 부진 끝에 돌아오게 된다.

물론, 한참 뒤떨어진 신생 리그에서마저 형편없는 성적을 받아들고 돌아온 그를 받아줄 팀은 없었고, 그대로 그의 선수생활도 마무리되어야 했다.

누구에게나 한 번 쯤 내리막길이 찾아오고, 그것을 잘 넘기면 다시 제2·제3의 전성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명예회복의 기회' 쯤은 가지게 되는 것이 프로선수의 생활이다. 그러나 첫 번째 닥친 고비에서 내린 그의 결단은 최악의 결과를 내고 말았다.

산 속에서 다시 그라운드로

그라운드에 서면 크고 우아한 몸놀림으로 경기의 다른 차원을 열었던, 그러면서 거칠게 덤벼드는 타자들을 부드러움과 교묘함으로 손에 흙탕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쓰러뜨리며 고고하게 마운드를 내려서던 그 얄밉도록 날카롭던 뒷모습.

'산중도사'가 되어있던 그의 모습은 일견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또 한편 속세의 부대낌을 견딜 수 없던 섬세한 난초 같은 그의 자연스러운 한 모습이 아니었을지.

어쨌든 그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자르고 속세로 돌아와 뒤늦게나마 아내와 딸을 얻었고, 다시 유니폼(KIA 타이거즈)을 입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뒤늦게나마 그를 야구장으로 되불러온 것은 우리 야구를 위해 참 잘된 일이다 싶다.

짧은 8년간의 선수생활 동안 이룩한 무려 47번의 완투와 13번의 완봉승 그리고 통산 3.25의 평균자책점과 80승. 언제나 가장 약한 팀에서도 다른 아홉 명의 선수들을 탓하지 않고 한 어깨로 돌풍을 몰고 왔던 강한 투수. 그래서 투수로서의 기술 외에도 그라운드 한가운데 가장 높이 솟은 곳에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투수들에게 전해줄 무언가를 분명히 가지고 있을 한희민이기 때문이다.

 

김은식(punctum)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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